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바리스타 2급 필기시험 접수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발신처는 3월 7일부터 수강하기로 한 학원이었다. 아직 수업도 듣기 전이었고 커피에 관해선 일도 모르는 나에게 필기시험을 접수하라고?
분명 잘못 온 거라 생각하며 학원에 확인 전화를 했다.
잘못 보낸 게 아니란다. 내용인즉 주 5일 4시간씩, 한 달 남짓걸리는 과정의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3월 11일에 있는 필기시험을 쳐야, 수강이 끝나는 4월 5일을 전후로 실기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는것이다.
이번 시험을 놓치면 다음필기시험까지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하고 자연스럽게 실기 시험 또한 5월 이후로 밀리게 되는데 그럴 경우,학원 수강이 종료되어 혼자 실기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부득이 빠른 필기시험 접수를 독려하는 것이라는 게 학원 측의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3월 7일 수업을 듣기 시작해서 3월 11일에 시험을 쳐야 한다는 말인데 과연 4일 만에 합격이 가능한 일인가?미심쩍어하는 나의 질문에 충분히 가능하다는 대답이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따로 문제집을 사서 미리 공부할 필요도 없단다. 담당 강사인 듯한 목소리는 학원에서 기출문제를 준비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시험접수를 하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 이후로 문자가 서너 번 더 왔고 난 긴가민가하며 접수를 하고 응시료 33000원을 결제했다.
가채점 결과
결과는... 가능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수업은 4일을 했지만 정확히 하루 분량의 실기 수업을 빼고 나면 필기시험대비는 겨우 3일을 한 택이다. 첫날 수업을 듣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강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비슷비슷한 기출문제들을 반복해서 풀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생소했던 내용들이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친숙해진 내용들을 교재에서 다시 확인하면서 전체적인 맥락과 연결 지어 이해하니 외우기가 훨씬 수월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오랜만에 시험 합격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공부라는 걸 하고 있으려니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듯, 두려우면서도 설레는 기분에 빠져 들기도 했다.
시험 당일, 근처 대학에서 50분간의 시험을 마치고, 강사님이 당부하신 대로 수험표 뒤에 답안을 옮겨 적어 와 1시간 뒤 집에서 가채점을 해보았다. 아깝게 3문제를 틀려 94점, 합격선인 60점은 넉넉히 넘겨서 다행이었다.
이게 뭐라고... 시험이 끝나고 나니 몇 년 동안 준비해서 수능이라도 본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했다.
'인생은 끝없는 공부의 연속이다.'
이 말은, 나이가 들수록 새록새록 느껴지는 진리처럼 나에게 와닿는다. 사람을 좋아해서 늘 누군가를 만나 한창 무언가를 쏟아내야 인생의 충만함을 느낀다고 착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헤어져 카페문을 나설 때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외로움의 냄새들... 그게 두려워 또 다른 이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무한 반복 속에 꽤 심각해하며 내뱉은 담론들은 결국 공허한 메이리였음을 누구보다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속을 채워야 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아귀처럼 허한 나를 채워야 했다. 그러려면 혼자 노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피가 되고 살이 되려면 몸에서 그걸 흡수하기까지 분해되고 소화되는 과정이 필요한 법, 내가 받아들인 모든 지식과 경험을 그저 일회성으로 휘발시키기보다 내 안에서 숙성시키는 과정이 필요했다. 혼자가 외로워서 함께 하기보다 혼자도 충분히 재미있기에 함께 나누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다다른 날, 허벅지를 찌르는(?) 심정으로 혼자 즐길 수 있는 일들을 찾았다.
혼자 놀기엔 공부가 제격이었다.
때론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침침한 눈이 큰 복병으로 등장해 진로를 방해하기도 하지만, 읽고 외우며 글로 정리하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몰라 가끔씩 동거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즐거워야 그 또한 편안해한다는 걸 알기에 난 꿋꿋이 내 길을 가리라 선언해 버렸다.
필기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나마 이 나이에 공부라도 적성에 맞아서 다행이라고...
기억력과 집중력이 서서히 스러지는 중년이 되어서야 공부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건, 아마타인이나 상황에 등 떠밀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오롯이 나 스스로가 원하고 선택한 것이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더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게 많아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 전 삶은 헛살았나 보다. 아님, 마음은 다시 젊어지려는 건가..ㅎㅎ
겨우 필기시험 하나 쳤을 뿐인데 또다시 거대 담론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본다. 하지만 이 기분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모처럼 나에게도 사치란 걸 허용해 본다. 이미 비용을 지불한 '감정의 사치'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