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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경주의 야경

평일, 남편과 퇴사기념 여행을 떠나다.

by 정현미


남편의 퇴사도 기념할 겸, 1박 2일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회사의 바쁜 일정으로 조촐한 송별식도 못하고 마지막 날까지 일만 하다 늦게 퇴근 겸 퇴직을 해버린 남편...

어떻게 보면 우리에겐 나름 파란만장했던 반세기 인생을 정리하는 시점인데 뭔가 끝이 흐지부지 되는 것 같아 속도 좀 상한 터였다.

까짓것, 안식년도 우리가 스스로 만들었는데 기념도 우리 식대로 하지 뭐.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기에 그리 멀지 않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자하여 선택한 곳이 경주였다.


경주는 여행에 젬병인 나도 여러 번 찾은 곳이기도 하다.

왠지 방문할 때마다 무언가 지도와 필기도구를 지참해 이곳저곳 꼼꼼하게 조사하듯 공부하며 돌아다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기도 하는 곳이지만 이번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몇 년 전이었던가, 이제는 아득한 옛일처럼 여겨지는, 아이들과 함께 한 가족 여행에서 끝내 보고 오지 못한 경주의 야경만 보고 오리라 다짐하며 나름 심플한 루트를 짰다.

하지만 무딘 거리 감각에 여전히 의욕만 앞섰던 나는 그 모든 과정을 도보로 행한 자체가 큰 욕심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때 우리의 로망이었던 평일 여행을 결행해보려고 주말을 피해 화요일 오전 일찍 출발한 우리는, 중간지점인 울산에서 대왕암을 보고 오후 4시경 경주의 숙소에 도착했다.

호텔이라기 보단 게스트 하우스에 가까운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숨을 돌린 , 호텔 침대 위에 경주 관광지도를 펼쳐놓고선 우린 서로의 머리를 맞대었다. 다행히 숙소가 황리단길 근처라 우리가 생각했던 동선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 부근을 중심으로 돌아보는 걸로 세부일정을 짰다.


먼저 시간상, 황리단길을 거쳐 첨성대를 관람하고, 계획으로는 저녁때쯤 도착할 예정인 동궁과 월지 (안압지)에서 야경을 본 후 다시 첨성대로 회귀 , 이어 월정교의 야경을 마지막으로 숙소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하지만 나의 실책으로 코스가 초반부터 꼬이고 시작했다. 날씨 앱에선 분명 비 소식이 없길래 출발할 때 굳이 차 트렁크에 있던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는데 황리단길에 들어서자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심상찮았다.

우린 어쩔 수 없이 우산을 가지러 왔던 길로 돌아가는 바람에 비축해 놓아야 할 에너지를 너무 빨리 소진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우리가 목표로 한 코스가 얼마나 먼 거리였는지 알지 못한 채..ㅠㅠ


황리단길을 지나 이리저리 헤매다가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인 첨성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제 봐도 정겨운 첨성대, 잠시 학생 시절로 돌아가 그 앞에서 사진도 찍고 근처에 알록달록하게 꾸며놓은 꽃밭 속에서 한껏 포즈를 잡아보기도 했다.

제법 다양한 종들로 꾸며진 첨성대 주위의 정원을 지나 동궁과 월지 방향으로 쭉 뻗은 길로 계속 나아갔다.


6시가 넘어선 시간,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있었지만 비가 오는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주위는 여전히 밝았다.

우린 시간을 좀 벌어볼 요량으로 계획에 없던 근처 석빙고와 월성이랑까지 가서 느긋한 산책을 즐겼지만 잔뜩 찌푸린 먹구름 속에서도 해는 아직 열일 중이었다. 일단 동궁과 월지로 가서 어둠을 기다리기로 했다.


7시 30분쯤에 조명이 켜진다는 안내인의 말을 듣고 연못을 에둘러 천천히 산책하기 시작했다. 30여 분이 이렇게나 긴 시간이었는지, 어둠을 이토록 간절히 원한 적이 있었는지 싶을 정도로 지루한 순간이었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어디에 숨어있다 나왔나 싶을 정도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점등!!

아직 끈질긴 해의 흔적이 가시진 않았지만 공사 중인 동궁을 위주로 조명등이 점화되었다.


에게게...

날이 채 어둡지 않아서인지 현장의 풍경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칠 정도로 초라했다.

기다린 보람도 없이...

배신감에 가까운 실망감에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이내 습관적으로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댄 순간, 눈앞에서 놀라운 마법이 일어났다.

렌즈를 통해 본 풍경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이제껏 보아온, 내가 바라던 바로 그 장관이 똑같은 자리에서 펼쳐진 것이다.



연신 사진을 찍어대느라 나의 손이 바빠졌다. 어둠이 더 짙어지면 아름다움도 더 깊어지리라. 하지만 우리의 여정이 아직도 많이 남았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둘러 왔던 길로 발길을 돌렸다.

다시 첨성대로 향하는 길은 고즈넉한 조명으로 운치가 더해 한층 아름다웠다.




그리고...

저만치에서 첨성대 또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듯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마법의 성을 바라보듯 연신 감탄을 쏟아내며 넋을 잃고 휴대폰을 눌러댔다.

어느새 보슬거리던 비도 그쳐 마치 가을처럼 선선한 유적지의 밤거리는 군데군데 동화 속의 마법이 일어나기에 딱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어느덧 시간은 8시를 넘기고 있었고 오전부터 본의 아니게 강행군을 했는지 걸음 수도 이미 2만 보를 웃돌았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몸은 지쳤고 배에선 아우성이 시작된 지 한참이었다.

나는 여기서 20여 분 가량 더 걸어가야 닿을 수 있는 월정교의 야경은 사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우물쭈물 포기 의사를 타진하려는 나의 손을 붙잡고 여정을 강행한 건 오히려 남편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가 도살장 끌려가듯 있는 힘을 짜내어 무거운 걸음을 옮기다 마침내 닿은 곳, 월정교.

어둠 속에서 그 빼어난 자태를 드러낸, 그 고혹적인 모습과 마주한 순간, 오지 않았으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마음에 모처럼 남편이 고맙게 느껴졌다.



뿌듯한 마음을 연료 삼아 지친 몸과 저려오는 다리를 부여잡고 숙소로 향한 시간은 이미 9시를 넘기고 있었다.

화려했던 황리단 길도 거의 문을 닫아 늦은 끼니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던 우리는 가까스로 열려있는 노브랜드와 편의점에서 햄버거와 컵라면을 구입한 후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은 지극히 초라했지만 마음만은 풍성했으므로 충분히 행복하다고 우린 서로를 위로하며 그날의 만찬을 즐겼다.

준비해 간 과일과 와인까지 마신 우리는 제법 거나해진 기분으로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그날 하루를 곱씹었다.


같은 풍경, 같은 대상이지만 자신이 놓인 처지나 마음가짐에 따라 이렇게 달리 보일 수 있다니...

모든 짐을 내려놓고 오로지 그 대상만을 보고 마음껏 느낀 하루, 나에게 특히 남편에겐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찬란한 경주로 기억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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