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과거지사가 되었지만 10여 년 이상 해오던 학원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가맹점들을 대상으로 유일무이하게 백일장 대회를 주최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목적이라야 자사 프랜차이즈 홍보였지만 그땐 그만큼 프랜차이즈도 잘 나갔고 그로 인해 나의 학원도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던 때라 흔쾌히 참여하여 기꺼이 그 홍보의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자처했다.
그때 경남지역에서 2등인 은상을 수상한 나의 글 제목이 '나의 터닝 포인트' 였던걸로 기억한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그때까지의 내 인생을 낡은 필름을 돌려보듯 되새김질할 소중한 기회를 가졌었다.
그 분야에서 나름 성적이 좋았던 그때의 나를 있게 한 터닝 포인트가 무엇이었을까? 고심한 끝에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대학'이란 곳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번화가와 다소 동 떨어져 있던 학교와 집만을 오가며 의도 친 않았지만 타칭 모범생 생활을 이어가던 나는 한창 공부에 전념할 시기에 뜻하지 않은 교우관계로 매우 힘든 상황을 겪게 되었다. 나 스스로를 가둔, 틀에 박힌 삶 속에서 오직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대학밖에 없다는 생각에 커트라인을 낮춰가며 대학에 합격했고, 난 그곳에서 교과서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을 배우며 나의 틀을 깨뜨리는 힘겨운 과정을 기꺼이 감수했다.
보수적인 교육에 길들여져 항상 여자이기에 주눅 들 수밖에 없었던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나는, 대학이라는 곳에서 비로소 인간이라는 기준점을 찾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때의 대학은 다행히 지금과 같은 직업훈련소로 변질되기 전 지성의 전당이라는 명맥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반대급부로 여성학에 눈 떠가며, 남의 도움 일절 없이 오직 나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헤쳐나가겠다는, 지금 생각하면 다소 과격한 사상으로 무장한 어설픈 여전사를 표방했었다.
두 번째로 나의 삶을 변화시킨 터닝 포인트는 '결혼'이 아닌 '출산'이었다.
다소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의 성격을 지금의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소위 한국 아줌마의 대표적인 성격으로 바꿔놓은 건 순전히 우리 아들들 덕분이었다. 그렇게 겁이 많던 내가 아이를 하나씩 낳을 때마다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강의 경험 중 하나인 '산고'라는 모진 경험을 두 번이나 겪은 것 또한 한몫했겠지만 이 막막한 세상 아래 자신의 의지가 아닌, 온전히 부모의 뜻에 따라 태어난 아이들... 우리만 쳐다보는 녀석들을 지켜내기 위해선 강해져야 했다. 억척이 되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임을 엄마가 되는 순간 본능적으로 느꼈음이 틀림없다.
얌전하고 다소곳했던 새색시는 그렇게 엄마가 되고, 부모가 되어갔다.
나의 세 번째 터닝 포인트는 글을 쓸 당시의 목적이기도 한 학원 프랜차이즈와의 만남이라고 강조했었다. 물론 글의 취지에 맞게 반드시 등장해야 하는 주인공이었기에 피날레에 등장시키는 묘수를 부리기도 했지만 글을 쓸 당시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이 되기까지, 그 공백을 채울 요량으로 시작했던 학원강사가 생업이 되고, 결혼 이후까지 이어지면서 사실 싫증과 환멸도 느낀 터라 죽어도 학원만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나였다.
지금은 진부하지만 그 당시엔 획기적이라 할 만한 일대일 개별 시스템으로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힌 이 체인점으로 인하여 난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한 돈을 벌 수 있었다.
시기 또한 나쁘지 않았다. 지금은 자영업의 위상이 지옥으로 들어서는 출입구로 전락했지만 15년 전만 해도 웬만한 대기업 간부 월급 이상을 번다는 시절로, 나는 그 막차에 올라탔다 급강하하기 전 하차했던 운 좋은 사람이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10여 년의 사업 경험은 나의 마인드를 통째로 바꿔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반찬값 정도 벌 목적으로 시작한 공부방에서 학원으로 확장하면서, 그 위치에 걸맞게 사람의 그릇 또한 바뀌어야 한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꼈던날들이었다. 보람된 날도 많았지만 힘겹던 하루하루를 견디며 나를 채찍질하느라, 평생 읽어야 할 성공 서적을 그때 다 몰아 읽으며 근근이 버텼던 기억들이 지금도 새록새록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벌여놓은 일 때문에 앞만 보고 내달릴 수밖에 없었던 내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인생의 각 단계마다조금씩 성장해 온 나 자신이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생각에 지금에서야 그때 하지 못했던 칭찬이란 걸 해 주고 싶은 감상에 젖기도 한다.
당시 전쟁과 같던 하루하루가 반짝반짝 빛나는 추억으로 각색될 수도 있는 걸 보니 기억이란 쭉정이는 빼고 알맹이들로만 채워진, 밉지만은 않은 허상인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 앞으로의 내 인생에 추가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터닝포인트들에또다시 맞닥뜨렸다.
이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야 가능하리라.
하지만 먼 훗날 다시 기억이라는 필름을 되돌려 볼 때, 감상에 물든 허상으로나마추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