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우리 둘이 먹을 거야. 음식은 부족하지 않게 먹어야지, 안 그래?” 박일호하사가 따듯하게 말했다.
“와, 너무 맛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치킨 냄새는 내 모든 감각을 자극했다.
나는 라면에 삼각김밥을 말아두고, 닭다리를 뜯으며 식사에 집중했다. 그런데 박일호 하사가 치킨 두 조각만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박일호 반장님, 혹시 속이 안 좋으십니까? 왜 안 드시는지 궁금합니다.” 음식까지 사주셨는데 혼자 먹는 게 미안했다.
“영화야, 반장은 배부르다. 네가 다 먹어.” 박일호 하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반장님, 제가 식성이 좋긴 하지만 이건 다 못 먹습니다. 괜찮으시면 다른 간부님들 불러서 나눠 먹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야, 선배가 사줬는데 다 못 먹어?” 박일호 하사가 정색했다.
“...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서 되물었다.
“먹다가 배부르면 토하고 또 먹던지 해서 다 쳐 먹으라고, 이 새끼야. 건방지게 선배한테 되묻고 지X이야.”
박일호 하사는 착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난 치킨 1마리와 라면 2개, 삼각김밥 5개를 먹었고, 목구멍까지 음식이 차올랐다.
“저… 죄송하지만 화장실 한 번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빨리 다녀와. 너 때문에 내가 업무를 못 보잖아.”
화장실에 가서 변기통을 잡고, 병사들이 듣지 못하게 소리 없는 구토를 했다. 그리고 왜 이래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내가… 시X, 가축새끼인가. 개X끼.' 속으로 수없이 많은 욕을 하던 그때, 핸드폰 화면이 빛났다.
“영화야, 지금 밤인데...? 잠깐 연락할 시간도 없었어?”
여자친구의 메시지를 읽자마자, 박일호 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화야, 음식 식는다.”
우여곡절 끝에 남은 음식을 다 먹고, 새벽 1시까지 박일호 하사와 당직을 섰다.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어. 자고 있겠지? 오늘도 고생했어, 잘 자.' 연락을 남겼다.
다음날 아침 05시.
“필승! 박일호 반장님, 아침 점호 준비하셔야 합니다.” 조심스럽게 깨웠다.
“내 완장이랑 단독무장 가져와.”
'다리가 없나, 개XX.' 속으로 생각했다.
“너 무슨 생각하냐?” 박일호 하사가 째려봤다.
“아침 메뉴 생각했습니다! 이미 가져다 놨습니다!”
“이 새끼 기합이네. 오늘 아침 뭐냐?”
“군대리아입니다!”
선봉대대의 토요일 아침에는 간간히 군대리아가 나왔다.
“아, 배부르네. 반장 좀 잘 테니까 초과근무 찍어놔.”
“초과근무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너 맞선임 누구냐? 피곤해 죽겠는데 뭘 자꾸 물어보는 거야?” 박일호 하사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나는 당직교대자에게 초과근무 찍는 법을 배우고 박일호 하사의 초과근무를 신청했다.
“소대원 면담, 소대원 애로 및 건의사항 확인… 또 뭘 적어야 하지…” 컴퓨터 앞에 앉아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야, 하기 싫어?”
박일호 하사가 두꺼운 펜을 들고 내 손가락에 주리를 틀었다.
“아… 아픕니다…”
“장난이야 장난. 설문지에 꼰지를 건 아니지?”
“그렇습니다!” 얼굴이 굳은 채 대답했다.
“표정보소 한 대 치겠다? 대가리 박아.”
훈련소에서도 대가리는 안 박았는데, 박일호 하사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김포에서도 후배 폭행으로 백령도로 팔려온 인원이다.
“박일호 반장님, 똑바로 하겠습니다.”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말했다.
“일어나. 뭣 같으면 꼰질러. 하사들 다 집합시킨다.” 박일호 하사는 중대 내 하사킹이었다.
아침부터 기분 좋지 않은 일들을 겪고 핸드폰을 켰다.
'영화야 잘 잤어? 오늘 주말이라 쉬겠네.' 여자친구의 연락이었다.
'그렇지... 주말이라 편하게 쉴 것 같아. 넌 오늘 뭐 해?'
여자친구에게 답장을 보내자마자 오늘 당직교대자인 2 소대장이 와서 말을 걸었다.
“영화야, 따라 나와.”
2 소대장은 나를 데리고 흡연장으로 갔다.
“막내 때 고생 좀 하겠지만, 결국 이겨내야 해. 선배들도 다 그런 과정을 겪어 올라온 거니까.... 네가 힘들 때 도와줄 수 있는 건 결국 너 자신이야. 네가 강해져야 해.”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물었다.
“체력이면 체력, 공부면 공부, 병력 통제면 병력 통제... 모든 것들을 잘해야지. 해병 하사는 팔망미인이 되어야 인정받아. 지금부터 영내 하사 3개월 동안 죽어라 공부하고 운동해. 그래야 네가 살아남아.”
2 소대장이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저 81mm 소대로 간다고 하던데, 공부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 그래. 언제든 물어봐. 나도 좋은 선배는 아니지만, 나쁜 선배이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고참이 되면 부조리들을 전부 없애고 싶어. 견디고 강해져, 그게 그 사람들을 이기는 길이야.”
2 소대장은 이제 막 중사가 되어 행정관이랑 상사, 그리고 하사들에게 간섭하기엔 위치가 애매했다. 그러나 그 말 한마디가 나에겐 큰 자극이 되었다.
간부사무실로 들어가 교범을 펼쳤고, 이 책을 통째로 외우리라 다짐했다.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고 내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3개월의 기간 동안 선배들의 구타와 악습은 이어졌지만 이 악물고 버텼다.
'하나도 힘들지 않아. 난 더 큰 그림을 볼 거야. 언젠가 넘어선다.' 매일같이 되뇌었다.
그러나 81mm라는 주특기는 알면 알수록 어려웠고, 실전 경험이 많은 선배가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들은 아직 나를 못 믿는단 이유로 소대원들과 제대로 인사할 시간도 주지 않았고, 잔 신부름이나 병력 인솔을 시키며 제대로 된 교육을 해주지 않았다. 병사들도 내가 보여준 것이 없으니 나를 무시했고 경례를 하지 않았다.
그런 생황을 이어가던 중 대대급 무장 체력 평가가 시작됐다. 여기서 내가 1등을 하며 병사들과 간부들에게 내가 누군지 각인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전영화 하사, 운동 좀 하다 왔어? 덕분에 내 체면이 살았네.” 중대장이 말했다.
“야, 너 좀 한다? 담배나 한 대 피자.” 박성준 하사가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야 경준아, 쟤 81mm 숙달 좀 시켜라.” 1 소대장이 날 인정해 줬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점호 시간에 나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병장부터 이등병까지 모든 병력이 날 주목했고, 난 이 상황을 휘어잡아 내가 간부로서 너희들 앞에 섰다는 위엄을 보이고 싶었다.
“주목!”
“주목..” 병사들의 목소리는 흐지부지했다.
“목소리 크게 해라. 주목!!” 내가 점호를 하는 다목적실에서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주목!!!” 병사들은 내 목소리에 놀라 흠칫하며 목소리를 크게 했다.
“반갑다. 전영화 하사다. 난 대학교 시절 경호학과를 전공했고 격투기 선수로서 생활하다 왔다.” 내가 날카롭게 쳐다보며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오...” 병사들이 수군수군 대기 시작했다.
난 화기중대에 있으면서 내가 다짐한 각오와 나를 다신 무시하지 못하도록 카리스마 있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내가 아직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모르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서슴지 않고 물어보겠다며 많이 가르쳐달라고 했다.
7개월 동안 81mm 박격포를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하고 9월에 치른 공용화기 평가에서 포반장 부문 최우수 수상을 했다.
공용화기 평가는 1년에 1번 평가를 보는 것으로 여단에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가장 큰 대회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같이 공부하며 교범을 통째로 외워버렸고, 과업 시간 이외에도 박격포를 꺼내 숙달했다. 내 피와 땀이 살이 된 순간이고 난 드디어 모두에게 인정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