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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Jul 14. 2024

프롤로그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본다. 주름져가는 얼굴과 점점 늘어가는 흰머리가 나에게 말해준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지 않다고. 눈을 감으니 지난 시절들이 주마등같이 떠오른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다. 부끄러웠다. 지나온 반 백 년이 온통 후회투성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했지만 훌륭한 인품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나의 부끄러움을 지우려고 애쓰지 않으련다.  


지난 인생을 뒤돌아 보았을 때 가장 아쉬운 점은 내 인생을 나만의 이야기로 만들지 못한 것이다. 늘 남들과 비교하며 불행을 자초하였다. 나만의 언어가 없어 늘 남들에게 해석 당하는 삶을 살았다. 나의 과거를 나만의 역사로 만들지 못했다. 자존감이 낮아 존재의 집은 부실했으며 인생의 폭풍을 불 때마다 맨 몸으로 떨어야 했다. 낮은 자존감은 명품이라도 있어야 감춰질 텐데 가난한 삶은 나에게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난 항상 절망의 굴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약관의 시절 나의 말들은 대체로 저급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는데 난 그동안 잡초 씨만 뿌린 셈이었다. 잡초 씨만 뿌려 놓고 열심히 노력해도 탐스런 과실이 열리지 않는다고, 그래서 이 세상은 부조리하니 종말이 와야 한다고 스스로 삶을 저주하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허무주의자로 지냈다. 내 운명을 사랑하지 못했으니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인생을 수리하며 살기는 커녕 매일 지구의 종말을 고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께서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나에게 두 개의 선물을 보내주셨다. 하지만 그냥 쉽게 주지는 않으셨다. 선물의 상자가 열리기까지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


세상의 종말을 고하고 있던 이십 대 초반 어느 날 나에게 천둥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 것이다.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녀의 자전거가, 아니 그녀가 통째로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녀가 내 마음에서 장기 투숙을 하게 되자 몇 날 며칠을 고민하였고 드디어 용기를 내어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그녀가 예상외로(?) 거절하지 않아 몇 번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만남이 계속 이어지자 그녀도 나에게 호감이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내어 사귀자고 고백했다가 (이번에는) 예상대로 거절당했다. 그날 집에 가면서 혼자서 엄청 울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 그리고 죄 없는 소주병에게 이 세상의 부조리와 지구가 종말 해야 하는 백 가지 이유를 설명하다 잠이 들었다. 현실에서 꿈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섰을 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하지만 항상 그랬듯이 나의 소망은 무시되었고 잠에서 깼을 때 내일의 태양은 벌써 오늘의 중천을 지나 지구는 여전히 실존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실연의 상처는 나를 더욱 염세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러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이립의 시절 그저 직립만 하고 있었던 어느 날, 십 년 전 나에게 매정하게 퇴짜를 놓았던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면 악의적인 계획인가. 장난이든 계획이든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자 만감이 교차하였다. 재회의 기쁨도 있었지만 그간 달라진 게 별로 없는 내 모습이 많이 부끄러웠고 실망스러웠다. 십 년이면 강산이 한 번 변한다고 하는데 내가 변한 건 그저 나이 밖에 없었다. 그동안 나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뜬금없는 성찰을 하게 되었다. 마치 그동안 사막만 걸은 느낌이었다. 나에게 실연의 슬픔을 안긴 세상에게 복수하고자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았는데, 나는 여전히 돈도 없었고, 미천한 학력을 상쇄할 만큼 사회적 성과를 얻지도 못했고, 물론 나의 그저 그런 얼굴은 탄력마저 상실하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나를 퇴짜 놓은 그녀에게 멋진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시크한 멘트를 날리고 싶었는데 그때의 나의 모습은 지질한 시트콤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 만남이 나에게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어둠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녀와의 재회가 다시 비극으로 끝나기 않기 위해 난 부단히 노력하였고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끝내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그녀가 지금의 너의 엄마다) 첫 번째 선물의 상자는 드디어 열렸고 더 이상 지구의 종말을 고대하지 않았다.


2012년 겨울이 끝나갈 무렵 두 번째 선물은 우주 끝에서 한줄기 빛을 타고 이 세계로 도착했다. 너의 출현(?)이었다. 너는 낯선 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엄마 뱃속에서 10개월 동안 적응기간을 가졌다. 엄마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간접적으로 보고, 엄마의 귀를 통해서 세상의 소리를 듣고, 엄마의 입을 통해 세상의 음식을 맛보면서 말이다. 이 세계에는 아빠의 존재도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엄마 배에다 대고 나의 실존을 수없이도 강조했었다. 나는 아빠란다. 너의 아빠. 머나먼 우주 끝에서 너의 여행을 시작하게 한 장본인. 너의 여행이 출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지구에서는 이 소식을 보통 산부인과라는 병원에서 알려준다.) 나는 무척 기뻤다. “네~ 천사가 출발하셨군요.”


나는 기쁜 동시에 걱정도 되었다. 내가 먼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기에 네가 실망할까 봐 걱정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또 아름다운 것도 많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너의 적응기 동안 엄마를 통해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맛 보여 주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었다.

 

2019년 12월 2일 오후 2시 41분에 드디어 네가 엄마 뱃속에서 나와 이 세상을 처음 접했을 때 무척 힘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너는 나오자마자 엄청 울어 댔으니까. 마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빠! 아빠가 말한 거랑은 뭔가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나오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이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 맞는 거죠??!!” 나는 너의 탯줄을 자르면서 말했다. ‘그래 이수야, 이곳은 아름다운 곳 이란다. 지구로의 이주를 환영한다. 사랑하는 나의 딸. 네가 오는 그 자체로 이 세상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구나, 아빠가 항상 예쁜 것만 보여 줄게’


너의 눈과 처음 마주쳤을 때 그 순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님을 깨달았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바울이 하늘의 빛을 마주하고 계시를 받아 변화된 것처럼. 너의 눈을 마주친 그 순간 난 그저 이 순간을 위해 예비되어 있었던 존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날의 모든 순간들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해야 했던 필연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후회로 가득했던 과거들은 지금을 위해 모두 없어서는 안 될 필요조건들이었다. 나의 그녀, 혹은 너의 엄마를 왜 그리 돌고 돌아 결혼하게 되었는지를 너의 두 눈이 나에게 모두 설명해 주고 있었다. 과거의 어느 한순간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아니 되었더라면 이 순간은 결코 오지 않았으리라. 만약 메피스토펠리스가 나타나 내가 원하는 시점으로 돌아가서 원하는 삶을 살게 해 준다고 하더라도 정중히 사양할 것이다. 너의 눈이 그동안 원망스러웠던 나의 과거를 사랑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의 과거는 이렇게 너의 눈을 통해 설명이 되었고, 분노했던 내 운명을 용서하고 화해하고 이제는 다시 미워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두 번째 선물은 나에게 두 번째의 탄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냉정한 곳이었다. 현재는 ‘자본주의 사회'라고 불리고 있다. 모든 아름다움이 화폐로 교환되는 곳. 아쉽게도 나에게는 너에게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을 만큼의 화폐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현재도 그렇다) 그래서인지 불현듯 지나온 세월이 많이 후회가 되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다행히 너의 눈이 나를 위로해 주었단다. ‘아빠, 괜찮아요. 우리의 만남이 있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만 했던 필연들이었어요.’ ‘고맙다. 이수야. (눈으로) 그렇게 말해주어서. 앞으로는 정말 열심히 살아서 화폐도 많이 모아서 많은 아름다움을 전해 줄게.’


하지만 또 이 세상은 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냉정한 곳이다. 현재는 ‘능력주의 사회'라고 불린다. 게다가 한국은 ‘시험 능력주의 사회'라고 불린다. 인생에서 치러지는 몇 번의 시험으로 운명이 거의 정해지는 곳. 특히 대학 학력고사를 잘 보아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은 수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기회가 한정되었고, 주어진 기회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생계유지 이상은 못되었다.


그래도 난 멋진 아빠가 되고 싶었기에 화폐 생산능력이 아닌 다른 능력으로도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독서였다. 화폐 모으는 능력은 떨어질 수 있어도 지적인 능력은 남들보다 뒤지고 싶지 않았다. 네가 커서 어느 날 갑자기 ‘아빠, 인생이 뭔가요? 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요?'라고 물었을 때 외국인을 만난 영포자 같은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교양을 모으기로 했다. (물론 화폐도 모으고) 교양이란 내가 발 딛고 사는 세계에 대한 이해이다. 내가 사는 세계를 오해하지 않고 제대로 이해를 해야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그 세계에 발 딛고 있는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세상과 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그 세상 위에서 나의 이야기를 비로소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각(碑刻)은 비석에 새긴 글이다. 내게 남은 날을 더 이상 후회로 남기지 않기 위해 매일 비석을 세우는 마음으로 산다. 이 비석에 너에게 남기고 싶은 말들을 편지처럼 새긴다. 이 편지들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읽어볼 수 있도록 아빠가 먼저 띄운 병편지들이다. 그리고, 아빠의 인생수업이자 삶의 지도이다. 내가 걷다가 넘어진 곳은 주의 푯말을 세우고 갈림길이 나올 때는 유용한 팁을 적어 놓겠다. 내가 넘어진 자리, 너는 부디 피해 가기를 바란다. 너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기를, 남들과 비교하지 않기를, 세상을 능동적으로 해석하며 살아가기를, 너의 하루를 열심히 쌓아 너만의 역사를 이루길, 튼튼한 자존감으로 멋진 존재의 집을 짓기를, 고운 말들로 좋은 인생의 씨앗을 뿌리기를, 인생을 허무로 남기지를 않기를, 너의 운명을 사랑하기를.


세상은 거대한 넷플릭스 같은 드라마다. 드라마가 모여 ‘넷플릭스’라는 시스템이 되듯이 인류 모두의 이야기가 모여 ‘역사’라는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정체성’이란 ‘너의 드라마’를 쓰는 것이다. 아빠는 사랑하는 나의 딸이 휘몰아치는 시련의 폭풍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삶을 몸소 써나가는 멋진 ‘인생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행복은 각자만의 파랑새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나의 파랑새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파랑새도 존중해줘야 한다. 나의 행복을 넘어 사회적 행복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다.


레 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 Victor-Marie Hugo는 나침반을 배의 영혼이라고 말했다. 사유가 없는 인생은 나침반 없는 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내 인생의 나침반, 사유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질문’이다. 항상 질문하면서 길을 잃지 않길 바란다. 나와 세상에 대한 회의와 질문하기를 회피한다면 나의 정체성을 타인에게 외주를 주는 셈이다. 주체성을 상실하면 행복은 마음의 창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 마련이다.


살다가 고통에게 포위당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철학을 찾아라. 고통의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철학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고통은 해석'이라 말했다. 새로운 해석만이 고통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모든 희망은 무너지고 손 내미는 사람 하나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서 고통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는 무엇인가? 나는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 고통에게 나의 영혼과 이야기를 빼앗기고 마리오네트의 삶을 살게 된다.

  

부모는 인생의 고통을 설명해줘야 할 의무가 있지만 나의 언어는 너의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너의 고통은 너에게 해석된 세상 유일한 고통이므로. 나는 이 편지들을 통해 너에게 인생의 화두를 던져줄 수 있을 뿐이다. 나의 화두를 씨앗 삼아 너의 언어로 잘 키우기를 바란다. 너의 언어가 고통을 왜곡하지 않기를 바란다. 고통을 직면하고 도망치지 말아라. 고통은 너의 발자국을 먹고 더 커지게 된다. 행복은 고통의 뒷면에 적혀 있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면 너의 행복을 읽을 수가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수많은 요건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확장이다.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나의 세상을 넓혀 나가는 것이다. 칭기즈칸 같이 남의 땅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으며 나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다. 우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확장되었다. 지구도 태양과 적당한 거리에 있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었다. 우주는 빅뱅이라는 한 점에서 시작되어 적당한 거리를 둠으로써 삼라만상을 창조하게 되었다. 적당한 거리는 공간을 창조하며 그 안에서 상호 간의 발생되는 중력에 의해 관계가 만들어진다. 내가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과의 새로운 연결을 뜻한다.

 

엄마, 아빠는 너를 건강한 자아로 키우기 위해 나름 노력을 많이 했지만 분명 부족한 점도 많았을 것이다. 만약 엄마, 아빠한테 상처를 입었다면 엄마, 아빠도 역시 상처받은 사람이라고 이해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부족함은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수없이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다시 일어서고 고치면서 가는 길이다. 정답이 없는 인생 문제를 풀면서 나의 세계를 수정해 나가는 것이다. 과거의 나를 오늘의 성찰을 통해 내일의 나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인생은 헤겔 선생이 말한 변증법과 같다.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것 같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이 바로 네 인생의 정답이 되는 것이다.

 

인생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두 개의 노가 필요하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일이다. 일과 사랑에 대해서 앞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겠다. 사랑은 신비한 현상이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기쁘다. 서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야 한다. 배고픔은 잠시 참을 수 있지만 평생 참을 수는 없듯이, 사랑은 잠시 대체할 수 있어도 사랑 없이 인생을 살 수는 없다. 사랑은 무엇인가? 잘 모르겠으면 사랑은 그냥 모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해라. 그러면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의 법칙에 의해 영원히 하나가 될 것이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가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문장이다. 아빠도 사랑하는 딸에게 편지를 보낸다. 아빠의 편지가 네 사유의 바다를 건너는 노가 되고 얼어붙은 바다는 깨는 도끼의 손잡이라도 되길 바란다.


사람이 살면서 편지를 쓰는 순간이 있다. 아빠 시대에는 편지가 연애의 시작이었다.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편지를 썼다. 지금은 그런 낭만이 사라진 것 같아 조금은 아쉽다. 남자들은 군대에 가면 모두 편지를 쓴다. 부모님, 가족, 친구, 연인에게. 철이 없어 못다한 사랑을 제대하면 실천하리라 약속한다. 자유를 구속당한 사람들은 모두 편지를 썼다. 바울, 그람시, 신영복, 오스카 와일드, 박노해, 안중근, 마르코 폴로, 세르반테스 등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었다.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렀을 때 모든 사람이 편지를 쓴다. 우리는 그것을 ‘유서’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 내용의 대부분은 못다한 사랑의 아쉬움이다. 그렇다. 편지는 사랑이다. 편지는 사랑의 전령이다. 사랑이 범람하는 세상이지만 편지로밖에 전할 수 없는 사랑이 있다. 편지만이 가지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동이다.


사랑하게 되면 쓰게 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다 보면 우리는 연결될 수 있다. 체제가 중요한가? 사람이 모두 선하다면 자본주의도 천국이 될 수 있다. 죽어서 천국에 갈 생각을 하지 말고 살아 있을 때 이 곳을 천국으로 만들어 보자. 글쓰기는 공동체의 산물이다. 읽고 쓰는 것 모두 인간을 위한 것이다. 아빠가 말하는 교양은 '결국은 사랑'이다. 우리 모두가 편지를 쓰고 그 편지들이 연결된다면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가 말한 함께, 잘, 살아감(well-living-together)은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부족하지만 아빠의 글들을 인터넷의 바다에 띄운다. 내 편지들은 데이터로 기록되어 너에게 영원히 기억되고자 하는 아빠의 소망들이다. 아빠의 편지는 인생의 나무에서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그날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 글은 딸을 사랑하는 아빠의 편지이자 인생 선배로서의 남기는 교훈이며 딸에게 영원히 기억되고자 하는 아빠의 비각이다. 인생의 폭풍이 몰아치더라도 꿋꿋이 너의 온몸으로 너만의 소설을 써가길 바란다. 아빠도 인생의 일진광풍( 一陣狂風) 속에서도 책을 읽고, 너에게 편지 쓰는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겠다.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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