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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YA Nov 22. 2022

사랑에서의 패배와 이를 알리는 퇴각의 북소리

프랑수아즈 사강 <패배의 신호>

퇴각의 북소리, La Chamade
, 패배를 알리기 위해 울리는 신호 




제목에서부터 예견된 그들의 사랑은 퇴각의 북소리와 함께 점점 그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 소설은 굉장히 단순한 내용이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부유하지만 나이 많은 애인(샤를디안)이 있는 두 명의 젊은 남녀(루실앙투안)가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껴서 사랑하고 서로의 연인을 상처 주고 그럼에도 사랑하지만 현실을 깨닫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내용이다.

제목에서도 암시되었듯이 둘의 사랑은 끝이 난다.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지만 이 책이 엄청난 몰입과 흡입력을 선사하는 이유는 사강의 매력적인 묘사 덕분이다. 


일례로 첫 만남에 사랑을 확인하는 남녀에 대해 숱하게 보이는 묘사

 ‘두 사람은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끌림을 느꼈고 그렇게 사랑에 빠져들었다.’

는 사강의 소설 앞에서 진부한 표현에 불과하다.


사강의 소설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을 

‘그와 마주친 순간은 마치 여태 만나왔던 수많은 남자와의 손이 맞닿았던 감촉이,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주장하던 무수한 소유의 순간이 철저하게 무시되는 기분과 함께 이 순간이 아닌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사랑받는 여자로서의 역할을 단 한순간도 수행하지 못했던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라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살짝의 비약이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이렇다.) 또 소설 일부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여 쓰자면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에 대한 묘사를 


‘시간이 그저 죽여야 할 것이 아닌 다른 것, 애지중지하고 아끼고 지나가지 못하게 할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 

고 표현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강의 책을 끊임없이 펼쳐보게 만드는 이유라 생각했다. 


루실과 앙투안의 사랑이 엄청 극적으로 느껴지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보통의 연인들의 사랑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사강의 소설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는데, 바로 인물의 행동보다 세밀한 감정 묘사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에 대한 감정, 그들이 소유한 사물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그들이 사용하고 그들을 나타내는 모든 것에 대해 이들이 가지는 감정 혹은 변화하는 상황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 이들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이 소설을 읽고서 나는 사랑의 저변에 깔려 있어야 할 안정과 현실에 대해 생각했다.

이것이 없다면 사랑의 민낯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안정과 현실이란 구체적으로 자본이라든가 사회적 위치라든가 시선이라든가 하는 그런 것들, 루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디에도 메여있지 않은 자유로운 여자처럼 보이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이자 나이 많은 전 애인 샤를이 그녀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라 예상하게 만들었던 원인이 되는, 루실이 ‘이런’ 사람이라는 진실에 안도하지만 미래에 대해 철저히 절망하던 현 애인 앙투안의 태도의 이유가 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뜻이다. 루실이 본인을 떠나려 할 때 샤를은 ‘이미 알고 있었소.’라는 말에 덧붙여 ‘앙투안은 당신이 당신인 걸로 나무랄 거요.’ 고 했다. 그녀가 그녀 자신이라는 것은 무위한 모습, 매사 태평하고 행복할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듯한 태도와 공존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무한한 애정 같은 것들이 루실을 루실답게 만드는 것이었고 이는 사실 샤를의 경제적 뒷받침(즉 보호자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모순적이게도 앙투안은 이 모습을 사랑했으나 이 모습에 끝없이 좌절하고 말았다. 샤를은 그녀가 자신에게 다시 오게 될 이유가 앙투안과 다르게 자신은 그녀를 그 자체로 사랑한다는 것(그녀의 모순적 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본인의 재정과 사회적 위치)에 대한 인지에 있음을 알았다. 우습게도 샤를과 앙투안의 차이는 위와 같은 안정과 현실에 있었다. 명랑한 루실이 사계절 중 가을에 접어들었을 때 속으로 ‘샤를이 그녀에게 준 자유로운 시간과 그녀가 앙투안에게서 훔친 자유로운 시간이 비교도 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되뇌었을 때 이미 앙투안과 루실의 사랑은 패배의 신호를 알리고 있었다.


삶을 붙드는 것이 사랑이라는 치기 어린 생각에서 발목을 붙잡는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사랑으로 변모하는 순간 삶은 현실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강의 황홀한 재능을 알 수 있는 책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녀가 서른이 되는 해에 집필한 <패배의 신호>에서는 좀 더 농익은 관능적인 매력이 더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의 재능을 바로 천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문장 한 문장 놓칠만한 것이 하나도 없을뿐더러 몇 번이고 필사하여 내 것으로 소화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프랑스의 감성은 조금 멜랑꼴리한 느낌이 있어 선호하지는 않는 편이다. 샹송도 가끔 울적한 기분에 빠져들고 싶을 때 트는 정도라고 해야 할까. 또 프랑스 영화를 보고 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찝찝하기까지 하니 그들의 정서가 나에게 그다지 맞지 않음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강의 소설은 읽고 나면 다른 프랑스 예술과 달리 본인이 한차례 더 성숙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취해있게 만든다. 사랑에 대한 묘사가 사랑의 낙관적 측면만을 다루지 않고 고독이라든가 불안이라든가 욕망과 본성의 말로라든가 하는, 실은 우리가 사랑하며 마주해야 할 본질에 가까운 영역을 다루고 있다는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사강의 소설은 사랑에 대한 ‘진짜’이해를 했다고 느끼게 만들기에 끊임없는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표지마저 매력적이니 밖에서 이 책을 들고 다니면 왠지 모를 문학인이 된 듯한 허영까지 갖추게 하니 지적 허영심과 외적 허영심 둘 다 충족시켜 주는 사강의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다시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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