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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Oct 15. 2022

말이 말을 안 듣는 이유


새로 가게 된 승마장은 서울 도심에서 좀 많이 떨어진, 한적한 지역에 있었다. 이 승마장의 트레이드마크는 거대한 유리돔으로 된 실내마장이었다. 촘촘하게 그물처럼 짜여진 유리창 사이로 햇빛이 은은하게 쏟아져 들어와 사진을 찍으면 그림이 꽤 괜찮게 나왔다. 그래서 드라마나 뮤직비디오 촬영도 종종 있다는 모양이었다. 때문에 가끔 기승 예약을 하려고 하면 그때는 대회가 잡혀 있어서 안된다느니, 하루종일 촬영이 있어서 안된다느니 할 때가 생각보다 자주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이 정도 금액에 이런 환경에서 말을 탈 수 있는 가성비가 나올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바로 납득을 당했다. 


한여름에는 실내마장의 온실효과(?) 때문에 차라리 바깥이 더 시원하다는 교관님의 이야기는 머지 않아 온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푸릇푸릇한 잔디밭으로 된 야외마장에는 승마 경기에서나 보던 장애물들이 여러 종류씩 놓여 있었고 근처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어딘가 낯선 타지에 와있다는 기분을 내게 했다. 실제로 이 승마장 바로 옆은 바다였다. 그렇다고 말을 타면서 바다가 보이는건 아니었으나 그냥 바다가 느껴진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 연예인은 혼자 승마연습을 하고 혼자 조개구이를 먹으러 가는 극강의 혼삶을 보여주었지만 나는 차마 나홀로 조개구이를 먹으러 갈 용기까지는 없었다.




"네? 뭐라구요??"

"평보 하시라구요~~!!"


마장이 너무 큰탓에 교관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잘 안들려서 이렇게 서로 두번씩 묻고 대답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곳은 교관님 한분이 딱 나 한사람만 봐주시는 개인레슨 시스템이었는데, 그래서 무선 헤드셋 같은걸 끼고 레슨을 하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넓은 마장에서 집중적으로 레슨을 받으려면 필수일 것 같았지만 내 담당 교관님은 별로 즐겨쓰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교관님의 잔소리는 끊임없이 실시간으로 이어졌다. 한쪽 어깨가 올라갔으니 내려라, 허리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둬라, 다리도 좀 제발 가만히 둬라, 무릎에 힘빼라, 고삐 연결 더 해라 등등, 내 자세에 이렇게까지 많은 문제점이 있는 줄 미처 몰랐었다. 마장 한바퀴를 도는 별로 길지도 않은 시간동안 나는 쏟아지는 교관님의 디렉션을 수행하기 위해 수능 준비하던 시절만큼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교관님은 하나를 고치면 다른 하나가 또 망가지는 오래된 가전제품 마냥 말을 타는 나를 인내심 있게 혼내셨다. 같은 지적을 두번 세번 하실 때면 욕만 안하셨지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려 애쓰시는 게 느껴졌다. 안되면 다시. 그래도 안되면 또 다시. 될 때까지 그냥 계속 다시. 그러다보면 말이 짜증을 내기도 해서 나는 교관님 눈치에 이어 말 눈치까지 봐야 했지만, 그렇게 씨름을 하다보면 안되던게 갑자기 되는 기적이 일어나곤 했다.


너무 멋있는 실내마장과 너무 멀리 계신 교관님


원래 다니던 승마장에서 첫 기승 때 고삐 잡는 것부터 가르쳐주셨던 교관님이 다른 곳으로 이직하게 됐다며 마지막 레슨을 해주시던 날이었다. 나는 방향 전환이 잘 안돼서 한창 고생하던 때였는데, 떠나시기 전에 이거 하나만큼은 고쳐놓고 가겠다는 심정이셨는지 유독 다른 날보다 잔소리를 퍼부으셨다. 그날 같은 시간에 말을 타는 다른 회원이 한 명 더 있었지만 교관님 관심의 90%가 나에게 쏟아지는 영광(?)을 누렸다.


그날 결국 나는 정말 그때까지 죽어라고 안되던 방향 전환의 슬럼프에서 벗어났다. 실력을 키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욕을 먹는 것이라고 했던 동호회 코치님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운동이 그럴테지만, 승마는 특히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잘 타고 또 빨리 실력이 는다고들 이야기한다. 어른이 가지고 있는 '힘'보다 아이들의 '유연함'이 더 필요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남의 말을 참 안 듣는다. 나는 어릴때도 나 잘난 맛에 사느라 내가 아는 것과 내가 이해하는 것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걸 잘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 한 것 같다. 운동할 때도 마찬가지다. 단지 이해력이 부족하거나 운동신경이 안 좋은 게 문제일땐 욕을 먹으면(?) 대체로 해결이 된다. 하지만 고집 때문에 잘못된 버릇, 잘못된 자세를 못 고치는 것이라면 그건 약도 없다. 몇십만원짜리 레슨을 받아도 무용지물이다.


그런 고집불통 기승자들을 대처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좋은 말을 타면 해결된다'며 자마를 사게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을 마주의 나쁜 습관에 맞도록 훈련시킨다는 것이다. 그럼 그 고집불통 기승자는 갑자기 자신의 뜻대로 잘 움직여지는 말을 타면서 '역시 좋은 말을 타야 된다'는 명제를 본인의 착각과 오만함을 밑거름으로 완성하게 된다.


사실 내가 지금 마음대로 말이 안 타지는 원인이 내가 아니라 말에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좀 풀어진다. 가끔 나도 방향 전환이 잘 안되거나 원하는 방향의 구보가 잘 나오지 않을 때(*구보는 말이 어느쪽 앞다리를 더 앞에 내딛느냐에 따라 좌구보 또는 우구보로 구분된다. 오른쪽 방향으로 돌때는 우구보, 왼쪽 방향으로 돌때는 좌구보로 가는 것이 정석이다.) '그 말이 원래 좀 그게 잘 안된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게 그렇게 큰 위로가 된다. 인간의 알량함이란 정말 어쩔 수 없다.


그런 정도를 넘어서 어느날 교관님이 자신에게 '말을 한 마리 사라'고 하신다면 그만큼 본인만의 세상에 갇혀 고집을 부리고 있는건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보길 바란다.




아무리 시간과 돈을 들여도 안되는 건 정말 끝까지 안되곤 했고, 심지어 어떤 날은 실내마장에 처음 나갔던 날처럼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럴때면 괜히 말에게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건 말 입장에서도 짜증스러운 상황인건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지금 내 등에 타고 있는 이 인간은 나에게 바라는 게 뭘까.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도 모르겠고 힘들고 귀찮으니까 그냥 무시하자.' 


대략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박차를 넣든 채찍을 때리든 아랑곳않고 자유로운 영혼마냥 묵묵히 평보만 하는 말은 그나마 착한 말이었다. 방향 전환은 이제 어느 정도 잘 하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은 말이 정말 고집스럽게도 장애물이 있는 쪽으로 안가려고 버텼다. 억지로 억지로 두어번은 성공했지만 실패하는 횟수가 더 많았고, 말은 짜증을 부리다 결국은 두발로 일어서는 땡깡(?)까지 보여주며 불만을 표출했다.


겁이 많은 동물인 말이 높은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은 그만큼 기승자를 믿기 때문이다 (출처: 프리런)


겁이 많은 동물인 말이 높은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은 그만큼 기승자를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이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은 아직 그만큼 내가 말에게 믿음을 주지 못해서다. 왕초보 때 탔던 말들은 주로 나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는 베테랑 말이었지만, 이제는 말에게 내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소통하면서 함께 움직임을 만들어가야하는 단계였다.


승마는 말과 내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운동이다. 아무 말이나 잘 타고 싶다는 나의 목표는 말 탓을 해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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