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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퇴사했습니다.

드디어, 스스로 만든 안식년 속으로 첫 발을 내딛다.

by 정현미


오늘 남편이 퇴사했다.

올 3월 초에 남편은 그동안 벼루던 퇴직 의사를 회사에 알렸다. 사장과 여타 인수인계 관련 문제를 논의할 작정으로 나름 한 달 정도의 마무리 기간을 염두에 둔 시점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대체 불가 인재였는지, 말 그대로 중소기업의 구인란이 심각해서였는지 사장은 두 달을 질질 끌더니 급기야 남편이 몇 번이나 재촉하자 그제야 볼멘소리로 부랴부랴 기존 직원에게 업무 인수를 하게 했다.

어느새 5월을 넘어 입하가 지난 지도 한참인, 무더위가 슬슬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6월의 초입이었다.


사실 퇴사 기간이 여름날 엿가락 늘어지듯 길어진 데에는 남편 탓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나의 탓도 있었다.

남편 입장에선 기존 회사를 빨리 마무리 짓고 가야 할 또 다른 직장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오랜 시간 논의 끝에 부부끼리 서로 합의한 일이긴 지만 아내의 평범한 잔소리 끝에 미세하게 덧붙여진 한숨소리가 못내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남편은 나와 함께한 자영업 기간 5년을 차치하더라도 17년의 대기업 생활과 두 번의 중소기업 이력을 합쳐 근 20여 년을 직장인으로 살아왔다.

나 또한 10년 넘는 자영업을 포함해 20여 년을 생계를 위한 생활전선에서 일해왔다.

세상에 부지런하지 않고, 열심히 살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냐만은 우리 또한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앞만 보며 열심히 달려왔다. 누구나 그렇듯 그게 최선이라 생각하면서...


그러다 뒤돌아 보니 어느덧 오십, 몸과 마음은 예전 같지 않고 거울 속엔 어느새 주름진 우리네 부모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쯤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으로 계속 가라앉기만 하던 우리 내면에서 무언가 꿈틀대기 시작한 건. 더 이상 이대론 안될 것 같았다.

오랜 기간 고민했다. 하지만 막상 모든 끈을 꽉 부여잡은 채 구해지는 정답이란 없었다. 일단 저질러 보기로 했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단 하나의 끈만 남기고 나머지 끈들은 모두 잘라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생존'이라고 통칭되는 탐욕의 수레바퀴에서 빠져나와 서로에게 휴식을 선물하기로 했다.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가 만들면 되지, 뭐." 제법 우스갯소리로 넘길 줄도 알게 된 우리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안식년을 스스로에게 만들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몸에 맞지 않는 부모 역할하느라 고생했다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두 아들을 성인으로 키워내느라 애썼다고,

이제 자식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좀 가지라고,

우린 그렇게 '시간'이라는 단 하나의 끈을 서로에게 상으로 달아주었다.


물론 타이밍이 적절한 건 아니었다. 성인이라지만 큰아들은 군대를 막 제대해서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둘째는 계획에 없던 재수까지 하고 있으니... 그것도 다 집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느라 경제적인 출혈이 만만찮은 상황,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이것저것 재지 않기로 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남편은 기어이 루비콘강을 건널 것이기에...


두어 달 전 내가 먼저 하던 일을 정리하고 백수생활에 접어들었다. 조바심이 나서 적응할 수 없으리라는 우려와 달리 하루하루가 새롭고 이제야 내게 맞는 옷을 입은 듯 편안한 마음에 사실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 죄책감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 같다.


나이 오십은 나에겐 갱년기라기보단 제2의 사춘기 같다.

그동안 생존만을 생각하며 사느라 정작 나 자신은 무얼 좋아하는지, 무엇에 재능이 있는지 애써 외면하며 버텨온 나날들이었다.


이젠 남은 인생의 한 허리쯤 베어내어 오롯이 우리 자신만을 위해 쓰려한다.

아직 정해진 것도, 계획한 것도 없이 그저 소량의 설렘 한 스푼과 거대한 두려움만을 품은 채 또 다른 출발 선위에 선 기분이다.

흔히 일컫는 100세 시대에 1,2년쯤 곶감 빼먹듯 빼먹은들, 그러다가 탈이 난다고 한들 뭐 대수겠는가?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우린 느낄 수 있었다.

돈보다 시간이 주는 달콤함을 이미 맛 본 우리는, 저 태곳적 아담과 하와처럼 더 이상은 선악과를 먹기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알아차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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