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a Jul 30. 2022

말타는데 무슨말이 필요하죠

Rothau역에 픽업을 나온 아저씨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셨다. 분명 홈페이지에 '직원들이 프랑스어와 영어를 할 수 있다'고 설명이 돼 있었지만 사실은 '직원들이 프랑스어를 할 수 있고 간간이 영어를 하는 사람도 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나와 똑같은 날짜에 도착해 일주일동안 함께 머무를 어느 모녀가 있었는데, 다행히 그 애기엄마가 언어천재여서 통역사 역할을 해줬다. Maud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프랑스인이었으며 독일인 남편을 만나 프랑크푸르트 외곽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Cheval Alsace 승마학교로 향하는 20분의 짧은 시간 동안 Maud는 나와는 영어로, 드라이버 아저씨와는 프랑스어로 언어패치를 바꿔가며 끝없이 이야기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 시간이 얼마나 어색했을지 상상만 해도 손발이 다 오그라들었다. 파리여행 이후에 프랑스어를 배우겠다며 야심차게 온라인 학습지를 결제하고 아이패드도 샀지만(?) 좀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던 시간이었다.




차창 밖에는 깊은 산세와 너른 초지가 펼쳐진 시골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국과 비슷한 것 같다 싶다가도 연두빛의 들판과 드문드문 보이는 프랑스 특유의 아기자기한 집들이 여기가 낯선 타지임을 알려주었다. 도시의 흔적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웠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희뿌연 수증기가 나즈막히 내려앉아 이곳이 꽤나 고산지대라는 걸 짐작케 했다.


"여기 올 때마다 더 따뜻하게 입을걸 그랬다고 생각해요."


한 평생 말을 타셨다는 독일인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그 정도로 여길 자주 오시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예상보다도 서늘한 날씨에 나 역시 옷을 더 챙기지 않은걸 후회했다. 6월 초의 알자스는 산속인데다 우리나라보다 기온이 낮은 프랑스의 날씨 탓인지 '춥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드라이버 아저씨는 본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숙소 건물에 우리를 내려주시곤 프랑스어로 뭐라뭐라 긴 설명을 이어갔고, Maud가 그걸 다시 영어로 나에게 전달했다. 기승준비와 식사 등등이 이루어지는 본 건물로 갈 때 차를 타고 온 길로 가면 빙 둘러가게 되니, 숲 길을 가로질러가는 게 좋다는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일주일 동안 나의 보금자리였던 Cheval Alsace의 숙소건물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식사 시간이었는데, 프랑스 사람들의 저녁 식사가 시작되는 것은 8시로 보통 우리나라 사람들이 밥 먹는 시간보다 좀 늦었다. 재밌는 것은 7시반부터 식전주 타임이 있다는 거였다. 아페리티프(apéritif), 줄여서 아페로(apéro)라고 불리는데, 식욕을 돋구기 위해 가볍게 한 두잔 마시는 것이다. 핵심은 '가볍게 한 두잔'이다. 나는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한국인의 음주패치를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그럼에도 매번 아페로 때마다 '방(vin, 와인)'을 찾으니, 나중에는 영어가 안되시는 아저씨들도 나만 보면 '방?(와인 줄까?)' 이러셨다. 언어의 장벽은 소나무 같은 나의 알콜 취향 앞에서 조금씩 허물어졌다.


그러고보니 이 승마학교 프로그램에는 삼시세끼와 '알콜'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이 나와 있었다. 와인은 달라는 대로 나오고 맥주는 아예 생맥주 기계가 식당 한켠에 있어서 원하는 사람은 물처럼(?) 마시곤 했다. 아페로는 점심 먹기 전에도 있지만 오후에 또 말 타러 나가야하기 때문에 당연히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는다. 한편 저녁 식사 때는 아페로로 시작해 레드와인까지 Cheval Alsace의 알콜 무제한 라인업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곳에 한국인이 두번만 왔다갔다간 이 알콜 무한리필 서비스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나도 그들처럼 적당히 한두잔만 즐겨보기로 했다.




"봉주ㅎ! 저는 Marco입니다."


Cheval Alsace에서의 첫날 저녁, 포스가 남다른 아저씨 한분이 아페로 타임 중에 나타나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이곳의 사장님인 Marco였다. 약간 장발의 곱슬머리와 깊게 파인 브이넥 티셔츠 조합이 '프랑스인' 전형을 보는  했다. Marco 아저씨는 영어를 하나도 못하셨지만 90마리의 말을 데리고 있는 승마장 주인다운 넉살과 친화력으로 금새 저녁 테이블을 장악하셨다. 나와는 제대로  대화를 거의 나눌  없었으나 나는  식사 때마다 와인을 찾는 한국인으로서 Marco 아저씨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레드와인은  Marco 아저씨가 갖고 오셔서 "와인 마실 사람?"하고 물으셨는데, 나중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잔을 채워주시며 인자한 미소를 날리셨다. 공짜 술을 많이 마시는 손님이 사장 입장에선 그다지 반갑지 않을텐데 프랑스에서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  아는 사람' 범주에 들어가는  같았다.


알자스 승마학교에서 만난, 말을 사랑하는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사람들


외승 가이드인 Petrick 아저씨는 영어를 조금은 할줄 아셨지만 사실 레슨 받는 것도 아니고 말타고 트레킹하는데 필요한 단어는 많지 않았다. 심지어 불어로 말씀하셔도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어깨 뒤로 하고 뒤꿈치 내리세요"는 전 세계 어떤 언어로 하든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은 불어는 단연 "Aller!(가자!)"였다. 어딜가나 초보자들이 겪는 가장 큰 난관은 '말을 보내는 것'인지, Petrick 아저씨는 끊임없이 aller을 외쳐대셔야 했다.


Cheval Alsace에 온지 3일쯤 지난 어느 날, 오전 기승을 마치고 그날도 아페로 타임을 즐기러 식당으로 갔다. 그날은 Petrick 아저씨가 친절하게도 나의 와인을 직접 챙겨주셨다. 주방에서 와인을 따르고 있자 Marco 아저씨가 다가와 두분이서 불어로 뭐라뭐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셨다. 내가 알아들은건 단 한 단어, coréenne(한국인) 뿐이었지만, 두 아저씨의 표정을 보니 대충 무슨 대화를 하시는지 알고도 남았다.


"이거 니가 마시게?"

"아니, 손님 갖다주려고."

"아~ 그 한국인?"




Cheval Alsace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매 끼니마다 정성스럽게 준비돼 나오는 갖가지 신선한 음식들이었다. 나는 치즈에서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는걸 알자스에서 처음 알았다. 그 모든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요리사 아저씨가 있었는데, 음식 솜씨가 정말 기가 막히셨다. 이분 역시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셔서 처음에는 Maud가 음식에 대한 아저씨의 설명을 전부 다 통역해줬다. Maud가 언어천재이기도 했지만 말 하는걸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 진짜 다행이었다.


식사를 거의 다 마칠 때가 되면 요리사 아저씨가 다시 한번 등장해 "오늘의 디저트는~"이라고 시작되는 스피치를 시작하셨다. 프랑스인들에게 디저트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Maud의 딸은 밥먹다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다가도 디저트 먹고 가겠다며 끝까지 버티고 앉아 있곤 했다. "프랑스인들에게 식사를 대충 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게 Maud의 설명이었다.


알자스를 떠나올 때쯤 나는 프랑스의 디저트 이름 정도는 거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사실 원래 디저트 이름은 불어가 많긴 하지만) 실컷 말타고 맛있는 것 먹고 또 실컷 말타는 여행을 하는 데 언어의 장벽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전 17화 알자스 승마학교를 찾은 최초의 한국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