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케호(Backero)는 알자스 승마학교에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이 탔던 말이었다. 아이리쉬콥과 아이슬란딕의 교배종이라는 바케호는 전체적으로 검은털의 코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등 가운데와 한쪽 갈기 그리고 발목에 하얀털이 섞여 있는게 특징이었다. 처음에는 비슷한 무늬를 가진 말들이 많아서 구분하기가 어려웠지만 몇일 함께 하다보니 바케호의 무늬 뿐만 아니라 몸집이며 눈빛(?)도 알아보는 사이가 됐다.
예전에 웰시코기를 키우던 시절, 분양받았던 농장에서 가끔씩 정모를 했었다. 모인 강아지들이 모두 다 같은 종일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브리더가 번식시킨 아이들이다보니 외모가 더 비슷비슷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 똑같이 생긴 애들'이 단체로 뛰어다니는 장면이 연출되곤 했었다. 그럼에도 반려인들의 눈에는 작은 무늬 하나며 표정까지도 내 강아지만의 특징이 찰떡같이 보이기 마련이었다. 이렇듯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동물을 대하면 '종'으로 묶이지 않는 하나하나의 개성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두번째로 바케호를 타기로 한 날이었다. 그날은 Petrick 아저씨가 내가 탈 말을 방목장에서 직접 데리고 나와주셨다. '니가 어제 탔던 바케호'라며 나에게 말을 건네주셨지만 어쩐지 처음 봤을 때와 느낌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렇긴 해도 흰털과 검은털이 섞여 있고 무늬도 얼추 비슷해보여서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Petrick 아저씨가 데리고 나오신거니 내가 뭘 착각했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게 바로 내가 그날 한 첫번째 실수였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복대를 채우면서였다. 끙끙거리며 간신히 해냈던 전날과 달리 너무 쉽게 벨트가 올라갔다. 그런데도 나는 '복대 채우는 실력이 그새 늘었나?'라며 또 엄청난 착각만을 하고 있었다.
"신발이 안 맞는데? 이거 바케호꺼 맞아요? Are you sure?"
Petrick 아저씨가 신발 신기는 것을 도와주러 오셔서는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고 내게 물었다. 나는 분명 바케호의 이름과 번호가 써져 있는 고리에서 제대로 장비를 가져왔다고 확신했다. 바케호가 착용했던 재갈과 신발을 어제 그곳에 다시 걸어둔 것도 나였다. 나는 당연히 sure한다고 대답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아저씨들과 한참 이야기를 하다 돌아온 Petrick 아저씨는 아니나다를까 얘는 바케호가 아니라고 했다. 그제서야 그날 계속 엄습했던 이상한 느낌이 퍼즐이 맞춰지듯 다 설명되는 것 같았다. 바케호보다 몸집이 약간 작았고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무늬도 미묘하게 다른 그녀의 이름은 장고(Django)였다. 나이가 조금 어린데 괜찮겠냐는 Petrick 아저씨의 질문에 나는 무슨 배짱인지 좋다고 대답했다. 사실 바케호를 찾아 나와서 다시 처음부터 기승준비를 하는게 귀찮은 마음이 컸다.
보슬비가 간간이 온 탓에 외승길은 조금 질퍽거렸다. 나는 어제 탔던 말도 구분 못한 주제에 다른 초보자들보다 말타는 실력은 조금 낫다는 이유로 얼떨결에 선두에 서게 됐다. 내 뒤로 네덜란드 아주머니, 아저씨가 따라왔고 Petrick 아저씨는 맨 뒤에 자리를 잡았다.
말을 몇 번 안탄 참가자들이 많아서 거의 평보로만 다녔던 탓인지 나는 긴장을 많이 놓고 있었다. 유럽 사람들 사이에서도 내 기승 실력이 그렇게 부끄러운 수준은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 자만했던 것도 사실이다. 전날 탔던 바케호가 추진을 넣는대로 우직하게 가기도 잘 가고 예민하게 굴지도 않아서 내 실력에 약간 착시효과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장고는 달랐다.
그 일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다. 빗물에 약간 진흙탕이 된 길에서 장고는 발이 미끄러져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고, 나 역시 몸이 기울어지는 걸 느꼈다. 그때였다. 장고가 갑자기 움찔하며 놀라더니 옆으로 난 숲길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나는 장고가 놀라면서 몸을 푸드덕대던 순간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낙마였다.
낙마를 했을 때 주의사항은, 첫째도 둘째도 '고삐를 놓지 않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래야 나도 덜 다치고 말이 멀리 도망가는 걸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고삐는 생명줄이라는 표현까지 있을 정도다. 장고의 등에서 떨어지는 게 확정되는 순간부터 나는 필사적으로 고삐를 잡았다. 그런데 장고는 그러거나 말거나 고삐를 잡고 있는 나를 끌고 가면서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몇 미터를 장고에게 딸려 가던 나는 도저히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생각에 고삐를 놓아버리고 말았다.
놀란 Petrick 아저씨가 뒤쫓아 왔을 땐 이미 장고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후였다. 아저씨는 일단 내가 크게 다치지 않은 걸 확인하신 후부터는 장고의 행방을 걱정하기 시작하셨다. 나는 내가 고삐를 놓치지 않았으면 장고를 잃어버리지 않았을텐데 싶어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나의 낙마담을 들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순간에 고삐를 계속 잡고 있었어야 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지만, 어쨌거나 내가 고삐를 놓는 바람에 장고가 도망가버린건 사실이었다.
네덜란드 아주머니,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돌아오니 저 멀리 뒤에서 말 한마리가 보였다. 장고였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태연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네덜란드 아주머니는 알고 보니 의사였는데, 내가 가슴에 통증이 조금 있다고 하자 숨을 마시고 내뱉을 때 특별히 더 아프거나 어려운 게 아니라면 괜찮은 거라고 안심시켜주셨다. (사실 네덜란드는 죽기 직전이 아니면 수술도 잘 안하는 진료풍토(?)가 있다고 한다.)
그렇게 짧고도 길었던 낙마의 순간이 지나가고, 나는 다시 장고의 등에 올라 무사히 그날의 기승을 마쳤다.
이전까지 나의 낙마 이력은 총 세번이었다. 그 중에서 말이 잘못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전부다 내가 균형을 제대로 못 잡은 탓이었다. 이번에 장고가 갑자기 놀라면서 튀어 나갔던건 확실하지 않지만 토끼 같은 무언가를 봤기 때문이라고 다들 짐작했다. 바케호와 달리 경험이 많지 않아서 더 쉽게 놀랄 수 있다는 것도 이번 낙마의 이유라면 이유였다. 비 때문에 미끄러워진 길도 한몫했다.
그렇다고 이번 낙마가 장고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바케호가 아닌 장고를 데리고 나온 Petrick 아저씨의 잘못일까? 아니다. 따지자면 다른 말을 데리고 나온 Petrick 아저씨보다 어제 탔던 말을 못알아본 내 잘못이 더 컸다. 자신이 없으면 나는 장고를 타지 말았어야 했고, 선두에 서지 않았어야 했다.
한 평생 말을 타신 독일인 아주머니가 나의 낙마 스토리를 듣고선 한마디로 정리해주셨다.
"그것도 승마의 일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