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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May 11. 2024

계란으로 바위를 치다.

제1차 페르시아 전쟁(2)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사절단까지 처형한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매우 분노했다.

 기원전 490년, 그는 원정에 실패한 마르도니우스를 해임하고 메디아 출신의 다티스와 자신의 조카 아르타 페르네스를 지휘관으로 한 2차 그리스 원정군을 꾸린다.


 다리우스왕은 이들에게 이오니아 반란을 도운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복속시키그 시민들을 노예로 삼아 자기 앞에 끌고 오라고 명령하며 그들을 출발시켰다.



첫 원정 때, 페르시아는 육군과 해군이 내륙을 따라 진군하다 아토스만이라는 곳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엄청난 손실을 입은 경험이 있었으므로 이를 두려워하여 이번엔 다른 루트를 선택했다.



이번 원정에선 사모스섬을 떠나 이카로스 섬을 거치는 등, 에게 해의 크고 작은 섬들을  누비며 그리스 본토에 닿을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아리스타고라스 때 실패한 낙소스 섬을 정벌하는 것도 이번 계획에 포함시켰는데 그 후 델로스와 카리스토스 섬들을 거치면서 페르시아에 복종하지 않으면 온갖 약탈과 방화로 섬을 초토화시키며 필요한 보급품과 병사들을  현지 조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렇게 에레트리아에 도착한 페르시아 군은 항전하는 적을 6일 만에 함락시키마침내 마라톤 평야에 이른다.

페르시아 군을 이곳으로 이끈 사람은 페르시아로 망명해 있던 전 그리스 참주 히피아스였다.

이곳을 격전지로 선택한 표면상의 이유는 에레트리아와 가장 가깝고, 기병이 활동하기에 용이하다는 이었지만 아테네로 바로 진격할 경우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를 자극할 수 있고 중장보병이 주력인 적에 비해 보병, 기병, 궁병등 다양한 포지션으로 구성된 페르시아 군에 유리한 장소를 골랐다는 정치적, 군사적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의 진군 루트


 한편 아테네에서는 앉아서 적을 맞을지 나아가서 싸울지 의견이 분분하던 차에 페르시아와의 전쟁 경험(이오니아의 반란에 참여)이 있던 밀티아데스를 총지휘관으로 하여 선제공격에 나서기로 하고  즉시 그리스 지역에 구원병을 요청한다.

 페르시아가 두려웠던 탓인지 오직 플라타이야에서만 지원군을 보냈고 파병을 약속한 스파르타에서도  마침 종교 행사일이라 당장 출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침내 아테네 자국군과 플라타이야에서 파병된 군대 약 1만 명은(또는 1만 천명) 마라톤 평야에서 페르시아 군과 맞서 되는데,  페르시아 측은 보병 2만 5천 명, 기병 1천 명과 600척의 군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때 페르시아 군은 보병 1만 5천여 명 정도만 전투에 투입시키고 나머지 병력은 비어있는 아테네를 공격하러 나서는 실책을 범한다.

 이를 눈치챈 그리스 군은 밀티아네스의  뛰어난 전술로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둔 후, 강행군을 하여 적보다 더 일찍 아테네에 도착하는 저력을 발휘한다.

 신출귀몰한 그리스 군의 위용에 아연실색한 페르시아 군은 더 이상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철수함으로써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아테네의 완벽한 승리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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