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국현 Jan 02. 2024

춤추는 심장

우리의 심장은 뛰고 있다.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다.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려는 듯 잠시도 쉬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심장은 뛰고 있는 것일까? ‘뛰다’의 사전적 뜻은 ‘순간적으로 힘을 모아 자신의 몸을 허공에 뜨는 상태로 만들다’이다. 하지만 나의 심장을 비롯한 그 누구의 심장도 허공에 떠 있는 경험을 하지는 않는다. 심장이 허공에 떠 있는 상태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내 가슴이 허공이란 말인가? 그 허공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도 열심히 뛰는 것인가? 우리의 심장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뛰는 것일까?


물리학은 세상은 진동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들은 인간이 느낄 수 없을 뿐 항상 진동하고 있다. 빛은 떨림이다. 빛의 정의는 전기장과 자기장이 진동하는 것이다. 빛으로 인해 우리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눈과 뇌는 빛을 단순히 수용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여러 세포의 유기적인 활동과 뇌의 해석을 통해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내며 살아간다. 그 의미들은 마음의 구조를 만들어 빛이 닿지 못하는 인간의 심연을 완성한다.


소리는 공기를 구성하는 분자들이 진동하면서 만들어지는 파동이다. 파동은 진동이 공간으로 전파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파동은 소리이다. 소리는 공기가 진동하여 공간으로 전파되다. 빛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진동하며 ‘전지가파’라고 불린다. 파동은 질량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에너지가 있다는 뜻이다. 파동은 에너지의 형태로 존재하며 소리와 마찬가지로 빛도 파동으로 실재한다. 

진동계의 진폭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현상을 공명이라 한다. 대표적인 예가 라디오이다. 라디오의 고유진동수와 특정 채널이 보내는 고유진동수가 일치하면 공명 현상이 일어난다. 이 공명현상으로 인해 우리가 라디오에서 특정 채널만을 수신하여 들을 수 있게 된다. 하늘에 수많은 방송국 전파들이 떠돌아다니지만 내가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채널만을 들을 수 있는 이유이다. (요즘은 라디오를 듣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무엇을 본다는 것도 공명 현상이다. 공기의 진동이 고막을 진동시키듯이 전자기파가 우리의 망막을 진동시킨다. 공명으로 만들어진 전기 신호가 뇌로 전달되고 뇌는 이 신호를 해석하여 바깥세상의 모습을 재구성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은 결국 빛과 전자의 흔들림이다. 우리가 사물을 직접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와 사물 사이에는 빛의 춤이 존재한다. 그 춤이 우리와 세상을 이어주게 한다. 파동은 무언가와 공명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나의 심장도 춤을 추며 파동을 만들어낸다. 뛰면 흔들리고, 흔들리면 진동이 생긴다. 지금 쉼 없이 흔들리는 나의 심장은 진동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눈동자와 심장의 떨림으로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듯이 이 세상도 떨림으로 시작되었다. “빛이 있으라.” 태초의 빛은 빅뱅으로 탄생하였고 진동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며 시간과 공간을 만들었다. 내 심장이 만들어낸 파동은 세상과 공명하여 무엇을 만드는가? 그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움직이는 모든 생물은 뇌를 가지고 있다. 뇌는 생존하기 위해 세상을 왜곡한다. 뇌는 세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보다는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도록 세상을 적절히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우리는 세계의 실체를 직접 보는 못하며 오직 뇌가 보여주는 세계의 그림자를 볼 뿐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세상을 동굴에 비유했는지도 모르겠다.) 뇌가 세상을 왜곡한다는 것은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전달받은 정보에 나름의 의미부여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부여가 언어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스토리텔링이며 이것이 뇌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작용의 핵심이다. 즉 뇌는 스토리텔링 머신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이 세계를 1인칭 관점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재해석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실체가 아니라 뇌가 만들어낸 모습이다. 많은 뇌과학자들이 개인적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만한 이야기로 계속 만들어내는 과정이 의식이라고 한다. 삶의 본질은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자아는 이야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구성한다. 즉 ‘나’라는 것은 내가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스토리텔링의 결과이다. 


우리가 실체라고 인식하는 시간과 공간은 뇌의 스토리텔링 시스템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학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먼저 존재하고 그 안에서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스토리텔링이 인과관계를 만들고 이 관계가 시공간의 개념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없다면 우주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는 뜻이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의 저자 카를로 로벨리는 ‘현재’하는 것은 인간이 작은 시간적 간격들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갖게 되는 단정이라고 말한다. “흐르는 시간이라는 인상은 오직 거시적 규모에서만 유효한 근사치일 뿐입니다. 이는 우리가 세계를 대충 지각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죠.” 볼츠만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엔트로피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로벨리는 세계를 담는 공간도 없으며 사건들이 발생하는 시간도 없다고 말한다. 공간의 양자들과 물질들이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관계만이 존재한다. 우리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은 이런 관계들이 무리 지어 있는 것을 멀리서 흐릿하게 보고 있는 결과라는 것이다. 결국 물리학의 시간과 공간은 세상에 대한 우리 무지의 표현이다. 그는 책을 통해 “관계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실재도 없다. 사물이 있어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사물의 개념을 낳는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다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보다 “말씀이 있으라”가 먼저일 수도 있겠다.


만들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나는 무엇을 향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것이 이야기의 본질이다. 뇌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 Michael S. Gazzaniga는 좌뇌에는 여러 가지 정보를 통합해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해설가가 있다고 한다. 이 해설가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자아를 유지한 채 살아간다. 인생의 의미는 우리의 희로애락에 대해 좌뇌가 어떤 스토리텔링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세계와 나를 이어주는 도구이다. 옛날 시절의 어린아이들은 마을 어른들에게 세상의 탄생과 존재의 이유들을 들으면서 자랐다. 이야기는 아이들의 세상을 확장시켜 주었다. 태양은 어떻게 탄생했으며 번개는 왜 치며 비는 왜 내리는지를 알게 되고 내가 사냥하는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계 속의 나의 의미를 이해하고 되고 다시 세계로 확장시킨다. 이런 옛날이야기를 우리는 신화라고 부른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종교, 역사, 이데올로기는 결국 각자의 환경에서 세계와 관계 맺어진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뇌의 한계로 인해 세계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로 재해석하게 된다. 우리는 실재 세계를 볼 수 없다. 각자가 해석한 이야기에 갇혀 산다. 현재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고 소비로서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자본주의라는 이야기 속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질문을 멈추고 노동하는 소비자의 역할만 강요하는 이야기로 변질되었다. 이데올로기는 이런 이야기의 진실을 은폐한다. 의심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으면 자기 세계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노동하고 소비하는 노예가 될 뿐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위기에 빠져있다. 갈등의 고조를 클라이맥스라고 한다. 불평등, 환경 파괴, 기후 위기들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인류의 이야기는 이대로 재미도 없고 교훈도 없이 끝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동일한 세계를 보고 있지 않다. 각자의 뇌가 해석한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 안에 갇혀 산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어린아이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나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강요하면 폭력이 될 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이야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타인의 이야기와 서로 공명하며 세계를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연기하는 배우들이다. 예술은 자신만의 상상력을 자신만의 도구를 사용하여 의미나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의미나 가치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산물이겠지만 칼세이건이 말했듯이 상상력 없이는 우리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다.


빅뱅으로부터 시작된 파동은 인간과 공명하여 이야기가 되었다. 내 심장의 파동은 세상과 공명하며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네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아빠가 바라는 게 있다면 나만의 이야기를 넘어 타인과 공감하고 의미와 행복을 공유하는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그래야 우리들의 심장이 추는 춤은 의미가 있을 테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