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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Aug 05. 2022

말은 렌터카가 아니니까요

Cheval Alsace의 하루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을 먹고 오전 기승을 다녀오면 말에게 밥을 먹이고 사람들도 밥을 먹는다. 아무리 바빠도 빼먹을 수 없는 아페로부터 시작해 디저트까지 한 시간이 훌쩍 넘게 점심식사를 즐기고 나면 어느새 오후 기승 시간이다. 다시 기승준비하고 두어시간 외승을 돌고 들어와서 말 밥을 챙겨준다. 저녁 아페로 전까지 약간 여유가 있어, 이 때 잠시 숙소로 돌아가 하루종일 뒤집어쓴 흙먼지를 씻어내고 따뜻한 물로 몸을 좀 데울 수 있다. 요리사 아저씨의 풀코스 서빙에 이어 Marco 아저씨가 준비한 와인 셀렉션까지 넉넉히 저녁 시간을 보내고, 10시를 전후로 기절모드에 들어간다.


물론 이 일과를 모두 소화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50대 초반 정도로 보였던 네덜란드 아주머니, 아저씨 부부는 첫날 오전 기승 후에 아주머니가 몸살이 나는 바람에 두분 모두 그 다음날 오후가 돼서야 비로소 식당에 나타났다. Maud 역시 어쩔 때는 본인이 컨디션이 나빠서, 또 어쩔 때는 딸이 피곤해 해서 하루에 한번 정도만 외승에 참여했다. 내가 머물렀던 일주일 동안 저 일정을 전부 다 따라다닌건 내가 유일했다.


그렇게 말을 타고 나면 식사 시간에 정말 평소보다 두배는 많이 먹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네덜란드 아주머니는 '이 작고 어린 (유럽인들에게 아시아인은 다 이렇게 보이나보다) 우리 Asian girl은 그 음식이 다 어디로 들어가냐'며 신기해하셨다.




비록 단순한 일과지만, 노동량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나는 이 승마장에서 우아하게 말만 탄게 아니라 '체험 삶의 현장'을 방불케 하는 노동을 해야 했다. 말 한 마리를 independently하게 타는 데 필요한건 기승횟수가 아니라 일단 체력이었다.


느즈막히 8시반쯤부터 아침식사를 하고 각자 오늘 탈 말을 정한다. 대개는 전날 탔던 말을 계속 타지만 한두번 다른 말을 탈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고나면 본 건물 뒷편의 방목장으로 가 열심히 건초를 잡숫고 있는 내 말을 찾아서 굴레를 씌우고 데려 나와야 한다. 한창 식사에 열중해있다가 머리에 굴레가 씌워지면 어쩐지 실망하는 기색이 느껴져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외승 나가서 신선한 풀 많이 뜯어 먹자고 어르고 달래 방목장에서 데리고 나오면, 본격적인 기승 준비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각종 도구들이 쌓여 있는 바구니에서 빗을 하나씩 챙겨들고 말을 빗겨주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3번째 말을 탄다는 네덜란드 부부도,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Maud의 딸도 익숙한듯 빗질을 했다. 눈치껏 따라하고 나니 이번에는 한쪽 끝엔 뭉툭한 꼬챙이가, 다른 한쪽 끝엔 작은 솔이 달린 무언가로 말굽에 끼여 있는 진흙이나 돌을 빼줄 차례였다. 말로만 듣던 '말굽파기'였다. 말굽을 파는건 둘째치고 일단 말의 다리를 들어올리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Good boy~ 너는 진짜 착한 말이구나~ 고마워~"


말이 다리를 들어주면 폭풍 칭찬을 하며 서둘러 말굽을 청소하고 신발을 신긴다. 여기까지 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말을 타기도 전에 기진맥진이 됐다. 애를 키운다는게 이런 기분일까. 내가 너의 발을 청소해주는데 니가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왜 내가 너한테 고마워해야하니, 라는 생각을 했지만 고집스레 버티고 서있다가 어쩌다 다리를 한번 들어주면 세상에 그게 그렇게 고맙고 이쁠 수가 없었다.


말굽파는 여인들


거기에 비하면 재킹과 안장을 올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안장과 재갈, 신발 모두 그 말한테 맞는 것들이 정해져 있어서 잘 찾아서 가지고 와야 했지만 장비마다 말의 이름과 번호가 다 써져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그 중에서 재갈은 마지막까지 대기하고 있다가 다들 준비가 끝난 것 같은 분위기가 되면 그제서야 물렸다. 아마도 말이 가장 민감해하고 또 불편해하는 장비라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두어시간 트래킹을 다녀오고 나면 다시 한번 노동타임이 시작된다. 풀도 마음대로 못 먹게 하는데 나를 등에 업고 걷기도 뛰기도 해줬으니 이제 내가 서비스를 해줄 차례였다. 가장 불편했을 재갈부터 빼주고 깨끗한 물에 정성껏 씻어 다시 더러워지지 않도록 잘 널어둔다음, 아까와는 반대 순서대로 장비들을 풀어준다. 말굽도 필요하면 한번 더 청소해주고 (말굽이 깨끗하면 그렇게 기쁠수가 없다!) 말 밥을 챙기러 간다. 목마르다고 투정부리면 물도 떠다줬다. 또 한번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말의 식사가 끝날 때를 기다리는데, 열심히 코를 박고 밥통 바닥을 뚫을 기세로 싹싹 긁어먹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다시 방목장에 넣어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건초를 먹고 있는 곳으로 뛰어가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역시 애를 키우면 이런 기분일거라는 상상을 했다.




그 전까지 나는 말 위에 올라가서 글자 그대로 '탈줄만' 알았지, 승마의 ㅅ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었다. 기승시간 5분 전에 승마장에 도착해 감독님이나 교관님들이 다 준비해주신 말 등에 잠시 앉아 이것저것 시도해보다가, 정해진 시간이 끝나면 내려서 다시 감독님과 교관님들께 말을 넘겨 주면 끝이었다.


"한국에서 말타는 건 렌터카 빌리는 것 같네요."


 이야기를 들은 네덜란드 아저씨는 이런 감상평을 내놓으셨다. 정말,  표현이 딱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교관님들이 내가 탈 말을 다 준비해주시는걸 당연하게 여겨왔다



한국의 승마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기승을 마치고 말을 수장대에 매어 놓았는데 얘가 자꾸만 발로 바닥을 구르는 것이었다. 뭔가를 요구하는 게 있을 때 하는 행동이란건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래서 뭘 원하는 건지는 당췌 알 길이 없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녀석이 대답해줄리는 없고, 답답하다는 듯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복대* 풀어달라고 이러는거야."

(*안장을 고정하기 위해 말의 배에 두르는 벨트. 보통 기승 직전에 아주 타이트하게 조여맨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구분하는 엄마처럼, 감독님은 단번에 이 바디랭귀지의 의미를 이해하셨다. 복대가 그렇게 불편한 것이란걸 그날 처음 안 나는 그 다음부터 말에서 내려오면 꼭 복대를 한두칸이라도 풀어주기 시작했다. 그게 그나마 내가 말을 렌터카처럼 대하지 않으려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었다.




알자스 승마학교에서는 같은 말을 오전, 오후 계속 타더라도 한 타임 외승을 다녀오면 반드시 모든 장비를 다 풀어주고 빗질을 해줬다. 하루에 두번씩 안장을 들고 날랐더니 처음에는 무거워서 제대로 들지도 못했는데 나중엔 그 무게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기승 후에 안장과 재킹을 벗겨내고 나면 결코 덥지 않은 알자스 숲 속의 날씨에도 말의 등은 땀으로 젖어있기 일쑤였다.


하루는 아예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나가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온 날도 있었는데, 한 시간 남짓의 점심시간에도 어김없이 굴레를 제외한 모든 장비를 풀어주었다. 유독 먹성이 좋았던 내 말은 무아지경으로 풀을 뜯어먹다 줄을 매어놓은 나뭇가지를 몇번이나 부러뜨렸다. 나는 샌드위치를 먹다 말고 뛰어가서 꼬일대로 꼬인 줄을 풀어주고 다시 적당한 나뭇가지를 찾아 묶어주길 반복하면서 또 이렇게 생각했다.


확실히, 애를 키우면 이런 기분일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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