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머리에 “그녀는 더 숨이 찼고 더 빨리 헉헉거렸다. 사람들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점점 더 자주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날이면 날마다, 온 사방의 젊은이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나이를 먹었을 뿐이다. 그 여름에 그녀는 노인이 되었다.”로 시작한다.
작가는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하고 엄마가 재혼한 미국인 새 아빠를 따라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성장하며 1960~70년대 히피 문화와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했다. 기성 제도와 세대에 반항으로 일관된 젊은 날을 보냈다. 그녀는 늙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노인이 되었다.
그해 여름 요가 수업을 받다가 늘 해오던 아사나 동작이 점점 더 어려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몸의 균형을 잡는 일이 하나의 도전이 되었다. 두 다리아 등은 예전보다 덜 유연했고, 금세 숨이 가빠졌다. 어느 날, 안과의사는 백내장 수술 진단을 내렸다. ‘백내장이라니! 완전 노인 질환이잖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진단을 받고 나니, 내 눈엔 젊은이들만 보였다. 어디를 가도 내가 제일 연장자였다.
지금까지 전혀 해보지 않은, 이제 노화라는 인생의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는 낯선 생각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몸이 단언하듯 명백한 사실을 들이밀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노화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늘 신체적, 심리적 난관을 성공적으로 극복해 왔다고 자부했으며,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준 독립심과 자유로운 정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요즘 들어 상태가 정말로 걱정스러워지고 있다. 가령 외출하면서 문에 열쇠를 꽂아두는 일이 잦아졌다던가 배낭이 어디 있는지 한참을 정신 없이 찾다가 등에 메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식이다! 날짜를 틀리는가 하면 약속을 잊는 일도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나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할 영화를 신이 나서 추천하려는 순간, 그토록 감탄해 마지않았던 책이며 영화의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늙는다는 두려움, 병드는 데 대한 두려움. 어울리지 않는 이들과 동행하느니 차라리 홀로 고독한 편이 더 좋다고 큰소리치던 나였는데, 독신으로 남지 않으려 정서적 타협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우습게 알던 나였는데, 그런 내가 이제는 고독이 두렵다.
약하고 닳아버린 나. 앞으로 다가올 세월에 불안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 세월이 나에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위협적인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토록 믿고 있던 나 자신에게 이보다 더 큰 수모란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 몰라보게 된 몸과 세상 앞에서 점점 더 자기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겁 많은 노파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늙어버린 그 여름 이후, 온갖 후회가 나를 엄습했다. 너무도 거세고 강력해서 그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마다 매번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예전 같으면 후회라곤 하지 않았고, 우는 법이라곤 절대 없었는데. 예를 들어, 나에겐 자식이 없다. 나는 그 사실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식들로 행복해하고 그 자식들과 그 자식들의 자식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몇몇 친구를 볼 때가 있다. 그 친구들은 자식과 손주들이 자신에게 새로운 인내심을 불러일으키며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고 말하곤 했는데, 때론 난 그 친구들이 부러웠다.
은퇴한 직후부터 나는 젊은 사람들에게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되어버렸음을 깨달았다. 그 전이라면, 적어도 소소한 일화나 유용한 정보 정도는 제공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의 경험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음을 깨달았다. 내가 간직한 기억, 내가 감행한 모험들은 젊은이들을 매료시키지 못한다.
우리의 마모와 이 세상의 진행은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 신기술의 출현으로 우리가 제기하게 되는 질문들은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별다른 생각 없이 이 신기술들을 사용하게 되는 가운데 저절로 차례차례 소멸된다. 컴퓨터나 디지털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전화기나 세탁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점점 사라져간다.
신기술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나이 든 사람들은, 나 처럼 이 새로운 세상의 밖으로 추방당하며, 유행에 뒤떨어진 모든 것의 운명이 그러하듯 자취를 감추도록 종용받는다. 디지털 시대, 각종 알고리즘, 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 체계, 밖으로 거칠게 표출되는 증오, 대중영합주의, 우리 스스로 파괴해가는 지구,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모든 현상의 가속화 등, 나는 인생의 막바지에 접어들어 이 사회, 우리가 이미 한 발은 들여놓은 이 미래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여생을 보내게 될까봐 두렵다.
늙어가면서 사람들은 뚱뚱해지거나 마르거나 둘 중 하나인 듯하다. 나는 후자 쪽이다. 평생 체중이 불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쓴 난데, 이렇게 아무런 노력 없이도 마른 몸이 될 수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축 처진 팔뚝 피부 탓에 뼈와 가죽만 남은 사람 같아 보인다. 난 예쁜 축에 드는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탄탄하고 유연한 근육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근육 손실을 막겠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물컹하기만 하다.
어느 날인가는 손가락에 새로 장만한 반지를 끼고 감탄해 마지않았는데, 다음 날이 되자 손등에 군데군데 피어난 검버섯과 퇴행성관절염으로 뒤틀어지기 시작한 손가락만 눈에 들어왔다. 늙는다는 건 결국 이런 걸까?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남자들이나 젊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 투명 인간이 되었음을 인정해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스스로를 숨김으로써, 자신의 몸과 주름을 감춤으로써, 이 보이지 않음이라는 특성을 한층 더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늙음인 걸까?
나는 그 여름에 갑작스럽게 늙음을 보았다. 제일 먼저 나 자신의 늙음을. 그리고 주변 곳곳에 널려있는 다른 사람들의 늙음을.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판단 따위의 노예가 되지는 않겠다고 다짐해 왔다. 젊었을 땐 사회가 강요하는 명령 같은 건 거부하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런데 이제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지난 몇 해 전부터인가 나는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크게 실망하는 중이다.
스무 살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서른이 되자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마흔이 넘자 청소년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 커플의 어려움 등을 화제에 올렸고, 쉰 줄에 들어서자 리프팅을, 예순이 되면서는 퇴직과 각종 계획(여행, 자원봉사, 요가 등)이 수다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죽음, 나에게 현실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죽음이 내가 늙은이가 되어버린 그 여름 이후 줄곧 나를 따라다닌다. 나는 자살을 생각한다. 그것이 적어도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자살은 말하자면 하나의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고.
책을 읽으면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늙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다만 그 늙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작가이자 학자.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미국으로 이민, 두 개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성장했다. 브라운대학, 웰즐리대학, 하버드대학. MIT에서 프랑스 문학과 여성 문학, 이중 언어 및 이중 문화 문학을 가르쳤다. 브라운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MIT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 2010년에 퇴직했다.
양영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파리 제3대학에서 불문학 박사 과정 수료. 〈코리아 헤럴드〉 기자, 〈시사저널〉 파리 통신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