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미 선생님 이신가요? 2월 말쯤에 취업을 위한 집단 상담 프로그램이 있는데 참가하시겠습니까?"
낯 선 번호에 난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아 뻑뻑해진 머리를 최대한 굴리며 이 전화가 나에게 닿게 된 연유를 찾아내려 애썼다.
아~, 작년 고용지원센터를 찾았을 때가 생각났다. 국민취업제도를 신청하려고 찾은 그곳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기다리는 시간 틈틈이, 나에게 해당되는 다른 프로그램은 없는지 주위의 모든 홍보물들을 스캔했었다. 준비 중인 몇몇 과정들이 있길래 시작되면 연락을 달라고 창구직원에게 신신당부한 사실이 그제야 기억났다.
'경남 여성 새로 일하기 센터'
그동안 세상 돌아가는데 무심했던 탓인지 비슷하면서도 낯 선 이름의 단체들이 많았다.
여기선 해마다 정부 보조금을 받아 여성의 취업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개인의 조건에 맞는 취업도 알선해준다고 한다.
이왕 시작한 거, 자격요건에 맞는 상담이나 교육은 다 들어보기로 했다. 그동안 한 우물만 파다 보니 그 외의 일에는 문외한이어서 가끔씩 다른 분야에 무지한 나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이참에 우물밖의 세상도 보고 운이 좋으면 다른 우물로 갈아탈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니 겸사겸사 나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탐색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프로그램은 2월 21일~23일, 화수목, 9시 30분에서 1시 10분까지 딱 3일 동안만 이루어졌다. 그 기간 동안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잠깐 머뭇거리긴 했지만 오랜만에 오전 일찍 하루를 시작한다는 느낌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딴생각으로 향해있는 스위치는 잠시 꺼두고 기꺼이 교육에 참가했다.
참가인원은 15~16명, 신청한 사람들 중 결석한 이 하나 없이, 모두들 자신들의 오전을 오롯이 내어주며 교육에 대한, 궁극엔 취업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첫날, 돌아가며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 참가하게 된 각인각색의 사연을 듣고 있자니 나의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보다 연배가 있으신 2~3분을 제외하면 대부분 30대 후반에서 40대 중후반의 경력 단절 기혼 여성들이었다. 회사 사정상 권고사직을 당했거나 육아문제로 직장을 그만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저마다 기본적인 자격증을 소지했고 현장에서의 경력들도 만만치 않은 열혈 여성들이었다. 다들 생계 때문 에라도 일하고 싶어 했고 권고사직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다는, 연배가 좀 있으신 분은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일을 하지 않는 동안 우울증이 와서 힘이 든다며 소개도중 눈물을 비치기도 했다.
다들 치열하게 사시는구나...
되지도 않는 꿈을 찾는다며 멀쩡한 사업체까지 접고 세상을 배운답시고 이 자리에 앉아있는 나 자신이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한심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주로 재취업을 위한 마음가짐을 다지고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파악해, 필요한 역량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여성 취업 도우미 역할을 했다. 현실적인 도움으론 다양한 구인구직 사이트도 소개하고 이력서나 자기소개서 쓰는 법도 알려주었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 동안 간식을 먹으며 주위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 기관에서 알선해 준 업체와 면접을 보고 오는 사람도 몇몇 눈에 띄었다. 모두 취직을 응원하며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직업이란 과연 무엇일까? 난 또 머리가 복잡해졌다.
생존하기 위해, 혹은 남보란 듯이 살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과 시간을 내어주고 경제적인 보상인, 돈을 받는 행위일 뿐일까? 다행히 직업에서 즐거움과 보람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야 없겠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 일 이외의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상황들의 연속이고 전혀 즐겁거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해 계속 나아가야 하는가?
직업에서 시작된 나의 의문은 삶으로 옮겨졌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생계 이외의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고 향유하고 싶지만 그런 시간마저 빼앗겨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채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돌다가 녹슬면 그마저도 쫓겨나 한없이 구겨진 자존감으로 우울하게 살아가는 삶, 인간은 기껏 그런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났단 말인가? 어쩌면 이윤추구를 위해 효율성만 강조하는 이 산업사회가 필요할 때 적당히 사람을 썼다가 버리는 일회용 대용품으로 치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면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들을 불문율처럼 받아들이고 거기에 안주해 하루하루 사회가 제시한 메커니즘에 맞춰서 살거나, 잘못을 개인의 능력부족 탓으로 돌리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을 택하기도 한다.
생계와 추구하는 바가 일치하지 않으면 무슨 정해진 법칙처럼, 일하는 시간 외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서 강박적으로 미친 듯이 열심히 살기 경쟁을 하는 것 같다. 나 역시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중년이 된 어느 날, 모든 것이 리셋된 기분이었다. 누구나 그렇게 살기에 아무 의심 없이 따라 했던 내 과거 여정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삶은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경제적인 욕심을 좀 내려놓으면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 늦은 방황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올 들어 몸소 뛰며 답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울 뿐 아직은 나아갈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다.
오히려 나의 무능과 사회의 두터운 벽만 느낄 뿐...
하지만 시시때때로 나를 다독여 본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무언가 인지한 순간,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쉽지 않은 법..
일단 발을 들여놓은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어디로 맞닿아 있는지 알 수 없는 길을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