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국현 Apr 08. 2024

메멘토 모리 (상)

정신이 몽롱하다. 몸이 어딘가 몹시 불편한 것 같은데 통증은 없었다. 그저 공중에 붕 뜬 느낌이었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 뭔가 계속 낯선 느낌이다. 눈을 떠보려 해도 쉽사리 떠지지 않는다. 이런 불편한 상황을 확인하고 싶은데 생각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다 간신히 눈을 떠보니 눈에 익은 듯한 하얀 벽이 보인다. 하얀 매트리스 위에 내가 누워 있고 줄무늬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내가 병실 안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내 얼굴에 산소마스크가 써져 있었고 내 가녀린 팔에 링거 주사 바늘이 꽂혀있었다. ‘내 팔이 왜 이리 가늘어졌지?’ ‘ 왜 내가 산소마스크를 쓰고 병실에 누워 있는 거지?’ 힘든 호흡 속에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다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몹시 당황스럽다. 왜 이렇게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몸은 익숙한 기분이 드는 걸 보니 내가 몹쓸 병에 걸려 꽤 오랫동안 병실에 누워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 상황을 누군가에게 물어보려고 주변을 살펴보니 침대 옆에 마눌님과 딸이 울고 있었다. 그 옆에 의사와 간호사들도 같이 서있었다. 의사가 마눌님에게 무엇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내가 곧 운명을 달리할 거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이제 곧 죽다니’ ‘근데 왜 아무런 기억도 안 나는 거지?’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그리고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도 없으니 너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점점 힘이 풀려 눈 한 번 깜박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금 잊힌 기억을 찾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을 더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숨 쉬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 것이 정말로 나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울고 있는 마눌님이 보였다. 난 평생 와이프를 마눌님이라 불렀다. ‘마눌’의 어원이 몽골어로 왕비라는 뜻이라고 어디선가 듣고선 그 이후론 와이프를 마눌님이라 불렀다. 남들은 그냥 보통명사로 부르는 것 같지만 나는 존중의 의미로 그렇게 불렀다. 그녀는 예뻤다. 지금도 예쁘다. 전형적인 조각 같은 미인은 아니지만, 예쁜 반달눈을 가진 단아한 미인상이다. 그 예쁜 반달눈을 보면 구미호에 홀린 기분이 이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와이프가 구미호 같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 예쁜 눈을 볼 때마다 그 눈에서 눈물 나게 하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예전에 농담 삼아 마눌님께 항상 했던 말이 있었다. “당신보다는 단 며칠이라도 더 살게” 사랑하는 사람보다 며칠이라도 더 사는 것이 사랑의 의무라 생각했다. 먼저 남겨진 자의 고통이 크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먼저 떠나다니... 너무나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건지 언제부터 아팠던 건지... 도둑맞은 기억 때문에 너무도 고통스럽다.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 해 준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손가락 인대가 끊어져 없어졌고 오랫동안 불편하고 아프게 살았다. 손가락뿐만 아니라 유리 같은 피지컬의 소유자라 항상 어딘가가 아팠다. 그래서 내가 하루라도 더 살아 보살펴주려 했는데… 음식물 쓰레기도 내가 계속 버려야 하는데... 미안하오 여보...


시간은 멈춘 듯했고 지난날의 모든 순간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살아왔던 모든 장면이 마치 주마등 같이 흘러간다고 들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가?...  마눌님을 처음 만났던 때가 기억이 났다. 혜화동 어떤 호프집에서 무슨 모임이 있었는데... 긴 머리를 휘날리면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마치 포카리스웨트 소녀가 들어온 듯했다. 시간이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은 그때 처음 경험하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휘날렸다. 그녀의 미소는 바로 나의 뇌에 각인되었고, 그녀의 반달 눈동자 위에는 ‘운명’이라고 써져 있는 듯했다. 정말 한글로 써져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민망하게 계속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의 운명은 늘 그랬듯 이번에도 가혹했다. 그녀는 예뻤고 난 솔직히 별 볼일이 없었다. 예쁜 여성과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남자 사이는 지구와 안드로메다 사이 같은 간극이 존재했다. 드라마에서 흔한 소재일 수도 있으나 드라마 남자 주인공은 얼굴이 잘 생겼기 기라도 했지만 나는 그러하지 못했으니 현실은 오히려 시트콤에 가까웠다. 제삼자가 보는 시트콤은 재미있을 수 있겠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혼자서 많이 울기도 했다. 오랜 인고의 시간과 시련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운명에게 허락을 받았다. 그녀와 나는 마침내 가족이 된 것이다. 마눌님을 만나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행복의 여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사랑하는 여보...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오... 차라리 딴 놈 만나서 결혼했으면 더 행복했을까... 아니 그 꼴은 못 보겠소. 마음 굳게 먹고 사시오. 우리 예쁜 딸을 잘 키워 주오...'


울고 있는 마눌님 옆에서 사랑하는 내 딸 이수가 같이 부둥켜 울고 있었다. ‘사랑하는 내 딸... 어여쁜 내 딸... 엄마 닳았으면 더 예뻤을 텐데...’ 누군가 나에게 왜 사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내 딸을 위해 산다.” 이수를 처음 만났을 때도 생생히 기억난다. 엄마 뱃속에서 나와 며칠 후 처음 눈을 떴을 때, 그리고 그 눈을 처음 마주쳤을 때 내 인생은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실타래처럼 꼬여만 갔던 인생, 그녀와의 많은 우여곡절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꼭 필요했던 필연이었음을 내 딸의 눈동자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내 딸의 존재 그 자체가 기쁨이었고 한 걸음의 움직임, 한마디의 말 모두가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 내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메피스토 펠리스에게 영혼을 팔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자식이 부모에게 이런 존재인데 울 엄마는 무슨 이유로 날 낳자마자 버리고 떠났을까?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혹시 만나게 되면 꼭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자라면서 겪었던 슬픔, 상처들을 내 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모든 부모가 마찬가지이겠지만) 하지만 모든 것이 화폐의 교환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교환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물질적으로 많은 걸 해주지 못해도 정신적, 정서적인 결핍은 없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내 딸이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 혼자 해외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딸과 많이 놀아 주지도 못했다. ‘그 누구보다도 많이 놀아주고 싶었는데... 아빠가 많이 못 놀아 줘서 미안하구나...’ 하루하루 조금씩 커가는 키, 점점 어른스러워지는 말투, 커서 무엇이 될까 하는 기대와 걱정, 남자 친구가 생겨서 나와 그 자식이 동시에 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할까?라는 유치한 상상들... 너에 대한 모든 것들을 기대하며 살았는데 이젠 더 할 수가 없구나... 안녕... 이수야...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기를 바란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숨 한 번 쉴 때마다 내게 허락된 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료가 떨어져 이제 주행을 멈춰야 하는 자동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료는 없는데 계속 액셀레이터만 계속 밟아  차는 그저 덜컹거리기만 한다. ‘아! 나는 계속 더 달리고 싶다!!’ 덜컹거리는 온몸을 이기고 마지막으로 말을 꺼내고 싶은데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랑한다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되지 않는다. 혹시 메피스토 펠레스가 있지 않을까 천장을 둘러보았지만 흐릿해져 가는 형광등만이 무심히 날 내려다볼 뿐이었다. 저 형광등에겐 이런 일은 늘 반복되는 일상이겠지...


서서히 눈이 감기고 저항해보려 하지만 시야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모든 배경도 모든 소리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배경은 서서히 흩어져 경계가 흐릿해져 간다. 호흡이 멈춰진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제 눈을 감으면 다시는 뜰 수 없을 거란 강렬한 공포가 들이닥쳤다. 마지막 한 번만 더 마눌님과 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배경은 서서히 흩어져 경계가 흐릿해져 간다.


눈은 감겼고 세상은 어둠이 되었다. 무심한 형광등도 이젠 보이지 않는다. 깜깜한 바다에 빠지면 이런 기분일까? 무서움에 사무쳤고 다시 눈을 떠 수면 위로 오르고 싶었다. 이대로 영원한 심연으로 가라앉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제발 한 번만 더!!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이 다시 떠지려 하고 있었다. 이번에 눈을 뜨면 그녀의 반달눈에 비치는 눈부처를 보고 싶다. 이수를 한 번 더 안아보고 싶었다. 드디어 눈이 떠졌고 나는 반사적으로 가족을 찾았다.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아까 전의 병실은 아니었다. 낯선 듯 아닌 듯, 벽은 같은 흰색이었으나 아까 그 병원의 벽은 아니었다. 매트리스도 하얗지 않았다. 나는 줄무늬 환자복을 입고 있지 않았고 내 팔에도 링거 바늘은 꽂혀 있지 않았다. 눈을 떴다는 기쁨과 동시에 천국도 지옥도 아닌 것 같은 이곳은 또 어디일까 하는 당혹스러움이 계속 교차되고 있었다. 


의식은 다시 또렷해져 이 방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곳은 회사 기숙사 방이었다. (필자는 해외에서 근무하고 있다.) 꿈이었구나, 그래 다행히도 꿈이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꿈이 너무 생생하여 한동안 복받쳐 울었다. 그리고 바로 가족에게 전화를 했다. 평소와 같이 무심한 마눌님이 한없이 고마웠다. 천진난만한 이수를 보니 모든 것이 감사했다.


비록 꿈이었지만 죽음을 경험한 것 같았다. 시야가 흐려지고 배경이 뭉개지면서 경계가 흩어지는 묘한 기분... 실제 죽을 때 느낌이 이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존재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지만 깨닫기는 어렵다. 사람은 죽음을 망각하고 살게 끔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꿈이긴 했지만 죽음의 경험은 남은 삶을 다시 바라보게 했다. 상실은 모든 것이 소중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인간은 상실을 경험하기 전에는 소중함도 잘 깨닫지 못한다. 마치 공기가 없어져야 공기의 소중함을 아는 것처럼. 


(다음 편에 계속...)


이전 05화 존재의 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