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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Feb 12. 2024

딸에게 남기는 나의 비각(碑刻)-2

우리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호모 나랜스 Homo Narrans라는 용어가 있다. ‘이야기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하는 본능을 가진다. 사람은 옹알이 시절부터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요즘 스토리텔링이 부각되는 이유는 이야기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에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다. 인간은 자신만의 경험으로만 세상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많은 간접 경험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서로 이야기를 만들어 전하고 받아들인다. 서로의 이야기가 섞이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다.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역사 이전 시대에는 내가 배운 지식과 지혜를 내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합리적인 수단을 갖지 못했다. 그런 시대에는 이야기가 갖고 있는 효용 가치는 매우 컸으며 이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과정 자체가 인간의 역사이다. 인류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함으로써 역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나라는 별에 대한 그들만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하늘의 별은 홀로 존재할 때는 그저 별이지만 별과 별을 연결하면 하나의 이야기로 창조된다. 여기서 잠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냥과 순결의 신으로 불리는 아르테미스에게 칼리스토라는 아름다운 시녀가 있었다. 칼리스토는 어느 날 혼자 사냥을 나갔다가 숲 속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제우스가 칼리스터의 잠든 모습을 보고는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제우스는 지상에 내려와 그녀가 섬기는 아르테미스의 모습으로 변신해 그녀 앞에 나타나 관계를 맺었다. 그 후 칼리스토는 제우스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이를 안 아르테미스는 그녀가 순결을 잃었다고 생각해 칼리스토를 쫓아냈다. 칼리스토는 아들을 낳았고 그 소식은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에게 전해지고 말았다. 질투심 많은 헤라는 그녀에게 저주를 내렸고 칼리스토는 곰으로 변하게 되었다. 곰으로 변한 칼리스토는 아들을 놓아둔 채 숲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한 젊은 사냥꾼이 숲 속에서 커다란 곰과 만나게 되었다. 그 곰은 칼리스토였고 그 사냥꾼은 바로 칼리스토가 낳은 아들 아르카스였다. 숲 속에 버려진 아이를 어느 농부가 데려다 키웠고 지금은 늠름한 사냥꾼이 되었다. 칼리스토는 자기 아들을 한눈에 알아보고 반가운 마음에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갔지만 아르카스는 곰이 자기를 공격하는 줄 알고 화살을 쏘려 했다. 그때 하늘에서 제우스가 이 광경을 보고 있었고 이 안타까운 장면을 보다 못해 칼리스토를 하늘로 올려 별자리로 만들어주었다. 물론 아르카스도 함께 하늘로 올려서 별자리로 만들었다. 그래서 밤하늘에는 칼리스토가 변한 큰 곰자리와 아르카스가 변한 작은 곰자리가 생겼다. 


구술문화시대에 별자리는 나침반 역할을 했었다. 별자리를 형태로만 외우려고 하면 나중에 기억이 잘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별자리에 이야기를 심어 놓고 그 이야기로 별자리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별자리 모양을 오래 기억할 수 있다. 이야기는 장기 기억 효과와 몰입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별자리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던 어떤 우리 선조는 어로 작업 중에 풍랑을 만나 길을 잃어도 별자리를 보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별자리는 이야기가 되어 대대로 전해지게 된다. 별에 대한 이야기는 바다를 항해하는 자들에게는 길잡이가 되어 주고 미래를 알고자 하는 이들은 별을 보며 점을 쳤다. 이렇듯 과거에 이야기는 지식을 전수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세대별로 경험이 더해져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었다.

 

많은 현대인들은 영화 보기를 좋아한다. 주인공의 이야기를 마치 내 이야기인 것처럼 몰입한다. 내가 주인공에게 동기화되어 두 시간 동안 내 인생처럼 느껴진다. 주인공이 슬프면 나도 슬프고 주인공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나는 영화를 통해 대략 두 시간 동안 내 인생을 시뮬레이션해 보게 된다.

 

구술문화시대의 이야기는 내 삶을 시뮬레이션하는 도구였다. 이야기에는 교훈과 여러 가지 지식들이 담겨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중세 시대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지식과 함께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현대 디지털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인간은 역시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호모나랜스’라는 것이 증명된다.


스마트한 디지털 시대에 스토리텔링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스마트한 지배에 종속되어 있다. 자신의 삶을 업로드하고 전시하며 공감 버튼을 누르도록 지배당한다. 억압은 없지만 역시 저항도 없다. 자극만이 넘치고 새로운 관심거리로 순간 이동하며 개인의 삶은 파편화를 넘어 원자화, 정보화되어가고 있다. 의미는 사라지고 정보로 전락된 우리의 이야기는 주체성을 상실하여 돛대가 부러진 배처럼 세상의 폭풍 속에서 방황한다. 이것이 끝없이 타인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이다. 스토리텔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토리셀링이라는 상품으로 전락되었다. 도파민에 취한 실험실의 쥐처럼 그저 ‘좋아요’를 끝없이 누르고만 있을 뿐이다.


현대 사회는 정보의 바다라고 불린다. 그 바다에서 정보는 무한 증폭하여 태풍을 만들고 우리는 그 폭풍 안에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태풍 속에서 허우적대느라 의미를 상실했는지도 모르고 있다. 태풍의 위력은 매우 강력하여 삶의 공허를 느낄 틈을 주지 않는다. 정보의 태풍은 자극을 자양분 삼아 증폭되고 새롭게 융합된 자극을 뿌려댄다. 자극은 쓰레기를 생산하고 쓰레기에 덮인 지구는 위기를 맞고 있다. 의미 없는 자극으로 도취된 우리의 이야기는 위기를 맞고 있다. 이야기를 잃어버리면 역사도 같이 잃게 된다. 역사를 잃어버리면 미래의 이야기도 잃게 된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인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는 삶을 방향을 잃었을 때 철학에게 답을 구하곤 한다. 자크 데리다는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소외되고 차별받으면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의 데리다는 프랑스 사회의 편견과 폭력적 사고방식에 큰 상처를 받았으며 서구중심적 사고방식에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의 철학에는 이방인에 대한 사유가 깃들어 있다. 현대의 세계화 시대는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다. 이방인과 타자에 대한 생각과 태도는 세계화 시대에 새롭게 떠오른 숙제이다. 세계화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등장한 불평등의 확대, 환경 위기 등 다양한 문제들이 지리적 경계로 제한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데리다는 말했다. “살아감이란 언제나 함께, 잘, 살아감이다.” 우리에게는 함께 잘 살아가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코즈모폴리터니즘 cosmopolitanism이란 민족이나 국가에 속박받지 않고 세계적인 관점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세계시민으로 번역되는 하는 코즈모폴리턴의 본래 뜻은 ‘우주적 시민’이다.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너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난 우주에서 온 시민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디오게네스의 대답이 코즈모폴리턴 사상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칸트는 이 지구 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동료로 보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이 지구에 맨 마지막에 등장한 손님이므로 이 지구에서는 이방인으로 잠시 머무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국적이나 인종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 타자에 대해 조건 없는 환대 가져야 한다는 사상이다. 세계적 연대 구축을 통한 타자에 대한 우주적 사랑인 것이다. 칸트는 지구 위의 모든 인간은 지구에 대한 공동 소유권을 가지고 있으며 타자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환대해야 인류의 진정한 영구적 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두에서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세계와 관계를 유지하고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라 말했다. 인물, 사건, 배경을 조합하여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하나의 세계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위에서 시간의 순서에 따라 나의 줄거리를 구성하는 것이 나의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가 순서를 가져야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 삶의 방향을 잃으면 공허한 삶이 된다.

 

현대 사회는 방향을 잃고 이야기는 표류하여 좌초의 위기를 맞고 있다. 스스로 자신의 기업가가 되어 모든 사람과 경쟁하며 공동체 형성을 방해하는 신자유주의의 이야기를 넘어서야 한다. 신자유주의 서사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모든 사람을 원자화하여 고립시키고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급증하는 각자도생의 나만의 이야기는 공동체를 붕괴시킨다. 노동하는 소비자의 공동체는 ‘우리’를 만들지 못한다. 공동의 이야기가 없이는 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다.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희망의 이야기가 부족하다. 이야기만이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수많은 이야기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선택해야 한다. 이야기는 의미를 제공하고 가치를 전달하여 새로운 응집을 만들 수 있다. 이야기에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 타자에게 무조건적인 환대와 공감의 원을 넓히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연민의 영어 단어는 compassion이다. 즉 함께 com고통을 느낀다는 passion 뜻이다. 연민은 타자의 고통과 대면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말처럼 연민이란 결국 ‘함께, 잘, 살아감’의 근원이다. 연민이 공동체의 이야기의 출발이 될 수 있다. 공동체의 이야기는 정치적 제도들과 연계되어야 한다.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철학이며 그 해법의 구조를 만드는 것은 정치의 영역이다. 욕망과 경쟁과 질투를 넘어 타인과 공존을 찾는 것이 정치이다. 욕망으로 충만한 인간들에게 어떻게 한정된 자원을 합리적으로 분배하고 갈등을 중해하는 것이 고민하는 것이 정치이다. 복잡하고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이다. 위기를 예상하고 대처하는 것이 정치이고 다음 세대에게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정치이다. 즉 정치란 이야기를 바꾸는 힘이다.


남을 반겨줄 여유가 없는 현대의 호모나랜스에게 요구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모든 슬픔은 이야기에 담아서 말할 수 있고 누군가 들어준다면 우리는 견딜 수 있다. 이야기는 치유의 힘이 있다. 이야기를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은 상호 의존적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는 연결될 수 있다. 연결은 치유의 힘이 있다.


모두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행복을 실현하는 사회는 매우 먼 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목적이 뚜렷하다면 어두운 밤바다에서 등대의 불빛을 따라가는 것처럼 우리는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등대가 되어 사회, 이런 사회가 “우리들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멀고도 먼 길을 지치지 않고 같이 가는 방법이 있다. 내 밥그릇을 조금씩 덜어내어 이웃과 함께 나눠 먹으며 나아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너는 누군가의 등대가 되어 주는 삶을 살길 바란다. 나의 딸의 인생 이야기는 개인의 행복을 넘어 ‘타인과 함께 행복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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