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국현 Mar 11. 2024

딸에게 남기는 나의 비각(碑刻)-3

잠시만 나무처럼

옛날에 한 소년을 사랑하는 한 나무가 있었다. 소년은 날마다 나무와 놀았다.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왕놀이도 하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타고 사과도 따먹었다. 그러다 피곤해지면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소년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소년은 나무를 찾아와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돈이 없는 나무는 자기의 사과를 내어 주며 이 사과들을 팔아 돈을 마련하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가 사과를 몽땅 따서 가버렸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돌아온 소년은 나무에게 집을 요구했다. 하지만 숲이 집인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모두 내주며 이것으로 집을 만들라고 말했다. 그러자 소년은 나무의 가지들을 모두 베어서 가버렸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다. 또다시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돌아온 소년은 배를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배가 있을 리 만무한 나무는 자신의 몸을 베어다가 배를 만들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년은 나무를 베어내고 다시 멀리 떠났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또다시 돌아온 소년에게 나무는 말한다. “미안하다. 이제는 사과도 없고, 가지와 줄기도 없고… 나에게 남은 건 나무 밑동이뿐이야.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노인이 되어 버린 소년이 말한다. “이젠 나도 필요한 게 없어. 이가 나빠 사과를 베어 먹을 수도 없고, 힘도 없어 나무줄기를 올라가 가지에 매달릴 수도 없어. 지금은 몹시 피곤하니 그저 편안히 앉아서 쉴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이에 나무는 대답한다. “앉아서 쉬기에는 나무 밑동이 최고이지.” 


미국의 아동 문학가 셸 실버스타인이 1964년에 쓴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의 줄거리이다. 


세렝게티 초원의 배고픈 사자는 살기 위해 얼룩말을 잡아먹는다. 얼룩말도 살기 위해 사자의 눈을 피해 풀을 뜯어먹는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도 살기 위해 경제 전선에 뛰어든다. 인간은 먹고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은 차원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악전고투한다. 식물을 제외한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살기 위해 에너지를 외부에서 가져와야 한다. 아니, 뺏어와야 한다. 초식 동물은 식물을 뜯어먹어야 하며 육식 동물은 초식 동물의 살을 파먹어야 한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경제적 자원은 유한하니 나의 행복을 위해 내 의자를 남보다 빨리 차지해야 한다. 내가 치열한 의자놀이 게임에서 한 의자를 차지하게 되면 누군가는 낙오의 고통을 겪게 된다. 사자가 살기 위해 얼룩말의 고통이 필요하듯이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고통이 필요하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어쩌면 이처럼 살기 위해 아등바등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다. 오로지 움직이기 않는 나무만이 자신의 일부를 말없이 움직이는 것들에게 그저 아낌없이 내어줄 뿐이다.


하지만 열심히 움직여야 살 수 있는 인간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들을 자신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치부하며 그 고마움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무가 이 사실을 안다면 무척 서운할 것이다. 최근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나무가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 처리, 활용할 수 있는 지능을 보유한 유기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들이 잘 모르는 나무의 특성 몇 가지를 확인해 보겠다.


미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DARPA)에서 개발한 아르파넷 ARPANET은 대규모 핵공격을 극복하기 위해 모듈식으로 설계되었다. 핵공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네트워크가 파괴되더라도 일부만 보존되면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아르파넷이 인터넷의 기원이 되었다. 인간들은 인터넷을 발명한 자신들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나무와 식물들은 지구상에 최초로 등장했을 때부터 이미 이런 시스템을 사용했다. 


동물들은 여러 개의 장기들이 모여 하나의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어 움직이는 데에는 효율적이지만 장기 중 하나라도 손실되면 생존이 매우 어려워진다. 하지만 나무들은 장기 대신 여러 개의 모듈로 구성되어 있어서 인간에게 사과와 가지를 내어 주어도 생존에 문제가 없다. 나무와 식물은 모든 기능이 전신에 분포되어 있어 일부분이 손실되어도 생존에 지장이 없다. 그리고 동물은 흉내 낼 수 없는 재생능력이 있다. 식물은 하나의 네트워크 구조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식물은 살아 움직이는 인터넷이다 


지능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면 나무는 그 어떤 동물보다 지능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다. 나무는 모듈성을 지닌 하나의 네트워크 구조를 지닌 분산지능을 가지고 있다. 동물과 같이 중앙처리센터를 거치지 않아 정보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 식물은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이 없어 감각이 무딜 것이라 생각하지만 인간의 오감보다 더 발달한 감각을 보유하고 있다. 식물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습도 및 자기장도 감지할 수 있고 많은 화학물질의 농도도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식물은 향기로 대화한다. 식물이 내뿜는 향기 분자 하나하나가 그들의 단어라고 한다면 그 어휘력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나무와 식물이 없었다면 인간의 현대 문명은 불가능했다. 러시아 식물학자 클리멘트 티미리야제프는 이렇게 말했다. “식물은 지구와 태양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다.” 사실 인간이 사용하는 거의 모든 에너지는 나무와 식물에서 나온 것들이다. 화석연료는 오랜 세월 동안 식물이 축적된 것이다. 게다가 나무는 산소 공급, 공지 정화, 유량 조절 등 여러 가지 조절 작용을 통해 인간에게 유용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 광합성은 동물들에게 숨 쉬며 살 수 있는 산소를 제공해 주며 태양의 자외선으로부터 동물들을 보호하는 오존층도 만든다. 나무가 분비하는 피톤치드는 우리의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회복을 돕는다. 피톤치드는 식물이 박테리아, 곰팡이, 해충과 같은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균 작용을 지닌 휘발성 유기 화합물을 말한다. 면역 효과와 함께 교감 신경계의 흥분을 해소시키는 효능이 있다. 


이처럼 나무는 세상을 풍요롭고 평화롭게 만든다. 또 환경과 화합하며 공생으로 보답한다. 타인의 살점을 파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들은 나무에게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이 삭막한 세상에서 잠시만이라도 나무처럼 되어볼 수는 없을까?


잠시라도 나무가 되어 보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바로 명상이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명상은 어두울 명(冥) 생각상想 의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고 그 뜻은 ‘생각을 잠들게 하여 모든 생각을 비우는 것’이다. 즉, 모든 동물스러움을 버리는 것이다. 나를 동물로 만드는 본능, 욕망들을 버리고 마음의 고통으로 해방시키고 순수한 마음 상태로 되돌아가는 의식 훈련이다. 평화의 원천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곳에 평온함과 온전한 자유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명상의 정의에는 수십 가지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호흡을 통해 지금 여기에 실존함을 깨닫고 부정적 감정을 걷어내는 것이다. 우울하면 과거에 사는 것이고 불안하면 미래에 사는 것이라고 노자가 말했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있을 때 스트레스 반응이 일어난다. 행복은 몸과 마음이 지금 여기에 현존할 때에만 가능하다. 명상의 본질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과거도 미래도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온전히 통제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순간뿐이다.


명상을 반복하여 연습하면 뇌가 재구성된다. 신경가소성에 의해 뇌의 신경 회로에 일정한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명상은 감정 조절 능력과 면역 체계를 강화하며 주의력과 통제력을 향상하고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을 높여준다. 몸의 근력을 기르기 위해 운동을 하듯이 마음의 근력을 기르기 위해 명상이 필요하다. 마음의 근력을 길러야 하는 이유는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심신의 모든 병은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화는 내면의 불안감을 외부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그 원인은 사실 두려움이다. 이는 모든 부정적 감정의 근원이며 나를 동물처럼 행동하게 하는 원인이다.


뇌에서 감정과 관련되어 있는 정보들을 가장 많이 처리하는 뇌 부위가 ‘편도체’이다. 화가 나면 이 편도체가 활성화된다. 화가 폭발하면 논리적인 뇌의 회로와의 균형이 깨지면서 편도체가 뇌의 회로를 점령한다. 심리학자 다니엘 골먼 Daniel Goleman은 이러한 현상을 ‘편도체 납치’라고 명명했다. 마치 테러리스트가 항공기를 납치하여 제멋대로 조종하듯이 편도체가 뇌를 분노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분노가 발생하면 뇌 안의 평화는 깨지고 편도체가 뇌를 지배한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의 쓰나미가 일어난다면 뇌가 편도체에게 점령당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편도체는 위기 상황을 대처할 수 있도록 몸을 대비시킨다. 뇌는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여러 신체적 변화를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스트레스성으로 진단받는 많은 증상들은 자율신경의 부조화로 발생된다. 자율신경은 자동차로 비유하면 엑설레이터의 역할을 하는 교감신경과 브레이크의 역할을 하는 부교감신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균형이 깨지면 각종 신경성 질환이 발생된다. 자율신경이 조화를 이루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신경이 알아서 내 몸을 가장 쾌적한 상태로 유지시켜 준다.


의지와 상관없이 작동하는 자율신경계는 우리 몸의 기능을 자율적으로 조절하는 신경계로 호르몬분비, 혈액순환, 호흡, 소화 등과 같은 여러 활동을 조절해 항상성을 유지한다. 이러한 기능은 반사적이고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율신경계의 활동을 인지하지 못한다. 교감신경은 공포스럽거나 응급 상황일 때 우리가 빠르고 강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시켜 준다.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 심장 박동수 증가되고 혈액 공급량이 증가한다. 기관지 이완으로 산소 공급이 원활해지고 눈의 동공 확대되며 혈당을 높이고 소화기능이 억제된다. 부교감신경은 스트레스가 없는 편안한 상황일 때 활성화 되는 신경이며, 신체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이용해 체내에 에너지를 최대한 보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부교감신경은 몸을 이완시켜 편안히 안정되도록 에너지를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즉 긴장 상태에 있던 몸을 평상시 상태로 되돌려 준다. 부교감 신경이 활성화되면 혈압, 심박수, 호흡이 안정화되고 소화 활동 증가한다. 맛있는 음식을 볼 때 침이 고이고 사랑받는 느낌이 들 때 편안해지며 밥을 먹고 나면 졸리고 명상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 심신이 안정되는 것은 바로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혈압이나 맥박, 체온, 장운동을 조절할 수 없지만 유일하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 바로 '호흡'이다. 자율신경의 불협화음을 해소하고 진정시키는 가장 빠르고 유용한 도구는 바로 호흡이다. 교감신경은 호흡을 얕고 빠르게 작동시키고 부교감 신경은 깊고 천천히 작동하게끔 한다.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은 항상 교감신경이 긴장되어 있어서 기본적으로 호흡이 얕고 빠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감신경이 폭주하는 순간 우리가 의식적으로 호흡을 천천히 깊게 하면 반대로 부교감신경의 작용을 활성화시켜 자율신경이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사람은 흥분을 하면 심장박동수가 증가한다. 심장을 직접적으로 천천히 뛰게 할 수는 없지만 호흡을 통해 심장박동수를 간접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그러면 흥분된 편도체를 어느 정도 안정화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심호흡을 하면서 화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번의 깊은 호흡만으로도 편도체에 변화가 생기며 우리의 감정 상태에 관여할 수 있다. 부정적 정서는 이처럼 호흡을 통해서 조절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운동이 몸을 단련하는 것이라면 호흡은 신경을 단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흡이 조급해질 때가 마음이 불안할 때이다. 호흡은 납치된 나의 편도체를 구조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다. 노력은 집착을 낳고 집착에 사로잡히면 편도체가 활성화된다. 돈에 집착하는 사람은 늘 돈이 부족하고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은 늘 힘이 약하다고 느낀다. 외모에 집착하는 사람은 늘 자신이 매력이 없다고 느낀다. 집착이 모든 두려움의 원인이다. 집착이라는 사슬을 끊어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나무는 모든 것을 수용한다.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더라도, 초식 동물이 물어뜯고 인간이 베어가도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마음가짐을 가지면 어떠한 역경도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 나에게 어떠한 삶이 펼쳐져도 늘 만족할 수 있게 된다. 수용은 집착의 사슬을 끊고 행복으로 인도한다. 그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 행복이다. 마음이 얽매이지 않아야 두려움이 생기지 않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집착을 버린다는 뜻은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소망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안을 근본적으로 낮추기 위해서는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인생은 양자역학적 사건 발생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우연들의 연속이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우연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지혜가 필요하다. 수용은 내 삶에 다가오는 그 어떠한 일도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에게 다가온 일은 그저 나를 지나가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으면 그 어떠한 역경도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가 없다. 불행은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저항하고 거부하는 나의 해석이라는 생각이다. 생각을 통제하면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 생각을 통제하는 방법은 역경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 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온갖 자극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고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하며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기를 갈망하면서 이 순간순간을 놓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멈추는 것이 인생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명상은 바로 ‘하지 않음의 행복’이다. 명상을 하면 공포, 불안을 느끼는 편도체와 욕망을 느끼는 선조체가 줄어든다. 호흡으로 불안을 다스리면 욕망이 줄어들고 평온한 상태를 느낄 수 있다. ‘하지 않음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임을 깨달을 수 있다. 


‘하지 않음의 고수’인 나무에게 명상을 배워보자. 우선 숲으로 가서 나의 숨결에 공명하는 나무를 찾는다. 그런 나무를 발견하면 그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를 만져보고 눈을 감고 나무를 만나는 상상을 한다. 숨을 편안히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나무의 생명력을 느껴본다. 날숨에 초점을 맞추고 숨이 나에게서 부드럽게 떠나는 것을 느껴본다. 들숨에 광합성을 느껴 보고 날숨에 욕망이 배출되는 것을 느껴본다. 나의 실존을 위해 타인에게 안겼던 고통에 대해 사죄한다. 모든 것을 맡긴다는 느낌으로 나무를 안아본다. 나무의 향기를 맡아본다. 향기는 나무의 단어이므로 향을 음미하면서 나무와 대화를 시도해 본다.


긴장을 풀고 내가 나무와 하나 되고 있음을 느껴본다. 나의 다리가 나무뿌리처럼 땅 속 깊이 뻗어 내려가는 것을 느껴본다. 대지의 에너지가 나의 뿌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껴본다. 대지의 양분이 나의 뿌리를 타고 줄기로, 가지로, 나의 잎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상상해 본다. 두 손을 나뭇가지처럼 들어 올리고 태양의 에너지를 느껴본다. 태양의 에너지가 나의 잎으로 들어와 줄기를 타고 뿌리까지 흘러감을 느껴본다.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대지의 양분과 잎에서 흘러 내려오는 태양의 온기가 연결되어 결국은 모두가 하나임을 느껴본다. 이처럼 명상은 결국은 모두가 하나임을, 즉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깨닫는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형제이며 우리가 하나였던 기억을 되찾는 것이다.


나무의 시간은 느리다. 끈기 있게 성장하면서 주변 환경에 순응한다. 나무는 서두르지 않는다. 반면 인간 사회는 브레이크가 없는 기차처럼 폭주하고 있다. 인간이 나무에게서 우주의 시간을 순응하는 수용성을, 욕망의 성취가 행복이 아니라 무위자연이 진정한 행복임을, 타인을 살점을 파먹지 않아도 공생하고 화합할 수 있는 평화의 능력을 배울 수 있다면 폭주하는 기차를 절벽 앞에서 기적처럼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나무처럼 살 수 있다면 지구는 평화로운 숲이 될 것이다.


인간은 숲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이 숲을 좋아하는 것은 본능이다. 나무와 숲은 우리 육체와 정신의 고향이다. 오랜 도시 생활 때문에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2천5백 년 전 인도의 어느 보리수나무 아래서 한 수도자가 6년 동안 나무 명상을 하다가 해탈을 깨우쳤다. 우리는 그를 부처라 부른다. 부처처럼 할 수는 없겠지만 가끔 한 번씩 나무를 찾아가 명상을 하면 내면의 평온을 찾을 수 있고 세상에 그 평온들이 쌓이면 진정한 인류의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에서 베어만 할아버지가 그린 잎새가 존시의 희망이 되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희망의 잎새를 그려 준다면 세상은 멋진 풍경화가 될 것이다. 생텍쥐페리가 말했듯이 나무는 별과 우리를 이어주는 길이다. 가끔씩 잠시만이라도 나무처럼 살아보자. 배를 타고 바다로 흘러가듯이 나무를 타고 우리들의 별에게 흘러가보자. 그곳에서 멋진 지구 풍경화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딸에게 남기는 나의 비각(碑刻)-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