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다에 비유하곤 한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도와, 밀려오고 물러나는 밀물과 썰물을 보면 우리의 인생이 바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산한 우리네 삶은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바다와 비슷하다. 인생은 파도처럼 나를 흔든다. 역경이 내 삶을 흔들어도 그 또한 인생이다. 파도는 이 또한 지나갈 것이며 잔잔한 파도에 내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도 인생인 것이다.
멀리서 보는 푸른 바다와 붉은 노을이 어우러지는 바다의 모습은 모네의 풍경화처럼 무척 아름답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거친 파도와 인간이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을 품은 바다는 공포스럽기도 하다. 바다는 모든 걸 받아줄 것 같지만 또한 비밀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바다도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바다에도 인생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가 흐른다.
인생이라는 항해를 떠나기 전에 바다를 알아야 한다. 내 인생의 선장이 되기 위해 자기 계발서를 많이 참고한다. 끌어당김의 법칙, 숨은 잠재력을 발휘하는 법, 부자가 되는 방법, 성공을 위해 몰입하는 방법 등등 수많은 책과 영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런 유익한 방법을 참고하여 노력한다면 폭풍의 바다를 뚫고 인생이라는 항해를 잘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사랑하는 딸에게 아빠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기 계발 한 가지를 알려 주려고 한다. 태풍이 불어오는 바다를 건너기 전에 태풍을 잠재우는 방법이다. (나도 지금까지 실천하지 못하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자기 계발은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아빠는 사랑하는 내 딸이 항상 행복하길 바란다.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비교는 절대 금물이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비교이기 때문이다. 비교는 고통의 파도를 만든다. 우주의 기운을 끌어당기고 숨은 잠재력을 발휘하여 부자가 되어도 누군가와 비교하기 시작한다면 인생의 파도는 성내고 높아지며 행복의 섬에 도착하기 전에 침몰하게 마련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비교당한다.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는지, 어느 병원에서 태어나고 어느 산후조리원을 가는지, 영어 유치원은 다니는지, 어떤 학교와 학원을 다니는지, 어떤 브랜드의 신발과 옷을 입는지, 어느 동네에서 살며 어떤 차를 타는지, 어떤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나중에 대기업에 취직했는지 중소기업에 취업했는지, 어떤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지, 결혼식은 어디에서 하는지, 내 장례식에 조문객은 얼마나 오는지 등등 어찌 보면 인생은 죽는 순간까지 끝없는 비교의 연속이다.
이렇게 인간은 항상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고통을 자초한다. 작은 것이라도 내 이름표를 붙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된다. 타인을 잠재적 경쟁자로 간주하고 경계하게 된다. 돈이든 권력이든 인간은 무엇인가를 소유하게 되면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얽매이게 된다. 소유의 대상으로부터 우리는 소유를 당하게 된다. 각자의 행위는 다르지만 목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욕망은 인간을 움직이게 한다.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돈을 벌고 명품을 산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해서 명품을 산다고 해서 우리의 욕망은 채워질 수 있으며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돈이 한 푼도 없을 때는 천만 원만 있어도 좋겠다고 소망한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해서 천만 원을 모으면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1억 원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나의 소망은 다시 1억으로 커진다. 1억을 모으면 다시 10억을 가진 사람이 보이게 되고, 이런 식으로 나의 욕망은 달성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해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쾌락주의라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오히려 쾌락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도한 쾌락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빵과 물만 있다면 신도 부럽지 않다.” 최소한의 쾌락으로 최대한의 행복을 얻는 방법이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은 절대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쾌락은 추구할수록 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옷만 입으면 저 차만 타면 저 이성을 애인으로 만들 수 있다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저 옷을 입으면 다른 더 좋은 옷들이 보이고, 저 차만 타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옆 집 차가 더 비싸다는 걸 알게 되고, 저 이성만 애인으로 만들면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쁠 것 같았으나 친구의 새 애인이 더 예뻐 보이는 건 정말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옷을 입고, 또 다른 차를 사기 위해 더 일을 하며 또 다른 이성을 욕망한다.
욕망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인간은 모두 부족한 존재여서 나도 모르게 타인의 지지와 인정을 원한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를 인정해 달라고 아우성친다. 인간은 자신을 알기 위해 타인이라는 거울이 필요하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이 달라진다. 타인이 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나는 긍정적 존재가 되고, 타인이 나를 멸시하면 나는 하찮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멸시받지 않기 위해 끝없는 인정 투쟁을 벌인다.
자본주의 사회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인정 욕구는 소유의 욕구로 변질되었다. 명품을 소유하면 내가 인정받는 존재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정 욕구는 명품에 대한 소유욕으로 왜곡되었다. 나의 정체성이 나인지 명품인지 헷갈리게 된다. 자본가들은 이 점을 놓치지 않고 대중들에게 더 많은 소비가 더 고귀한 정체성이라며 소비를 부추긴다.
자전거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있다. 페달을 멈추는 순간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생산과 소비를 멈출 수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말한다. 자본주의는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라는 거대한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가는 자전거인 셈이다. 자본주의는 공장의 탄생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량 생산으로 인해 대부분의 수요는 이미 충족이 되었지만 생산을 멈출 수 없는 공장들은 수요와 상관없이 생산을 계속하게 된다. 필요하지 않은 상품을 계속 생산하면서 결과적으로 소비도 끊임없이 부추길 수밖에 없다. 마케팅의 정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유혹하는 기술이다. 그래서 이유도 모르면서 상품을 사게 된다. 결국 소비자들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소비해 잉여생산물을 떠맡으면서 자본주의라는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게 하는 동력의 역할을 한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인간 건전지처럼 말이다.
상품이 잘 팔리지 않자 자본가들은 이미지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다. 광고는 더 이상 상품의 기능을 설명하지 않는다. 저 상품을 사면 저 상품을 광고하는 연예인처럼 될 것 같은 이미지를 강조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 엄청난 가격을 매긴다. 부자는 자신이 부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그 이미지를 소비하고 빈자들은 자신의 결핍을 숨기기 위해 아등바등 그 이미지를 구매한다. 이 같은 이미지 소유 경쟁이 자본주의에게 에너지를 공급한다. 17세기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사유의 성찰을 남겼다. 이제는 TV가 새로운 복음을 전파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질문에 내가 타는 자동차로 대답하는 세상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소비로 표현한다. 이미지는 새로운 정체성을 넘어 실제 같은 실체를 생산한다. 보드리야르는 이를 ‘하이퍼 리얼리티’라고 말했다.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할까 봐 불안을 느끼고 이 불안은 다시 소비를 자극한다. 불안한 공작새가 더 화려한 법이다. 하지만 쇼핑으로 인한 행복은 순간이다. 순간의 행복을 다시 찾기 위해 소비를 반복한다. 하지만 과소비는 과행복을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욕망의 쓰나미에 압박당하며 끊임없이 소유의 크기로 비교당한다. 인간의 나약함과 마케팅이 만나 자본주의라는 자전거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인간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인간은 결핍을 느낀다. 욕망은 일시적으로 채워질 수 있지만 그 순간 다시 권태라는 고통에 빠진다. 권태는 다시 또 다른 욕망을 부르지만 또다시 권태로 환원된다. 이처럼 인간은 욕망이 채워지면 권태로 고통스럽고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결핍으로 고통받는 존재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고 말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우리를 지배하는 자연의 맹목적 의지, 즉 생존과 번성에 대한 욕망이다. 욕망과 권태는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져 고통을 멈출 수가 없다. 이성은 욕망의 하녀가 되어 복종할 뿐이다. 욕망과 권태의 괴리는 파동을 만들어 인생이라는 바다를 요동치게 한다.
욕망의 철학자라 불리는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했다. 나의 욕망이라는 것이 사실 알고 보면 타인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욕망이 내면화되는 원인을 진화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백만 년 전 인류는 직립 보행을 시작하면서 삶의 영역을 넓혀 갔지만 그 반대급부로 골반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골반이 작아지면서 아기가 나오는 여성의 산도도 좁아졌다. 뇌가 성숙한 상태로 좁아진 산도로 나오게 되면 산모와 아기 모두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이를 산과적 딜레마라 한다. 그래서 인간은 뇌가 더 성장하기 전에 엄마 뱃속에서 나와야 했다.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뇌가 미숙한 상태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태어난 지 오래지 않아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살아간다. 하지만 미숙하게 태어난 인간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부모의 극심한 보살핌을 받아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있어야만 유아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타인의 관심과 애정이 생존의 필수 요소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타인에게 의존하는 성향을 갖게 된다. 아이는 부모가 원하는 행동을 할 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아이는 본능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부모의 애정을 받기 위해 부모가 원하는 것을 하게 된다. 그렇게 자연스레 부모의 욕망이 아이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자신을 돌봐주는 부모의 욕망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모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아이는 커가면서 그 대상을 또래집단, 교사, 직장 상사 등으로 대상을 바꿔가면서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 인간이 문명의 세계에 진입하려면 사회적으로 길들여져야 한다. 본성을 억압하고 기존의 가치관을 수용하는 것이 필수이며 이는 타자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내 생각은 스스로 정립했다고 믿지만 대부분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들이다. 미디어를 보고 의식이 구축되었지만 자신 스스로의 의지로 인해 정립되었다고 착각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본성적으로 무리 안에서 위로를 구한다. 타인과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자신만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말했다.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해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나의 생각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자의 요구일 수밖에 없다. 나의 의식을 구축한 주체는 내가 아니라 기존의 권력이다. 사회적 약자들은 강자들의 주장과 논리를 수용하고 나의 생각을 그들에게 저당 잡힌다. 생각을 저당 잡힌 약자들은 강자들에게 순응하고 그들을 선망하고 지지하게 된다. 강자들의 의도대로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피해와 고통을 같은 약자들의 탓으로 돌린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은 함께 연대하지 못하고 각자도생, 각자소비의 덫에 걸리게 되었다.
타인과의 경쟁에 익숙해진 우리는 자기 성숙은 사라지고 오로지 타인과의 비교만 남았다. 존재의 관계가 병들어 간다. 성찰을 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기 성숙을 하지 못하고 남과 소유를 비교하여 우월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기 성찰을 상실한 인간은 스스로의 우월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가 속한 집단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 차이를 근거로 나보다 열등한 이웃들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논어 자로 편에 “자왈 군자 화이부동, 소인 동이불화(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화(和)하되 동(同) 하지 않지만, 소인은 동(同)하되 화(和) 하지 않는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의 화합을 추구하며 획일적인 같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인은 획일적으로 자기와 같은 것만을 요구하며 서로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소인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지 않다고 차별한다. 이런 이중성은 남들보다 자기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려는 노예근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노예는 사유가 부족하기에 소유한 물건으로 남보다 우월하려고 애쓴다.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면서 내 안에 박혀있는 타인의 의식을 제거해야 한다. 나의 생각을 재정립하지 못하면 진정한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나의 생각은 정말 나의 것인가? 이 생각들은 어떻게 나의 생각이 되었나?’ 이런 성찰만이 물질만능주의, 숏폼같이 자극적인 파도가 휘몰아치는 인생의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모든 성찰의 출발은 지금의 내 생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쇼펜하우어와 라캉처럼 욕망을 탐구하며 성찰했던 현자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너의 욕망은 진정한 너의 욕망인가?” 내면화된 타자의 욕망을 따라 하는 삶은 진정한 내 삶이 아니다. 소유욕 같은 가짜 욕망을 걷어내고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으로 채워야 한다. 사람은 목적이 되어야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이용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안 때문에 서로 이용하고 조정하는 추악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은 안개처럼 희미해지고 물신으로부터 소유라는 자비만을 구할 뿐이다. 사람은 아직도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돈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버린 지금이나 신이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세 시대와 나는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라캉은 ‘욕망은 인간의 언어로 인해 겪게 되는 소외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언어는 해상도가 낮아 자신의 욕구를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만큼의 괴리가 생긴다. 소외된 언어로부터 발생되는 고통과 갈망들이 욕망이라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의 세계를 가능하게 해 주면서도 존재의 결핍을 만든다. 언어의 결여는 존재의 결핍으로 이어진다. 언어적 존재인 인간은 구조적으로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 언어의 부재는 내 존재의 부실로 이어진다. 내가 살아온 날이 그렇다. 나는 평생 비교당하며 살아왔다. 나만의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만의 생각이 없었으니 당연하게도 나만의 언어가 있을 리가 없었다. 타인이 설계한 욕망의 덫에 걸려 평생 고통에 시달렸다. 가난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 자존감은 한없이 낮았으며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는 걸인으로 살았다. 나의 언어를 찾기 위해 우선 타인으로부터 채워진 욕망을 제거해야 했다.
욕망은 모순적이다. 욕망은 프로메테우스가 전달한 불과도 같다. 불을 잘 사용하면 문명을 건설할 수도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모든 것을 불태울 수도 있다. 욕망이라는 불덩어리는 나를 파괴할 수도 있지만 인생을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욕망이라는 불을 잘 사용하여 비추어 보면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
나는 왜 사는가? 에 대한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나의 욕망을 찾아야 한다.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하고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를 고민해야 한다. 우선 타인에게 주입된 욕망을 걷어내 보자. 명품의 소유가 나의 욕망인가? 타인의 인정이 나의 욕망인가? 하나씩 버리다 보면 최후에 남은 욕망이 진정한 나의 욕망이라 할 수 있다. 나만의 욕망이 나라는 이야기의 소재이자 주제인 것이다.
한 번뿐인 내 인생, 명품을 소유하려는 과정이 나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발버둥 치는 서글픈 이야기를 만들 수는 없다. 욕망의 다이어트가 필요한 순간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진정한 나의 욕망인가? 아니다. 회사 사장이나 상사에게 인정받는 것이 나의 욕망인가? 아니다. 멋진 외제차가 나의 욕망인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제거하다 보니 두 가지가 남았다. 가족과 독서이다. 이미 사전에 있는 단어지만 이제는 나와 공명이 되어 내 인생 최고의 단어가 되었다. 책을 읽고 느낀 점을 나의 언어로 융합하여 나의 가족에게 남기는 것이 나의 최후의 욕망이며 내가 오늘도 이어가고 있는 나의 이야기이다. 내게 남은 마지막 욕망은 사랑하는 나의 딸의 인생이 주체적이고 행복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읽고 쓰는 이유이다.
니체는 말했다.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해석의 문제라고. 내가 고통스럽다면 고통이라는 해석된 언어 밖에 없는 것이다. 나를 치료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한 순간이다. 철학은 자신의 언어를 만드는 일이다. 현자들이 남긴 언어와 나의 생각을 융합하여 새로운 나만의 언어로 제련하는 것이다. 그 언어를 창조해 낸다면 내 인생의 등불이 되어 나를 구원으로 안내할 수 있다. 언어 안에서 존재하는 인간은 자신의 언어로써 존재의 집을 지을 수 있다. 튼튼한 존재의 집 안에서 인생의 폭풍을 견딜 수 있다. 생각하는 존재인 호모 사피엔스가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이 변하면 존재의 집이 달라지며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의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다. 생각을 채우지 못한 호모 사피엔스는 그 빈자리를 욕망의 사신에게 빼앗기고 평생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무리 안에서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비교는 숙명이다. 늘 타인과 비교하고 인정투쟁을 벌인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우월해지기 위해 무언가를 추구한다. 그래서 늘 마음속에 질투심과 적대감이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간관계를 맺다 보니 타인과 진정으로 교감하지 않지만 동시에 타인에게 의존한다. 우월감을 쟁취하지 못하면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 사실 모든 열등감의 원인은 애정결핍이다. 열등감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타인에게 내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원인이다.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불안이다. 진정한 인간관계란 내 외모가 어떻든 내 능력이 어떻든 간에 그대로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나 자체로 충분한 존재의 의미를 인정받는 것이다. 진정으로 누군가와 교감할 수 있다면 인생은 달라진다.
진정한 비교는 나와 나를 비교하는 것이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얼마나 성찰하고 성숙했는지 비교하는 것이다. 별은 다른 별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행성들이 별을 부러워하며 그 주변을 맴돌 뿐이다.
타인에게 욕망하는 건 결국은 사랑이다. 그래서 철학은 사랑의 언어를 가르쳐야 한다. 철학은 사랑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필로소피아는 Philosphia는 지혜 sophia를 사랑 philos 하는 것이다. 모든 철학자의 주장은 자신이 무엇을 사랑했는지에 대한 주장이다. 결국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은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치유의 과정을 통해 삶의 무늬를 남긴다.
시간이 지나 네가 어른이 되면 욕망이라는 바다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욕망의 바다를 건너면서 명품만을 건지려 애쓰지 않길 바란다. 갈증이 날 때 바닷물을 마시면 일시적으로 목마름은 해결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심한 갈증으로 결국 죽게 된다. 이를 불교에서는 ‘갈애(渴愛)’라 말한다. 소유는 일시적인 해갈일 뿐이다. 네가 부자가 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명품을 갖고 싶으면 사라. 대신 그 명품이 나오기까지 누군가의 고통이 필요하다면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배가 부르면 그만 숟가락을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남은 음식을 애써 냉장고에 보관하지 말고 이웃과 함께 나눠 먹으면 그게 바로 파티이자 축제가 된다.
욕망이라는 안경으로 보면 바다가 고통으로 보이겠지만 안경을 벗고 순수한 눈으로 바라본다면 바다는 모네의 풍경화같이 아름다운 곳이다. 밤하늘의 별이 아름다운 이유는 소유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지려 하지 않고 있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싯타르타가 말하는 해탈이지 않을까?
니체는 말했다. “지금 백 개의 각운을 지니지 못한 자는 내기를 걸고 단언컨대 죽음을 맞으리라.” 자기의 언어가 없으면 죽음과 같은 삶이라는 뜻이다. 니체는 또다시 말했다. “초인은 바다 같은 인간이다.” 내 맘대로 해석하자면 초인은 인생의 바다에서 백 개의 언어를 건진 인간이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낚싯바늘 같이 생긴 물음표를 던지면서 너의 바다에서 너만의 언어를 건지기를 바란다. 네가 건진 언어로 너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인생이다. 네가 건진 백 개의 언어가 너와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