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가 지나고 임관종합평가가 실시됐다. 부사관교육대에는 긴장감이 맴돌았고, 결실을 맺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월요일 아침, 체력 평가와 사격이 실시되었다. 화요일에는 화생방과 구급법 평가를 마친 후, 제식 평가에 들어갔다. 모든 동기들이 단결된 모습으로 서로를 격려했고, 수요일에는 분대 전투와 정훈 평가가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독도법 평가까지 보며 임관종합평가는 마무리됐다.
결과 발표일, “모두 합격!” 그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고 긴장이 풀렸다.
“하...후련하다!” 내가 말했다.
“영화야, 고생 많았다. 그리고 우리 생활반, 형 잘 따라와줘서 고맙고, 휴가 끝나고 보자.” 자범이가 말했다.
“우리 다 보병이지? 후반기 교육까지 같이 받겠네!” 재혁이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난 보급인데…” 소심한 규호가 투덜거렸다.
이제는 임관식만 준비하면 된다. 11주차가 되니 다들 새까매지고 말라졌다. 우리는 비슷비슷한 체형에 까맣게 탄 피부였지만, 부모님 눈에는 가장 빛날 것이니, 더욱 빛나기 위해 모자챙과 구두에 광을 냈다.
“야, 애들아, 로션으로 유분기가 사라질 때까지 닦으면 광나니까 이렇게 해봐.” 상호가 말했다.
우리는 로션을 이용해서 광을 내기 시작했고, 임관식 날을 기다리며 설렘 가득한 하루를 보냈다.
드디어 임관식 날, 열렙노트 마지막 날짜에 X자 표시를 했다. 우리는 제복과 빛나는 구두를 신고 서 있었고, 멀리서 걸어오는 부모님이 보였다. 내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들… 많이 야위었네…”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났다.
“엄마, 나 계급장 달아줘야 움직일 수 있어.” 사실 다리에 감각이 없어서 발을 때고 싶었다.
부모님이 내 오른손에 있는 계급장을 잡고 왼쪽 견장에 달아주실 때, 모든 피로가 사라지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계급장이 달리자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졌고, 다리가 저리면서도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고생했어. 못난 아들 기다리느라.” 내가 말했다.
“우리 아들이 최고로 멋있다. 집 가서 맛있는 거 먹자.” 어머니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나 군대에 있으니까 그게 먹고 싶더라. 아빠가 끓여준 김치찌개.” 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녀석… 참… 가자!” 아빠가 부끄러워하시며 고개를 돌렸다.
부모님과의 재회는 마치 오랜 기다림이 끝에 마주한 단비 같았다. 부모님의 미소 속에는 모든 걱정과 고생이 담겨 있었다. 이제 그들과 함께 연병장을 떠나며 4박 5일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훈련을 받으면서 어머니가 해주신 집밥과 냄비에 끓인 라면이 가장 그리웠다.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메추리알 장조림과 오징어채 볶음, 그리고 계란후라이를 차려주셨다. 집밥을 먹고서야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꿀같은 낮잠도 잤다.
“아들, 집이 최고지?” 아버지가 웃으며 물어보셨다.
“응! 집이 최고라니까!”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족만을 위한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흘린 피와 땀의 세월이 얼마나 되었을까 싶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난 어린 시절 찍은 앨범을 보며 추억에 잠겼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한때, 멋진 청년과 소녀였구나...'
그런데 왠지 모를 눈물이 막 쏟아졌다. 미안함의 눈물이었다.
'왜 지금은 흰머리도 나시고 주름도 생기셨을까...'
그동안 친구들과 놀기 바빴던 나는 가족을 뒷전으로 밀쳐두고 살았다. 그런데 묵묵히 나를 지지해 주신 부모님께서는 가족을 위해 청춘을 바치시고 가장 꽃다운 시절을 모두 보내셨다.
부모님의 어린 시절부터 신혼 생활, 그리고 나를 낳고 찍은 사진들, 첫 걸음마를 떼던 순간, 가족여행의 기억들이 떠올렸다. 모든 것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내가 잊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 많음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아버지도 아들이었고, 어머니도 딸이었다. 그 무게를 덜어드리고 싶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 후보생 월급 받았어요. 오늘은 가족끼리 외식해요!” 비록 3개월 동안 20만원 남짓 받았지만, 가족을 위해 써야겠다 생각했다.
“아버지, 어머니, 바르고 건강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효도할게요.” 식사를 맛있게 하고 난 뒤,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군대에 가면 철이 든다고 하던데, 그 말이 이제야 실감났다. 부모님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더 커져갔다. 나는 이번 휴가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더 나은 아들이 되기 위해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더 많은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이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친구들과의 만남이 그리웠다. 난 저녁마다 친구들과 술을 진탕 마시며 군대에서 받은 훈련과 일화들을 마치 모험담처럼 신나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여자 아이와도 만났다. 그녀는 내 첫사랑이었고, 내가 휴가를 받고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가 왔다.
“잘 지내? 휴가 나왔다며.” 그녀가 물었다.
“나야 잘 지내지. 한번 볼까?” 내가 떨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래, 내일 시간 괜찮아?” 그녀가 되물었다.
우리는 1년 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2년 전 사귀었다가 헤어진 뒤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만났지만, 첫사랑의 풋풋함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술 한 잔 기울이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으며 웃음꽃이 피었다.
“나 이번 휴가 끝나면 후반기 교육 들어가는데 주말마다 외출할 수 있어. 자주 보자.” 내가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그래, 연락해. 근데 군대 가면 핸드폰 못 쓰지 않아?”
“나 간부잖아. 앞으로 훈련을 18주 더 받고 주말밖에 못 쓰긴 하지만.... 실무 가면 잘 연락할 수 있어.” 내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너 어디로 가는데?”
“...나 백령도.” 내가 잠시 망설이며 대답했다.
백령도는 우리나라 최북단으로 인천에서 배로 4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보다 북한이 더 가까운 위치였다.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그리고 4.5초 같은 휴가가 지나고 복귀를 해야 했다. 군대에 입소할 때는 부모님과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지만, 이번엔 따뜻한 인사를 나누었다.
“아빠, 엄마, 나 다녀올게. 주말마다 올 수 있을 거야......사랑해!” 내가 쑥스럽게 말하며 집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아들 잘 다녀와! 다치지 말고 밥 잘 챙겨먹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웃으며 손을 흔드셨다.
집 밖으로 달려가던 내가 멈춰서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전투복을 다시 입었을 때, 군인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크게는 나라를 지키고, 작게는 내 소중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내가 중얼거리며 왼팔에 붙어 있는 태극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팔각모를 푹 눌러쓰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서울역에서는 상호와 보기로 했고, 포항역에서 우리 생활반 동기들을 만날 예정이었다.
“다들 도착했나?” 내가 물었다.
“아, 뺀질이 또 늦네.” 상호가 투덜거렸다.
“야야, 다들 잘 다녀왔어? 진짜 복귀하기 싫다.” 재준이가 말했다.
“뺀질이 규찬이 도착했다. 다 같이 짜장면이나 먹고 들어가자.” 자범이가 말했다.
“요~ 동기들, 다들 잘 다녀왔어?” 규찬이가 어깨동무하며 웃었다.
“하...참! 너는 잘 다녀왔냐!” 내가 배를 툭 쳤다.
“배고파...” 소심한 규호가 말했다.
“그래그래, 얼른 가자!” 재혁이가 큰 목소리로 앞장섰다.
“얘들아, 근데 나 아기 생겼다!” 두리가 신나서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었고, 모두가 두리를 축하하며 나란히 걸었다.
우리는 배불리 짜장면을 먹고 다 같이 부대로 복귀하여 내일부터 있을 훈련을 준비했다. 새로운 교번을 부여받고, 각자의 자리에서 앞으로의 훈련을 생각하며 다짐했다. 군 생활이 다시 시작되면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마음속에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소중한 기억이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
'이번 훈련도 함께 잘 이겨내자.' 내가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동기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초휴가가
어두운 밤하늘에 팔각모 쓰고 골목길에 들어설 때에 저기 어머니, 나와 계시네 못난 아들 반기시려고
어머니, 어머니 들어가세요 울지 말고 들어가세요 다음에 이 다음에 전역하거든 못 다한 효도 다 할게요
아들아, 아들아 들어오너라 울지 말고 들어오너라 다음에 이 다음에 전역하거든 행복하게 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