適來는 夫子時也요 適去는 夫子順也 < 장자> 내편 양생주
마침 세상에 온 것도 때를 얻은 것이요, 마침 세상에서 떠난 것도 때를 따를 뿐이다.
어느 순간 베란다에서 키우던 화분들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베란다 바닥의 물 빠짐이 원활하지 않아 화분에 물을 주고 나면 물을 쓸어내리느라 하루 종일 바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화분들의 무질서한 배치 사이로 청소를 하다 보면 내 엉덩이로 화분을 깨뜨려 일은 더 커지고. 그러면 청소시간은 더 길어지고 허리는 부러질 것 같고. 몇 년간 그렇게 반복하다가 그 고리를 끊고 싶어 다 치우리라 결심했다. 나누고 버리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시간이 지나 이사를 하게 되었고 베란다도 없어 화분은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근데 여기저기에서 마음에 드는 화분들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그동안 접했던, 가졌던, 그런 국적 없는, 근본 없는, 빤질빤질한 화분이 아니라, 이태리에서 건너온 토분이란다. 요즘에는 국산이 최고지만, 흙이 달라서인지 화분에서 풍기는 색감들이 신선했다. 좀 보잘것없던 식물들도 그 화분에 담기니 아주 그럴듯했다. 마음이 눈길이 자꾸 거기로 갔다. 그 후로 꽃집 순례를 다녔다. 꽃집만 있으면 차를 세우고 들어가고, 산책하다가도 들리고, 멀리 있는 남사화훼단지도 가 봤다. 어느 날 피자집 옆에 있는 꽃집에서 아주 마음에 드는 녀석을 봤다. 추운 겨울, 가게 밖에 버려진 듯 다른 화분들 몇 개와 같이 있었다. 버려진 듯 아닌 듯. 그날 이후 여러 날을 거쳐 지켜봤다. 그에 대한 내 마음이 변함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담겨있는 토분과 식물도 잘 어울리고, 마음에 특히 드는 이유는 엉성한 모습과 더불어 조그마한 잎에서 한겨울인데도 빨갛고 노란색을 내는 것이 참 묘했다. 꽃도 아닌 잎이 이런 색깔을 내다니, 대단한데? 버린 듯한 허접한 걸 왜 사는지 꽃집 아가씨는 이상해 했겠지만, 나는 거실 한쪽에 두기로 했다.
봄이 오고 있었다. 좋아했던 그 색깔들이 서서히 없어지고 언제 그 색을 볼 수 있을까 기다렸다. 애를 태우듯 가끔 나타나려다 없어지곤 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색깔은 볼 수가 없었다. 뭘까. 무슨 이유로 그럴까? 환경이 다른 것? 추운 바깥 날씨가 아니라서? 바깥에서 안으로 들이면 더욱 찬란한 색이 날 줄 알았는데... 춥고 찬 기운이, 어렵고 고된 시간들이 묘한 색깔을 피우게 하는구나. 사람들에게도 춥고 힘든 시간들은 버릴 시간들이 아닌 거구나. 그건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들이구나. 그 모든 시간들이 헛된 시간이 아니구나. 그리고 마침 그때 거기에 내가 있었던 것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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