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면 그 기간 동안 우린 꽤 많은 일을 했다. 구체적인 계획 없이 일을 그만둔 후 막연한 로망을 이루리라는 모종의 설렘과 불현듯 불쑥불쑥 치고 올라오는 불안함 속에서 우린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때론 그 시기에 꼭 해야만 했던 일들을 해내느라 좀 바빴던 것 같다.
우리가 꿈꾸었던 대로 주말은 철저히 배재한 채 기어이 평일만 골라 1박 2일이나 당일치기로 여행을 몇 번 다녀왔고, 꼭 그 시기가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가족상봉도 3박 4일 가졌으며 주말을 피해 요양원에 계신 친정엄마와의 외출도 평일을 오롯이 쓰며 시간을 공유했다.
그리고 틈틈이 긴 시간 방치했던 집안도 좀 손보고 나름 읽고 싶은 책과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시간이 주는, 아니 상황이 주는 강박에서 벗어나 소일하며 보냈다.
이러한 모든 평범한 일들이 마침내 업을 놓은 후에야 스트레스나 하기 싫은 숙제가 아닌, 기꺼이 하고 싶은 일로 다가온다는 사실에 새삼 서글퍼하면서도 우린 즐거운 마음으로 그런 일들을 하나씩 해나갔다.
그러는 사이 여름은 그 열기를 한층 더 뿜어댔고 자연을 감히 거스를 용기가 없었던 우리는 낯에는 뒹굴거리며 게으름을 피우다가 해가 지고 나면 보름달의 정기를 받으러 가는 늑대인간들마냥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곤 했다.
멀쩡한 몸을 굴리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에 대해,
생산적인 것을 전혀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작태에 대해, 신성한 노동으로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정신적 나태함에 대해, 아직까지는 저 바닥 깊숙한 곳에 남아있는 죄책감을 떨쳐 내려는 듯 그렇게 거리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수행하듯, 혹은 세상의 가치와 맞서듯 그렇게 만보를 걷다 보면오히려 주변의 자연과 아직은 건장한 두 다리를 통해 올라오는 에너지를 모아 발칙하게도 우린 내일의 게으름을 다시금 도모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자는 최소한의 마지노선마저 저버린 채 밤늦게 저 보고 싶은 거 다 보고, 먹고 싶은 간식 다 먹으며, 해가 중천에 떠도 깨워야 겨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유튜브를 보다가 다시 잠드는 남편을 보며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최소한의 무료함도 느끼지 않고 제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백수생활에 최적화되어가고 있는 남편이이대로 영원히 그런 모습으로 내 옆에서 화석화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순간 못 볼 환영을 본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동안 못했던 거 하고 싶다며? 해보고 싶은 거 하자며?
내 성격에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앞에다 대고 차마 막무가내로 하지는 못하고 지나가는 말인양 가장하며 진심을 쏘아붙였다.
돌아온 남편의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이런 거 하고 싶었다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보고 싶을 때 보고...
그러고는 좀 머쓱했는지 뒤늦게 덧붙였다.
부인 하고 싶다는 거 해주고, 같이 산책하고, 여행 가고 싶을 때 가고...
둘째가 꿈 운운할 때 내 꾀에 내가 넘어간 것처럼 남편이 진정한 자아 찾기 등을 들먹일 때 알아챘어야 했다.
남편에게도 속았다는 생각에 허탈감도 사치인 듯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부전자전이라더니 부자 사기단에 그만 꼴딱 넘어간 셈이다.
그래, 그것도 꿈일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살고 싶은 것도 한 인간의 권리일 수 있는 거야...
이가 꼭 맞불려야 돌아가는 톱니바퀴였기에 결코 멈춘다거나 그 어떤 일탈도 허용되지 않았던, 부속품 으로서의 삶에서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생각한 우리.
때와 장소만 바뀌었지 난 또 다른 톱니바퀴로 갈아타려 애쓰며 벌써부터 그때의 속도감을 회복하라고 다그치는,
남편이 아닌, 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남에게 뒤질세라, 손가락질 받을세라, 나 자신을 증명해 보일세라..
여전히 조급하게 무언가를 생각해내고 그 즉시 실천해서 결과물을 내려는, 나름 빅 픽처를 염두에 둔 채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남편까지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닌지...
열린 자세로 다양한 가치를 받아들이고 유한한 인생 속에서 나만의 새로운 삶을 추구한다면서 난 여전히 효율과 성과에만 집착하는 자본주의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한 달...
하고재비 부인을 따라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느라 그동안 지친 몸을 회복할 틈도 없었을 터, 하물며 톱니바퀴도 더 잘 굴러가려면 잠시 전원을 끄고 기름칠을 할 시간이 필요하고, 다람쥐도 쳇바퀴에서 내려와 휴식을 취해야 하며, 시지프스도 굴러 내려온 돌을 안고 잠시 쉴 지혜를 발휘해야 하듯 지금의 우리도 각자에게 맞는 숨 쉴 구멍 하나쯤은 찾아야 할 때가아닌가 싶었다.
거실에서 휴대폰으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부인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옆에서 나지막이 코를 골며 잠든 남편,
잠시 두 손가락으로 그 코를 비틀고 싶은 충동을 느끼다가 나는 조용히 일어나 안방에서 가져온 베개로 남편의 머리를 받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