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의 문화 유전자」
이 책은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 중 「젓가락의 문화 유전자」이다.
표지에 “우리의 가장 오래된 미래, 젓가락 그 안에 담긴 한국인의 유전자 암호를 해독하고 세계와 미래로 나가는 거대한 문명론을 탐사한다.”라고 되어있다.
책의 소재는 젓가락이다. 동양 3국 한국, 중국, 일본 젓가락에 관한 분석과 유래, 그에 따른 문화를 비교 분석한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식사 도구는 우리의 손만큼이나 친숙하다. 우리는 거의 무의식중에 숟가락과 젓가락,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 숟가락과 젓가락, 또 포크와 나이프는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어떤 과정으로 만들었을까. 본질적인 기능은 똑같은데 왜 문화권에 따라 모양이 전혀 다른 도구를 쓰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어떤 획일적인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것인가?
서양에서 사용하는 포크 나이프의 발전을 동양에서 젓가락이 발달한 과정과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가?
형태가 기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메커니즘이 도구의 형태를 결정하는가?
중국이든 일본이든 먹을 것을 옮기는 식 도구의 이름이 직접 인체와 연결 되어있는 것은 한국뿐이다. 손가락에서 젓가락이란 말이, 숟가락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손가락과 연결된 젓가락, 숟가락은 바로 내 몸의 피와 신경이 통하는 아바타인 것이다.
사람과 도구 사이만이 아니다. 저희끼리도 가락이라는 돌림자로 형제처럼 짝을 만들어 수저가 된다. 숟가락은 음으로 국물을 떠먹고, 젓가락은 양으로 그 속에 있는 건더기를 집는다. 주역의 괘는 젓가락이 되고, 태극의 원은 숟가락의 동그라미가 된다. 머리에서 갈라진 것이 머리카락이고, 발에서 갈라진 것이 발가락이다. 온몸에서 갈라진 그 가락이 장단을 맞추면 노랫가락이 되고 신 가락이 된다. 한국의 독특한 가락 문화, 짝 문화가 탄생하는 것이다.
젓가락만 보면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한국은 젓가락만 쓰지 않고 숟가락과 나란히 하나의 짝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들과는 다른 독특한 수저 문화를 낳았다. 수저란 숟가락, 젓가락을 하나로 합친 개념에서 생긴 독립된 말이다.
음식을 조리하거나 저장할 때 부수적으로 생성되는 국물은 정보이론에 대입해 보면 ‘노이즈(잡음)’과 같은 것이다. 한국 음식은 이 노이즈 같은 국물을 그냥 놔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음식 문화다. 노이즈를 막거나 제거하여 필요한 요소만을 남겨두려는 투명한 문화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대개 북은 가죽만 친다. 그것도 가운데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거기만 친다. 그런데 우리는 변두리, 변죽을 때린다. 그게 노이즈다. 북소리와는 다른 잡음이다. 일부러 옆을 때려서 변죽을 울리는 거다. 본음에 변죽을 때리는 음을 끌어들여 소리를 혼탁하게 만든다. 즉 잡음을 끌어들이는 거다. 이런 걸 인클루시브 문화라고 그런다. 그리고 불필요한 것을 도려내는 것을 익스클루시브 문화라고 한다.
사슴이 물 먹을 때는 뿔처럼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것이 없고, 가냘픈 다리만큼 볼품없는 게 없다. 그런데 포수를 피해 도망갈 때는 그 볼품없다고 생각한 다리가 자기를 살려주고, 아름답고 자랑스러웠던 뿔이 가지에 걸려 목숨을 잃게 한다. 문화는 그런 것이다. 어느 상황에서는 나쁠 수도, 어느 상황에서는 좋을 수도 있는 상대성이 있다.
우리 문화도 어떤 상황에서는 마이너스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플러스가 된다. 좋은 건 지키고 버릴 건 버리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살다 보면 안 쓴다고 처박아 두었거나 버린 물건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물건이 되는 경우가 있다.
자연은 자연을 거역하는 자에게 훈장을 달아줬다. 새는 중력을 거슬러 하늘을 날고, 도마뱀은 미끄러운 비탈 벽 위에 달라붙는다. 자연에 덮어놓고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연의 질서에 거스르는 생명의 역학, 그렇게 자연을 거슬러 맞서는 인간의 손에 젓가락이 들려 있다.
음식 앞에서 참고, 불 앞에서 뜨거움을 견디는 인내심 없이는 꺾을 생각을 못 한다. 인간의 화식, 불에 구워 먹는 것도 사실은 참을성에서 나왔다고 한다. 짐승들은 잡으면 그 자리에서 먹는다. 송곳니로 찢고 잘라 삼킨다. 그게 생식이다. 그런데 그것을 불에 구워 먹는 거다. 딱딱해서 먹을 수 없거나 날것으로 먹기 어려운 것은 식욕을 참으며 불로 굽는 방법을 생각한다. 짐승들에게는 이 식욕 앞에서 참는 법이 없다. 인간의 요리는 짐승이 먹이를 잡아서 그 자리에서 먹는 것과 아주 대립하는 것이다.
요리는 참는 것이다. 불로 익을 때까지 절대적인 참음의 시간이 필요하다. 요리하는 사람이 식욕을 참는 건 물론이고, 보는 사람도 불가에 둘러앉아 참고 견디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서 가족이 생겨났다고 한다.
인간이 손에는 1㎠ 당 1,000여 개에 이르는 신경종말이 분포돼 있고, 그 대부분은 손가락 끝에 몰려 있다. 그래서 시력을 잃은 맹인은 손가락 끝으로 점자책과 도로의 점자 표지판을 읽을 수 있다.
해부학적으로도 손은 인체에서 가장 복잡하다. 한쪽 손을 이루는 뼈는 무려 27개로 양손을 합하면 54개나 된다. 인체의 뼈 206개 중 4분의 1이 넘는 뼈가 손에 있는 것이다. 뼈가 많으니 당연히 관절도 많고, 그 관절을 움직이는 근육 또한 세분화 되어서 손은 다양하고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벼농사 발생의 기원설은 인도와 중국,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서 다퉈왔다. 그러나 양쯔강 기원설과 갠지스강 기원설은 마이클 프루개넌을 비롯한 학자들의 연구로 양쯔강 기원으로 결판이 났고, 자포니카 종과 인디카 종로 나뉜 시기도 함께 밝혀졌다. 그런데 무려 17,000년 전이 볍씨가 인도도 중국도 아니니 한국 청주 소로리에서 발굴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한국에서 나오니, 지금까지 쌀의 기원을 둘러싼 통설은 완전히 뒤집혔다.
가부장제인 중국에서 노인은 가정의 핵심이고, 노인공경문화는 가부장제의 근간이다. 유교 경전에서는 반복해서 70세 노인은 무육불포(고기가 없으면 배가 부르지 않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 집안 식구들이 함께 식사할 때는 당연히 건더기를 건져서 노인에게 먹게 한다.
피부색에 따라 백인종(코카소이드), 흑인종(니그로이드), 황인종(몽골로이드)으로 나눈다. 우리는 황인종, 몽골로이드에 속한다. 노란 얼굴빛에 검은 머리, 작고 가로로 찢어진 눈, 낮은 코, 이런 특징은 생물학적 유전자인 DNA의 영향이다.
밈은 ‘흉내 낸다’는 뜻의 그리스어 ‘mimema’에서 나온 ‘mimeme’을, 유전자를 뜻하는 진과 유사한 한 음절의 단어로 만든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문화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용어다. 도킨스는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문화의 진화에도 유전자와 같은 복제 단위가 있을 거라는 가설을 세우고 지성과 지성 사이에 전달되는 문화정보의 복제자를 밈이라고 불렀다. 멜로디, 사상, 표어, 의복의 양식, 제조 기술, 건축법, 헤어스타일, 유행 같은 것들이 모두 밈이다.
식탁은 세상의 작은 축소판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밥 먹는 행위를 통해서, 내 부모에게 인간 됨의 가르침을 받는 훌륭한 교육의 장이다. 젓가락질 못 하는 아이들은 그 부모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젓가락질은 단순히 먹을 것을 옮기는 기술이 아니라, 거기에 얽힌 예법과 마음가짐이 한데 어우러진 행위다. 가족 구성원의 배려, 윗사람의 자애, 아랫사람의 공경, 이런 모든 것이 젓가락질을 통해 표현된다
위기는 기회와 깊은 관계가 있다. 위기危機 한자를 보면 글자 자체에 위험과 기회가 동시에 존재한다. 희랍어의 ‘위기’는 ‘선택’을 의미한다. 죽느냐 사느냐의 경계선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위험에 빠질 수도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물物’ 하나만으로는 ‘사事’를 모른다. 박물관에 가보라. 용도를 짐작조차 못 하는 과거의 ‘물’들인 출토품이 좀 많은가? 반대로 ‘사’만으로도 ‘물’을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나무토막은 ‘물’이다. .그걸 부지깽이로 활용, 사용한다. 이 때의 쓸 ‘용’ 자 이게 소프트웨어다.
젓가락질 못 하는 아이가 많아지는 건 이 삭막해진 식탁과도 무관하지 않다. 부모가 자녀에게 문화를 학습시키고 전달하기는커녕, 컴퓨터나 스마트폰 때문에 반대로 아이들이 어른을 가르치는 세상되었다. 걸핏하면 “엄만 그것도 몰라?” 하며 무시당하기 일쑤다. 이런 문화에서라면, 과연 어떻게 부모한테서 전해지는 문화유전자가 올바로 계승될 수 있겠는가.
한옥이 양옥 되고, 한복이 양복 된 지 이미 오래다. 심지어 반세기 전만 해도 빨래할 때 쓰던 잿물 대신 서양의 화공약품이 들어오자, ‘양’ 자를 붙여서 양잿물이라고 했다. 그렇듯이 언젠가는 젓가락도 서양의 것에 자리를 내주게 될지 모른다. 수천 년을 이어 내려온 우리의 문화유전자인 젓가락.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일깨워 주는 그 젓가락을 살리기 위해, 이제라도 캠페인을 벌이고 문화유전자를 찾아가는 일에 나서야겠다.
책 소개
『너는 누구니』 이어령. 2022.03.23. (주)파람북. 325쪽. 18,000원.
이어령.(1934.01.15.~2022.02.26.)
충남 온양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석좌교수,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 역임. 《조선일보》 등 여러 신문 논설위원으로 활약. 서울올림픽 개폐회식과 식전 문화행사, 대전엑스포의 문화행사 리사이클관을 주도, 초대 문화부 장관. 저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