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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May 19. 2024

사랑의 반경 (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숫자만큼의 대답이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오늘은 나만의 답변을 해보려 한다. 아빠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시인 위스턴 오든 Wystan H Auden의 시구처럼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남녀 간의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성경 말씀처럼 좀 더 넓은 범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인간에게 사랑이 필요한 진화학적인 이유가 있다. 머나먼 옛날 그 언제부터인가 인간이 직립보행을 시작하면서 여성의 산도가 좁아졌다. 그래서 다른 동물들처럼 뇌가 성숙한 채 태어날 수가 없었다. 뇌가 성숙하면 그만큼 머리가 커져서 좁아진 산도를 빠져나오지 못해 산모와 아기 모두 생명이 위태롭기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뇌가 산도보다 더 커지기 전에 출산을 해야 했고 이로 인해 인간은 연약하게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수백만 년 전 인간은 사자 같은 강력한 포식자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연약한 인간은 더 연약한 인간을 키우기 위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아이를 온전히 키울 수가 없었다. 인간은 생존하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협력을 해야만 했고 그 협력이 오늘날의 사랑의 기원이 되었다.   


수백만 년 전 루시의 사촌이 있었다. 그 루시의 사촌은 만삭이었고 어느 날 무리들과 같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초원을 누비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산통을 느꼈고 초원 한가운데에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피 냄새를 맡고 포식자들이 다가온다. 얼룩말같이 태어나자마자 달릴 수 없는 인간의 아이는 포식자의 먹이가 될 판이다. 그때 무리의 동료들이 그 아이의 주위를 둘러싸고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함께 모여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소리를 지른다. 포식자는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사람의 무리가 자신보다 더 큰 짐승이라고 생각하고 사냥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 이렇게 무리를 이루어 같은 동작을 하는 것이 춤의 기원이 되었다는 가설도 있다. 원시 시대에는 생존하고자 무리를 이루었고 그 무리의 생존과 안녕을 위해 서로 배려하고 희생하는 행위들이 발전하여 현대의 사랑이 되었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두려운 이유는 인류에게 집단생활의 본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뼛속까지 새겨진 사랑이라는 힘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사랑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에너지이다. 사람들의 겪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알고 보면 사랑의 고장이다. 회사에 가기 싫거나 집에 가기 싫을 때는 그곳에 사랑이 결핍되었다는 증거이다.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는 결국 사랑의 문제다. 모든 정신 장애와 사회 부조리의 근본 원인도 결국은 사랑의 고장이다. 노래 가사처럼 사랑 그놈이 항상 문제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종류가 아니다. 사랑이 무너지면 인생의 에너지는 바닥나고 인생은 멈추게 된다. 사랑은 때로 멈출 수는 있지만 그 기간이 길어지면 몸과 마음의 병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하지만 사랑은 어렵다. 외로워서 관계를 갈구하는 이기적 사랑이 많다. 서로 이기적으로 이용하면서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기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도구로 간주하고 상대의 존엄을 짓밟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을 불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타인의 모습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상한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는 상대의 모습은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상대에게 왜 자기의 상상한 이미지대로 행동하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따지고 비난한다.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이런 이기적 욕망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실존을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환상에 비친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아빠가 생각하는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 자체로 인정해 주고 이해하고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고 이해해 주며 아끼고 배려해 주는 것이다. 상대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같은 편이 되어준다는 뜻이다. 이를 ‘공감’이라 부른다. 공감은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그 결실이 사랑이다. 이해하고 곁을 지켜주는 것이 사랑이다. 주변 사람에게 공감을 받지 못한다면 비가 오지 않아 모든 것이 말라버리는 사막 같은 신세가 된다. “네가 옳아”, “그런 만한 이유가 있겠지”, “너를 믿어” 이런 공감의 말들은 황량한 사막을 살리는 단비 같은 역할을 한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인생은 고해이다. 이런 내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자체가 이 고통의 바다에서 지치지 않고 헤엄쳐 나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사랑은 배우지 못한 우리들은 미디어를 통해 왜곡된 사랑을 접하게 된다. 우선 사랑을 하려면 잘 생기고 예뼈야만 할 것 같다. 화려한 데이트, 비싼 선물과 프로포즈, 비싼 자동차와 화려한 집 등이 필수로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에 비해 나의 현실은 너무 초라하다. 이런 미디어의 영향이 사랑은 곧 돈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사랑에 대한 이런 무지는 오히려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미디어가 생산하는 사랑의 형태에 근접하지 못하면 능력이 없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모든 결과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사랑의 실패도 곧 개인의 실패인 것이다.


자본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소비의 감소이다. 공장에서 상품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는데 이를 구매할 소비자가 없으면 대공황이 발생한다. 소비만이 삶의 미학인 자본주의는 사랑을 소비하고 교환이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었다. 사랑이 필요하면 능력으로 쟁취하라고 부추긴다. 미디어는 사랑의 환상을 유포하고 오직 사랑만이 현실의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세뇌한다. 사랑을 현실 도피 수단으로 이용하고 신자유주의의 치부를 덮어버리는 포장지로 활용하고 있다. 욕망의 사회는 사랑을 변질시켰다. 물이 오염되면 전염병이 돌듯이 사랑이 오염되어 모든 사람이 병들고 있다.


미디어의 등불을 따라가는 오징어의 신세가 되면 나의 주체성은 남의 소유가 된다. 내가 나를 보지 못하고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만을 신경 쓰며 이것이 불안의 원인이 된다. 남들보다 돈을 못 벌면 불안하고 가난한 사랑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불안이 생기고 그 불안을 감추기 위해 명품을 두른다. 사치는 상처 위에서 잘 자라는 법이다. 상처를 감추기 위해 돈으로써 과시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에 임금을 받는다. 노동력만을 분리하여 제공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니 노동력의 상품화가 곧 인간의 상품화로 귀결되었다. 인간의 상품화는 인간관계를 상품 간의 교환 관계로 변질시켰다. 오늘날 타인은 같이 살아가는 이웃이 아니라 교환의 대상이자 이기적 욕망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다. 사랑도 받은 만큼 주는 등가교환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돈이 되었다. 인간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있다고 인정하면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되게 마련이다. 돈이 목적이며 인간은 수단이 되었다. 돈이 세상의 주인이며 인간은 주인의 사랑을 갈구하는 노예가 되었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피지배계급은 언제나 서로를 돕고 살았다. 피지배계층의 연대와 협동은 지배계층의 억압으로부터 지켜주는 보루 역할을 해왔다. 소작농들이 지주의 착취를 당해도 그들은 서로 돕고 살았다. 이웃이 굶으면 먹을 것을 나누었고, 누군가 큰일이 있으면 서로 품앗이를 했다. 그러다 자본가 계급이 봉건 지주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 등장하면서 이런 미덕들은 사라졌다. 자본가들은 적은 의자들을 나눠주고 능력 있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서로 돕고 살던 이웃들은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행복이 되다 보니 이웃이 굶주리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외면하는 것이 능사가 되었다.


기원전 6세기 샤카족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스물아홉 되던 때 궁 밖을 나가 처음으로 인간의 생로병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개인적인 사건을 겪은 후 싯다르타는 인간의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고 오랜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다. 그의 주된 사상은 사후 불교로 발전하였고 그 핵심 사상이 바로 ‘자비’이다. 자비는 상대방의 불행이나 고통에 아픔을 느끼는 감정이다.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든 완화시키려 하는 것이 ‘자비’의 본질이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그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의지가 사랑이자 자비이다. 행복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내 것이 늘어날 때 느끼는 행복이 있고, 내 것을 덜어낼 때 느끼는 행복이 있다. 내 것을 덜어낼 때 느끼는 행복을 사랑이며 말하며, 대표적인 예로는 어머니가 자신의 배고픔을 참으면서 자식에게 자신의 밥을 주는 행동이 있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사자가 얼룩말 한 마리를 사냥에 성공하면 사자 가족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얼룩말 사체를 그 자리에 놓고 떠난다. 그러면 하이에나가 먹다 남은 얼룩말을 뜯어먹고, 그 남은 것을 독수리가 쪼아 먹고, 그 남은 것들은 보다 작은 짐승들이 발라 먹고, 그리고 마저 남은 것은 식물의 영양분이 되거나 미생물이 해결한다. 그런 식으로 (나름) 최소한의 폭력으로 세렝게티 평원의 생태계는 유지된다. 그런데 만약 사자가 먹고 남은 얼룩말을 냉장고 같은 곳에 보관한다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사자들이 인간처럼 욕심이 많아 경쟁적으로 얼룩말, 들소, 영양 등을 사냥하고 냉장고에 보관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아마 세렝게티 초원은 지옥으로 바뀔 것이고 우리는 그 사자들을 ‘미친 사자’라고 부를 것이다. 지금의 인간 세상은 어떠한가?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미친 사자와 다를 게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핵심이 소유라면 불교의 핵심은 무소유다. 무소유의 정의는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비의 핵심이다. 불교에서 열반에 이르기 위해 실천하는 여섯 가지 수행 덕목을 ‘육바라밀’이라고 한다. 그중 하나가 ‘보시’이다.  보시란 널리 베푼다는 뜻의 말로써,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이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을 뜻한다. 현재로서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없다. 자본주의를 유지하면서 사회적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보시’이다.


자본주의에 맞는 보시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내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할 필요는 없다. 초원의 사자처럼 배부르게 먹고 남는 것을 이웃에게 나눠주면 된다. 이것이 진정한 낙수효과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먹고 남는 것을 냉장고에 넣어 둔다. (해가 바뀔수록 냉장고의 크기가 커지고 있다.) 초기 원시 시대에는 인간도 상위 포식자들이 먹다 남은 것을 먹으며 생존을 이어갔다. 그 당시에 현재의 인간과 같은 탐욕스러운 포식자가 있었다면 아마 인간의 역사는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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