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숙소에 짐을 풀고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에는 전을 부쳐야 하는데.
전을 부칠 재료가 뭐가 있나 싶어서 부엌살림을 넣어 온 가방 안을 뒤지니 감자 몇 알과 골파가 보였다.
그라츠에서 감자를 샀었다. 파머스 마켓에서라면 감자를 몇 개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날 요리에 감자는 필요했고 장이 서지는 않는 날이라서 어쩔 수 없이 마트에서 포장된 감자 1킬로그램을 사야 했다. 감자를 담은 망이 꽤나 마음에 들어서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천연섬유로 만든 망에 감자를 담아서 팔 생각을 한 오스트리아 사람들, 환경보호에 진심이다!
감자 1킬로그램
어쨌든...
그거 제발 버리자는 아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내 가방에 꾸역꾸역 넣어서 부다페스트까지 들고 온 감자가 빛날 순간이 왔다. 부엌에 강판이나 블렌더가 있을 리는 없었지만, 마침 치즈 그레이터가 보이길래 거기에 감자를 쓱쓱 갈았다.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야? 감자전은 갈아야 제맛이지!
갈아놓은 감자가 묽어 보여, 여름의 눈총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들고 온 튀김 가루도 두 수저 넣었다. 골파도 송송 썰어 넣었더니 제법 그럴듯한 전 반죽이 되었다. 식용유가 없어서 비빔밥에 넣으려고 가져온 참기름으로 감자전을 부쳐야 했지만.
참기름으로 감자전 굽기
몇 개를 집어 먹고 나서야, 봄과 여름은 사진을 찍어서 가을에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핸드폰을 들고 부산스러웠다. 감자전을 다 부치고 식탁에 가 보니, 봄과 여름은 내가 먹을 두 개만 남기고 한 접시를 홀라당 먹어치웠다.
감자 버리자고 한 사람 나와! 튀김 가루 버리자고 한 사람도 나와!
교환학생에게 주고 온 장아찌도 생각나네. 여기에 장아찌 하나 곁들여 먹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장아찌 국물에 찍어 먹었으면 새콤달콤 기가 막혔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