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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Mar 29. 2024

존재의 창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영화 <컨택트>에서 주인공 루이스는 헵타포드(외계인)의 언어를 배운 후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헵타포드들은 글을 쓰기 전에 이미 전체 문장의 구조와 길이를 알고 있었다. 그들의 언어 구조는 이미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다. 인류의 언어는 선형적인 구조를 가진 반면에 그들의 언어는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 속의 우주선은 마치 콘택트렌즈처럼 생겼다. 마치 새로운 눈을 주려고 지구에 온 것처럼. 헵타포드는 루이스에게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선물해 준다. 루이스는 그들의 언어를 분석하고 이해함으로써 미래를 보는 능력을 얻게 된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함으로 인해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인간의 뇌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을 해석하는 도구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언어’이다.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은 언어를 통해서만 현실이 된다. 그래서, 내 언어의 넓이와 깊이만큼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기껏해야 몇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지만 북극에 사는 이누이트 족은 수십 가지가 넘게 눈을 구별할 수 있다. 이르구자크(집을 만들 때 쓰는 눈), 푸가크(결이 곱지 않은 눈), 마사크(봄에 얼음이 녹기 시작할 때의 부드러운 눈), 아케로카크(꽤 단단하지만 집을 만들 정도로 단단하지는 않은 눈), 가니크(지금 내리는 눈), 아투트(땅 위에 쌓인 눈), 마우야(매우 부드러운 눈) 등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수십 가지 종류의 눈이 이누이트에게 보이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눈을 구별할 수 있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도 그들의 언어를 배우면 그들처럼 눈을 수십 가지로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이누이트의 언어를 배우면 “지금은 마우야(매우 부드러운 눈)가 내리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눈을 새롭게 보는 눈이 생기는 것이다. 비록 작긴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야 세계의 한계를 넘을 수 있고 내가 아는 언어만큼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된다. 언어는 세상을 보는 안경이다. 빨간색 안경을 쓰면 온 세상이 빨갛게 보이듯이 내가 어떤 언어를 가졌는가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언어가 가난하면 인생이 가난해진다. 풍요로운 인생은 살고 싶다면 우선 나의 언어를 경작해야 한다. 호모 나란스인 인간은 모두 각자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언어와 인생은 서로 기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나의 언어가 풍성해야 나의 이야기도 풍요로워진다.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이 질문의 해답은 내가 어떤 언어를 가졌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잘 경작된 나의 언어가 풍요로운 인생으로 안내할 것이다.


나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면 우선 나만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 남의 언어를 빌려 쓰면 타인에게 종속된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생각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의 생각들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사회화 과정이라는 것이 결국 이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이 요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나의 언어를 발전시키고 확장되지 않으면 내 삶의 주권을 빼앗기고 노예의 삶으로 전락하고 만다.


언어의 그 시대의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기도 하다. 사회적 약자들은 그 시대의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늘 소외되었다. 노예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은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의 언어로 말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경제적 언어에 세뇌되었다.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자본가의 말에 현혹되어 정작 자신의 삶의 주인은 되지 못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에 자발적 부품이 되어 살아갈 뿐이다. 주어는 없이 형용사와 부사만 난립하는 허접한 문장이 될 뿐이다.


나의 언어가 없다면 내가 진정 무엇을 욕망하는지 표현하지 못한다. 지배세력의 기획과 세뇌에서 벗어나 내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나만의 언어가 필요하며 그 언어를 키우기 위해서는 독서와 토론이 꼭 필요하다. 나의 언어로 나의 의식세계를 채우지 못하면 지배세력의 요구 사항으로 채워지게 된다. 즉 사유 없이 노동하는 소비자로 살아가게 된다. 무지가 죄는 아니겠지만 기득권의 토양을 제공하게 된다. 대중은 기득권을 선망하고 오히려 그들을 지지한다. 나의 언어를 상실하고 그들의 언어에 현혹된다면 이 사회의 불평등, 폭력, 고통은 줄어지지가 않는다. 해방은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나만의 언어가 없다면 질문이 시작될 수 없다.


하나의 단어가 사라지면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48년에 소설 ‘1984’을 세상에 내놓았다. ‘1984’는 빅 브라더의 극단적인 전체주의를 묘사하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소설 속의 정부(빅 브라더)는 오직 자신만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과거를 날조하고 국민을 선동하고 개개인의 사생활을 철저히 감시한다.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등을 동원하여 공공시설뿐 아니라 집 안까지 감시하며 사회 모든 것을 통제한다. 일기를 쓸 때에도 머리 위에 텔레스크린이 감시하고 있어서 권력에 반하는 생각을 적을 수도 없다. 명목상으로는 전쟁으로부터 시민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선의의 감시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오로지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통제일 뿐이다. 


빅 브라더는 대중의 언어를 통제한다. 단어의 수를 축소함으로써 시민의 사고를 축소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신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권력 유지에 방해되는 언어를 제거하고 줄여 나가서 최종적으로 개인으로부터 사유하는 자유를 박탈시킨다. 언어를 통제할 수 있으면 대중의 의식까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권력의 지시와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라고 강요한다. 빅 브라더 사회에는 ‘왜 why?’라는 질문이 없다. 사고의 융합이 멈춘 것이다. 태양이 융합을 멈추면 태양은 물론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가 사라진다. 사고의 융합이 사라지면 역사는 다시 과거로 회귀한다. 역사의 빅 크런치 Big crunch가 발생하는 것이다.


너의 언어를 확립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독서이다. “사람은 그때까지 읽은 책이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영상물이 독서를 대체하여 책을 읽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갈수록 영상의 길이는 점점 더 짧아지고 있고 유튜브 쇼츠, 틱톡, 인스타릴스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숏폼 영상들은 자극적이고 중독이 되기 쉽다. 새로운 것들을 접해서 자극을 받으면 보상 호르몬이 나오게 되어 있는데 이런 영상들은 그런 자극들을 극단적으로 높인 것이다. 뇌가 이런 자극들을 계속 받으면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보상을 줄이게 된다. 그러면 일상생활에서의 다른 즐거움을 얻기가 어렵다.


최근에 미국 뉴욕 에릭 애덤스 뉴욕 시장이 청소년 정신 건강에 해롭다고 해서 틱톡,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스냅챗 등 5개 소셜 미디어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런 소송을 제기할 만큼 실제로 청소년들이 이렇게 많이 숏폼, sns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른들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모든 중독이라는 것은 매체 수단만 다를 뿐이지 사람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같다. 팝콘처럼 터지는 강한 자극만을 원하고 약한 자극에는 무감각해져 버린 뇌를 ‘팝콘브레인’이라고 한다. 이처럼 숏폼에 중독되면 꾸준히 뭔가를 인내할 수 있고 충동을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약해진다. 이제는 선택을 할 필요도 없다. 알고리즘이 다음 선택을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나의 뇌가 알고리즘에게 잠심 당하면 나의 생각도 잠식당하게 된다.


짤막하고 즉각적이고 자극적인 영상물들은 사고의 빈곤, 주의력 분산 등의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사고가 얄팍해지고 있다. 신경과학자 수전 그린필드는 디지털 영상물들이 인간의 정신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한 바 있다. "인터넷이 촉진시키는 정신의 변화는 뇌를 유아적인 양식으로 작용하도록 비틀고, 우리 모두를 자폐적이 되도록 압박하는 세계를 창출함으로써, 인류에 대한 그 가공할 위험성은 종에 대한 위협인 변화와 비교할 만하다.”현대인은 정보를 선별하고 처리하는 능력은 높아졌지만 삶에 대해 사색하고 성찰하는 능력은 점점 퇴화되고 있다. 긴 문장을 읽는 인내력도 많이 떨어졌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문제를 생겼을 때 기존에 사용했던 것과 같은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난제는 새로운 언어로 해결될 수 있다. 그래서 복잡한 문제일수록 사유의 깊이가 필요한 법이다. 

넓고 깊은 사유는 독서만이 가능하다. 독서를 통해 얻은 문해력은 높은 창조적 사고력을 갖게 해준다. <책 읽는 뇌>의 저자 매리언 울프 교수는 "많이 읽어야 성공한다"라고 말했다. 책을 읽으면 후두엽, 측두엽, 전두엽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머리를 좋게 만든다. 신경 가소성은 뇌가 환경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스스로 변화해 가는 능력을 말한다. 독서는 뇌의 수많은 부위가 참여하기 때문에 신경 가소성의 발달을 촉진하는 가장 효율적인 행동이다. 독서는 새로운 뉴런들을 생성 및 연결을 증가하고 그 연결을 더욱 강화하여 방대한 기능적 연결망을 형성한다. 독서는 네가 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매리언 울프 “작가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지혜가 시작된다.”라고 말했다. 독서는 뇌 구조의 기능을 변화, 발달시켜 인생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의 문제와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의 언어에 연결되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 밖에 없다. 인생을 먼저 경험한 인생 선배들의 남긴 지혜를 고전이라 부른다. 독서를 하는 이유는 내가 모르는 타인의 사유세계에 접속하기 위해서다. 언어의 수준을 높이고 싶으면 나만의 융합이 필요하다. 독서를 많이 해야 하는 이유는 기존에 생성되어 있는 원소(단어, 개념)들을 최대한 많이 수집하기 위해서이다. 융합을 하기 위해서는 높은 온도가 필요하다. (태양이 핵융합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높은 온도 때문이다) 깊은 사색이 생각의 온도를 올려준다.


우주도 융합의 역사이다. 수소가 융합되어 헬륨으로, 헬륨이 융합되면 탄소가 되듯이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원소는 이런 융합의 과정을 거쳤다. 나의 뇌라는 융합 발전소에 원소들을 넣고 온도를 올려 새로운 언어로 융합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만의 언어가 탄생할 수 있다. 독서는 나만의 변증법적 융합발전소이다. 나의 독서와 함께 사색의 넓이와 깊이가 발전소의 용량이 된다.


고전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융합하면 나만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다. 철학의 역사는 언어의 새로운 융합의 역사이다. 나만의 철학은 나라는 소설의 문체이자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도구가 된다. 평소에는 철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고통에게 포위당하면 철학을 찾게 된다. 고통의 방에 갇혔을 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철학이다. 새로운 해석만이 고통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모든 희망은 무너지고 손 내미는 사람 하나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서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 고통은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나는 앞으로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고통에게 나의 영혼과 이야기를 빼앗기고 마리오네트의 삶을 살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해답은 “나는 내가 말하는 언어이다.”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내가 만든 존재의 집에서 나의 언어가 쌓이고 만들어진 나의 이야기가 바로 나인 것이다. 결국 진정한 자아란 경험을 나의 언어와 생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나의 언어는 가장 나답게 살게 해주는 인생의 나침반이다. 운명은 한자어의 옮길 운(運)과 생명 명(命)으로 이루어져 있다. 운전의 운(運)과 같다. 즉, 운명은 나의 생명을 운전하는 것이다. 나의 언어가 발전하지 못하면 내비게이션이 업데이트하지 않는 것과 같다. 새로운 길을 알 수가 없으며 없어진 길을 고집하며 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다.


단어가 바뀌면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바뀐다. 우연히 보았던 유튜브 동영상을 소개해 보겠다. 어느 따뜻한 봄날, 사람들은 화창한 날씨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한 맹인은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저는 맹인입니다. 도와주세요” (I’m blind. Please help.)라는 문구를 내걸고 사람들의 적선을 구했지만 모두 냉랭할 뿐이었다. 적선은 잘 되지 않았고 따뜻한 봄날에 그 맹인만 소외된 듯했다. 그러던 중 한 여성이 지나가다가 잠깐 멈추어 보더니 맹인의 문구를 다시 써주었다. 그랬더니 지나가는 거의 모든 행인들이 맹인에게 적선을 해주었다. 맹인은 짧은 시간 동안 제법 많은 적선을 받았다.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맹인에게 아까 지나갔던 여성이 다시 돌아왔다. 그 맹인은 여성에게 “도대체 무얼 한 것입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여성은 “같은 걸 썼어요, 단지 단어가 다를 뿐이에요.”라고 말하고 다시 지나간다. 그 여성이 써 준 문구는 “아름다운 날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볼 수가 없네요.” (It’s a beautiful day and I can’t see it)이었다. 바뀐 몇 마디의 단어가 지나가던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잠시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는가?


1963년 8월 28일 미국 노예해방 100주년 기념일에 피부색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25만 명의 사람이 워싱턴 링컨 기념관에 모였다. 이 많은 군중 앞에 젊은 흑인 목사가 역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한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떨쳐 일어나 진정한 의미의 국가 이념을 실천하리라는 꿈,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진리를 우리 모두가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과거에 노예로 살았던 부모의 후손과 그 노예의 주인이 낳은 후손이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형제애를 나누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꿈입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저의 네 자식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꿈입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주지사가 연방 정부의 정책 개입과 연방법 실시를 거부한다는 말만 늘어놓는 앨라배마 주에서도, 흑인 소년, 소녀가 백인 소년, 소녀와 서로 손잡고 형제자매처럼 함께 걸어 다닐 수 있는 상황으로 언젠가 탈바꿈되리라는 꿈입니다. 지금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이 낮아지고, 울퉁불퉁한 땅이 평지로 변하고, 꼬부라진 길이 곧은길로 바뀌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생물이 그 광경을 함께 지켜보리라는 꿈입니다.”


 ‘I have a dream’으로 유명한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이다. 그리고 11개월 후 흑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시민법이 제정되었다. 흑인들은 미국 땅에 노예로 끌려온 지 350여 년 만에 드디어 시민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약 40년 후 흑인 버락 오바마는 미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리며 이런 말을 했다. “마틴 루터 킹은 우리의 양심을 흔들었습니다. 그의 신념과 용기는 지금 이 시대에도 필요합니다.” 울림의 언어는 공명이 되어 사회를 변화시킨다. ‘계급사회’라는 뾰족한 산은 오랜 파동의 침식 작용으로 인해 조금씩 평평해졌다.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언어를 공유하면 모두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우주의 모든 빛 중에 인간은 오로지 가시광선만을 인식할 수 있다. 가시광선은 전제 빛 중에 10조 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의 언어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우주에는 수많은 언어가 존재하지만 인간은 가시광선처럼 극히 일부의 언어만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언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그 창이 넓으면 멋진 존재의 집이 되지만 창이 작으면 감옥이 된다. 존재의 창을 넓혀 새로운 우주의 언어를 발견해 보자. 끝없이 읽고 사유하거라. 그래서 너의 새로이 융합된 언어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우주의 언어와 공명하길 바란다. 혹시 아는가? 그 공명의 언어가 너와 우리 모두를 구원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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