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목표가 어떻게 되세요?"
승마를 시작하고 세 명의 교관님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냥 취미로 타는건데 왜 그런걸 묻는지 의아했지만 세번을 연달아 같은 질문을 받으니 이건 승마계의 FAQ인가 싶었다. 내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면 객관식 보기를 몇 가지 주시곤 했다. 마장마술이냐 장애물이냐가 대표적인 선택지였지만 올림픽 나갈 것도 아닌데 그런게 목표가 될 수 있는건지 그닥 와닿지가 않았다.
이런 질문을 자꾸 하는 이유는 내가 얼마나 꾸준히 말을 타러 올 사람인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모든 스포츠가 다 그렇겠지만 목표가 있어야 그만큼, 그리고 딱 그만큼의 동기부여가 된다. 내 주변에서만 봐도 외승가서 적당히 구보를 할 수 있는 정도가 되면 만족하는 사람도 있고, 자격증이나 생활체육대회를 목표로 개인레슨까지 받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어디까지 말을 타고 싶은 걸까. 반복되는 질문에 한번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게 됐다.
승마를 시작하고 처음 몇달은 '외승'이 동기부여의 엄청난 밑천이었다. 파리여행에서 외승을 가기 위해 승마장 문턱이 닳도록 다녔으니 말이다. 외승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최종목표'의 흔한 선택지 중 하나이기도 했다. 마장을 벗어나 자연 속을 말과 함께 달리는 것은 승린이 시절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아름다운 그림이지 않았던가.
외승을 다녀오면 자세가 무너진다고들 했다. 외승 후에는 승마장에서 다시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게 승마인들 사이의 불문율이다. 나 역시 아닐줄 알았는데 외승 갔다오더니 예쁜 자세 다 베려놨다며(?) 폭풍 잔소리를 들었다. 승마장에 사람이 별로 없는 야간타임에 갔을 때는 원형마장에서 다시 자세 수정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기승횟수가 쌓여 속보든 구보든 조금씩 더 편안하게 말을 탈 수 있게 되면 다음번 외승 때는 더 빠르게, 신나게 즐기는 레벨업의 쾌감이 있었다.
그렇다면 외승의 최종목표란 대체 무엇일까. 전 세계 외승코스를 모두 다 정복하는 것일까. 웜블러드(*말을 특성이나 기질을 기준으로 구분했을 때 운동능력은 뛰어나고 성격은 온순한 종으로 '최고의 승용마'라고 불리지만 반동이 큰 편이라 초보자들은 타기 어렵다고들 한다)를 타고 남부 프랑스의 라벤더밭을 다녀오면,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보고 나면, 남미의 마추픽추 유적지 탐험을 하고 오면, 그러고나면 나는 과연 만족을 하게 될까. 그럴려면 말 타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돈을 모으느라 투잡, 쓰리잡을 해야 할 판이었다.
나에게 외승은 최종목표가 아니라 그냥 승마의 영원한,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즐거움이었다. 다람쥐 쳇바퀴에서 벗어나 '오늘 하루'에 대해 무수한 설렘을 느끼게 하는 것. 오늘은 어떤 말을 타게 될까, 오늘 같은 날씨에는 어떤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오늘은 또 누가 낙마를 할까(?), 늘 똑같은 것 같지만 매번 새로운 경험이 펼쳐지기에 또 다른 기대를 하고 말에 오르게 하는 것. 그게 외승이었다.
승마를 시작하고 얼마 안돼 찾아온 겨울시즌, 아침 8시 타임에 승마장을 가면 사람이 별로 없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나 혼자 뿐이어서 그런지 감독님이 어느날부터 또 다른 FAQ를 묻기 시작하셨다.
"어떤 말 타고 싶어요?"
나에게 이건 정말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승마장의 여론을 가만보면 반동이 약하고 가자는 대로 잘 가는 모범생 말들이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어떤 말을 배정받든 교관님한테 혼나는 건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말이 모범생이냐 아니냐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 물어보시니 "지금 제일 덜 피곤한 말(?) 주세요"라고 한 적도 있다.
그러다 6개월쯤 됐을 때부터 한동안 실력이 도통 늘지 않는 정체기를 겪었다. 방향전환도 안되고, 추진(*말을 앞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원래도 잘 안됐지만 계속 잘 안되고, 외승을 자주 가다보니 자세도 안 좋아지고, 구보 사인은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러다보니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꾸 남의 탓, 말의 탓을 하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저 사람이 앞에 있는 바람에 방향 전환이 안됐잖아.'
'저 사람이 타고 있는 말이 구보가 잘 되는데. 나도 저 말 타고 싶다.'
하지만 그건 다 착각이었다. 저 사람이 앞에 있어서, 내가 탄 말이 구보를 못해서 안되는게 아니라 그냥 내가 못하는 거였다. 물론 혼자 마장을 전세내고 타거나 모범생 말을 타면 안되던게 갑자기 잘되기도 한다. 한번은 모범생 말에다가 승마장에서 제일 좋은 안장을 얹고 교관님이 한 타임 타신(*가끔 내가 너무 못타면 교관님들이 대신 말에 올라 한참을 타고 주실 때가 있는데, 그러고나면 말이 한결 정돈된 상태가 된다.)말을 받은 적이 있다. 그날은 시도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기적을 볼 수 있었지만 당연히도 그건 결코 내 실력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종목표'를 이렇게 정하기로 했다. 말 투정 하지 않고 아무 말이나 잘 타는 것, 저 사람이 탔을 때 잘 안 가던 말도 내가 타면 잘 가게 하는 것.
거창하게 목표를 세우긴 했는데, 계속되는 정체기에 답답함이 밀려온 나머지 그렇게나 좋아하고 열심히하던 승마에 흥미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또 자존심이 상해서 오기인지 집착인지 모를 상태가 이어지던 어느날, 직장일 때문에 가게 됐던 어느 지역에서 새로운 승마장을 알게 됐다. 예전에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모 연예인이 사극 촬영을 위해 승마 연습을 한다고 했던 그 승마장이었다. 승마장 환경이나 말 탓은 안하기로 했지만 조금 변화를 준다면 이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는 또 적토마와 같은 추진력으로 기승예약을 했다. 그리고 가격이 너무 미치게 비싸지 않다면 개인레슨을 받자고 생각했다.
아니나다를까, 이 승마장에서 만난 코치님도 똑같은 질문을 하셨다. 최종목표가 뭐냐고. 나는 내 진짜 최종목표는 나만의 소중한 비밀로 일단 아껴두고 이곳에서의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장애물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