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국립박물관을 뜯어본 발자국과 마음
03. 문자의 힘
메일함 용량이 부족하다는 경고 메시지를 본 뒤 아주 오랜만에 '보낸 메일함'에 들어갔다. 불필요한 스팸과 몇 년 묵은 받은 메일을 지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인지 아무리 비워내도 자꾸만 더 비워내라 독촉하는 바람에 결국 보낸 메일함까지 클릭하고 말았다.
지난 10년 동안 발송한 수천 통의 메일을 최근 순서대로 주르륵 훑어보다가 마치 땅 속에 묻은 타임머신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신이 났다. 특히 경주국립박물관 모니터링 결과지를 보자마자 마음이 딱 그랬다.
2021년 2월부터 12월까지 매달 똑같은 제목으로 보낸 메일이 유독 눈에 띄었다. 문득 왜 2월부터인지 궁금해져 1월로 거슬러 올라가 보니 1월의 제목은 '경주국립박물관 모니터링단 지원'이었다. 아마도 1월에 지원을 해서 합격한 뒤 2월부터 12월까지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경주국립박물관 *월 모니터링결과 제출'이란 지극히 사무적이고 무미건조한 제목으로 무려 11개의 메일을 보내놓고는 그런 활동을 했던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추억 속에 잠든 시간을 살짝 건드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메일에 첨부한 한글 파일을 눌렀다. 매월 말에 2편씩 모아 한 번에 제출했으니 총 22개의 결과지였다. 이 중 딱 한 개를 골라 읽어 보려는 순간 키보드에 얹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간질거리듯 지릿했다. 3년 전에 작성한 보고서라니 정말 오그라드는군. 무슨 소리를 적어놨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본인이 쓴 글을 돌아보는 것처럼 고요하게 민망하고 쫄깃하게 겸연쩍은 일도 없는지라 아무도 없는 방인 줄 알면서도 뒤 한 번 슬쩍 돌아보고는 침 한 번 꼴딱 삼키고 모니터를 마주했다.
박물관에서 제공한 결과지 작성 양식이 떴다. 표의 왼쪽에는 위에서 아래로 모니터링 항목이 적혀 있다. —전시, 박물관 프로그램, 편의시설의 환경상태 및 친절도, 직원의 친절도, 개선 및 건의 사항— 정갈하면서도 구체적인 목록명이 참으로 박물관답다. 각 칸의 오른쪽에는 모니터링을 하고 찾아낸 점이나 느낀 점을 기재한다. 매번 모든 항목을 다 채울 필요는 없다. 모니터링 한 번에 두세 가지 담아내면 된다.
3년이 지난 오늘이지만 파일을 읽고 나니 새록새록 그때의 발걸음이 떠오른다. 넓고 넓은 박물관 부지를 늦겨울부터 봄, 여름, 가을 지나 다시 초겨울까지 도토리 줍는 다람쥐처럼 여길 들쑤시고 저길 들쑤시며 뜯어보고 다녔다. 유물 설명에 오탈자는 없는지, 번역이 잘못된 곳은 없는지, 몰래 쑤셔 넣고 도망간 쓰레기는 없는지, 하다못해 화장실 거울 위치가 엉뚱하진 않은지, 뭐라도 잡아내야 결과를 보고할 것 아닌가. 아 근데 글쎄 요 경주박물관이 얼마나 관리를 잘하는지 웬만해서는 흠 찾기가 어려워 매달 두 번씩 들락거릴 때마다 나는 더욱더 부지 구석을 뒤지고 다니게 되었다.
하루는 미스터리 쇼퍼처럼 편의점을 기웃거리며 직원의 친절도를 평가하다가 가게 문을 닫고 나오는데 눈앞에 떡 하니 비석 하나가 보였다. 세워진 자태가 어쩐지 낯이 익어 다시 쳐다보았다. 달달 외운 국사책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설마 이것은 척화비......? 흥선대원군의 척화비가 경주박물관에 있다고?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비석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진짜 척화비라니. 이게 웬일이냐 흥분해서는 그날 밤까지 기분이 둥둥 떠다녔다.
그때 그 쫌쫌따리 발걸음과 들뜬 마음이 순식간에 고개를 치켜들고 돌아왔다. 고작 모니터링 결과지 하나 읽었을 뿐인데 마치 3년 전 그날로 날아간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것이 문자의 힘인가. 하얀 바탕에 검은 글자가 시간과 공간을 불러내질 않는가.
다른 메일 속에는 어떤 기억이 잠들어 있는지 확인을 하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보낸 메일함을 지우는 데는 시간이 걸릴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