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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Aug 26. 2022

말을 사랑한다면, 제주로 옵서예

늦여름 밤의 제주공항은 꽤 선선했다. 그리고 택시승강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아마도 제주도가 미어터졌을 지난 광복절 연휴를 피해 금요일 하루 휴가를 내고 자체적으로 연휴를 만들어 온 사람들일 것 같았다. 목요일 저녁, 퇴근 후 저녁비행기를 타면 제주도에서의 아름다운 휴가 3박4일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가 굳이 목요일 저녁 비행기로 제주도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새벽 5시, 해뜨는 시간에 맞춰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섭지코지로 승마트래킹을 가기 위해서였다.


육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재충전시켜주는 섬 제주도는 승마인들이라면 더 특별하게 느껴질 곳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말을 타기 좋은 곳, 인 정도가 아니라 외국의 어느 외승지와 비교해도 꿀릴 것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동호회 팀장님은 잊을만하면 한번씩 제주도에 가셨다. 어디서 뭐하고 계시나 하고 보면 제주도였고 그만큼 아는 승마장도, 교관도 많으셨다. 팀장님은 정보망을 풀 가동시켜 이번 섭지코지 일출승마를 계획해주셨는데, 날씨와 물때와 해뜨는 시간 등등을 고려했을 때 가능한 날이 딱 그 주의 금요일 새벽뿐이었던 것이다.




동호회 팀장님과 다른 회원 한분은 일찌감치 제주도에 도착해 숙소 근처 횟집에서 소주를 까고 계셨다. 내가 제주공항에 내렸을 땐 이미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딱 10시까지만 웰컴파티를 한다는 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숙소에 짐도 풀지 않고 캐리어를 끈 채로 제주시내의 한 횟집으로 향했다.


이번 외승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6번의 외승이 계획돼 있었고, 동호회 사람들 10명이 참여했다. 모두가 6번을 다 탄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매 타임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했다. 외국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결코 편하다고 할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하며 (그러다보면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기도 했다) 말을 타다가 한국에서, 한국 말을 타고, 한국 사람들과 왁자지껄 함께 달리니 마음도 더 편하고 즐거웠다.


아페로 때마다 어김없이 와인을 찾아 알자스 승마학교 아저씨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은 나였지만, 한국에서 나는 길가다 흔히 볼 수 있는 애주가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특히나 동호회 사람들은 뭐든 적당히 하는 법이 없었다. 말도 다리 안쪽이 다 까질 때까지 타고, 술도 끝장날 때까지 마셨다. 그래도 기승 전에는 전날 밤 음주의 숙취가 남아 있을지언정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 진정성을 보여줬다.


프리런 사람들과 함께 한 섭지코지 일출승마


잠도 술도   상태로 새벽의 섭지코지에 도착하니 우리가  말들을 태운 수송차가  있었다. 이번 제주도 외승에서  말은 전부  한라마였다. 제주마의 지구력과 더러브렛의 스피드를 가지고 있다는 설명 그대로, 한라마들은 구보에 미친(?) 우리를 태우고 정말 신나게도 달려줬다. 더러브렛 같이 키크고 늘씬한 유럽 품종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지만 나는 우직하고  사이즈에도  어울리는 한라마가 좋았다.


이번에 탔던 말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아이는 '사랑이'라는, 정말 사랑스러운 성격과 이름을 가진 말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사람을 좋아하고 순해서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사랑이는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아기가 연상되는 이름과 달리 달릴 때만큼은 상남자였다. 나는 사랑이와 함께 제주도 초원을 척후병 마냥 질주했다. 교관님이 찍어주신 영상을 본 아버지는 이렇게 소감을 남기셨다.


"이젠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해도 되겠구먼."


사랑스런 사랑이와 나




우리나라 생활승마 문화는 분명 외국에 비해 뒤처져 있다. 승마장 개수나 규모도 딸리고 외승을 갈 수 있는 곳도 제한적이다. 승마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선입견 혹은 오해는 아직도 만리장성만큼이나 견고하며 동물권에 대한 인식도 여전히 낮다.


그럼에도 제주도는 승마 선진국이라는 유럽, 미국의 사람들에게도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외승지였다. 베르사이유의 초지 못지 않게 제주도 해변은 구보의 천국이었고, 알자스 언덕만큼이나 제주 오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경이로웠다. 무엇보다 프랑스에서 많이 탔던 콥(cob) 종류의 말들에게는 없는 매력이 한라마에게는 있었다. 알자스에서 일주일동안 내 말 남친이었던 바케호에게는 미안하지만, 외모는 한라마들이 훨씬 잘생기고 귀여웠다!


제주도 곳곳에서 보이는 방목장에는 한라마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승마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습정도로만 여겼지만 이제는 달라보였다. 말을 사랑하는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졌고 그만큼 말들은 더 행복해보였다. 이렇게 말과 함께 살아갈 줄 아는 제주도 같은 환경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길줄 알았지만 턱없이 짧았던 제주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분명 먹기도 많이 먹었는데 부쩍 홀쭉해진 배와 몸 곳곳에 은근하게 남아 있는 근육통이 이 단꿈의 여운에 조금 더 젖어있을 수 있게 해줬다. 교관님이 찍어주신 영상을 무한 반복으로 되돌려보면서 지난 1년 간 내 삶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새삼 떠올렸다.


사실 조금 두렵기도 하다. 남들이 잘 안하는 전공을 하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면서 원래도 제멋대로(?) 살았지만, 이렇게 승마에 미쳐 있어도 되는 걸까 싶다. 그 시간에 논문을 한편 더 쓰는 게 불투명한 미래를 조금이나마 투명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건 아닌지 불안하다.


내가 상담하는 학생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생각해봤다. 그랬더니 답은 명확했다. 그만큼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라면 일단 계속 해보라고. 그러면서 잡스 아저씨가 스탠포드 졸업식에서 연설하셨던 내용을 말해줄 것이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 10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물론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그 점들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알기 어려웠지만, 10년 후에 뒤돌아보니 아주, 아주 분명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하면서 점을 이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뒤돌아봤을 때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이 점들이 미래에 언젠가 연결될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이런 번민을 반복하겠지만 같은 결론이 내려지는한 나는 계속 말을 탈 것이다. 언젠가는 이 점들이 하나로 이어질 것이라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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