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한 선(善)은 과연 선한 것일까?
그 여자 그렇게 따라가게 두었냐고요? 신고 안 하고 뭐 했냐고요?
제가 왜요?
제 일도 아니고, 증거도 없는데. 괜히 휘말렸다간 저까지 위험해질 텐데요.
네? 나쁜 놈이라고요?
아하! 그럼 여러분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악행을 모른 척하신 적이 없으신가요?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이 간편한 말 뒤에 숨어서 누군가의 고통을 못 본 척하신 일이, 정말로 없으세요?
'다 원래 그런 거야. 내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며 정당화하고,
'저 사람이 당할 만하니까 당하는 거지'라며, 고작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속으로 피해자를 두 번 죽이신 적은 없나요?
있죠? 괜찮아요~ 다들 그런 걸요.
대단하신 정의보단 나의 안전과 안위, 편안한 일상이 우선이기 마련이죠.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린 모두 얼룩이 덜룩이, 도덕적 회색분자.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에 책임질 여유도 자신도 없어서 '대단하신 분들'의 나팔소리를 따라 왱알앵알 우-우- 외치죠.
어제는 "A가 옳다!" 자신 있게 떠들다가 오늘은 "B가 옳다!". 뒤집고 뒤집고, 엎치락뒤치락.
적어도 부끄러움을 안다면, 스스로의 부족함을 아는 지혜와 그걸 인정하는 용기가 있다면,
'무지성 군중'이란 괴물은 태어나지 않을 텐데요..
갑자기 뭔 헛소리냐고요?
뭐긴요~ 다음 이야기를 위한 밑밥이죠.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어디, 도덕적으로 자신 있으신 여러분을 위해 간단한 문제 하나 내볼까요?
아래 지문을 읽으시고, 끝에 있는 문제에 답해주세요.
"너... 그게 다 뭐야?"
새로 얻은 자취방에 집들이 겸 놀러 온다던 친구 B가 웬 커다란 플라스틱 통 두 개를 씩씩거리며 들고 왔다.
"아, 무거워 죽겠네. 일단 받아."
B는 다짜고짜 플라스틱 통 하나를 내게 안겼다.
"야, 너! 어우, 뭐야. 뭐가 이렇게 무거워?"
"그치? 들고 오느라 죽는 줄 알았어. 여긴 뭔 엘리베이터도 없냐."
뭐래. 그래 니는 반지하라 좋겠다, 이놈아.
나는 일단 바닥에 통을 내려놓고, 재차 B에게 물었다.
"근데 진짜, 이게 뭐냐고."
"이거? 호떡 반죽."
"... 어?"
"몰라? 호떡 만들 때 쓰는 반죽."
"... 그러니까, 웬 호떡 반죽을 그렇게 많이 들고 오냐고. 설마 장사하게?"
"아니. 요 근처에 호떡 파시는 할머니 계시더라."
이런 전개.. 왠지 불안하다.
"... 그런데?"
"이 추운 날씨에 길가에서, 나이 많으신 할머니 혼자 호떡을 파시는데... 으흑!"
감정이 복받친 B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훌쩍거리는 B와 플라스틱 통 두 개를 나는 암담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대충 상황파악이 된다.
"... 그러니까, 그 할머니가 불쌍해서, 얼른 장사 접고 들어가시라고 재료를 다 사온 거냐?"
"흐, 흐으, 으응. 흐으으..."
울음을 삼키며 B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질어질하다.
B와 나는 어릴 적부터 친구다.
심성이 여리고 착한 B는 예전부터 불쌍한 누군가를 보면 앞뒤 안 가리고 도와주겠다 나섰다.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사고도 많이 쳤는데, 뒷감당은 늘 그의 부모님 몫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인 나한테도 가끔 불똥이 튀었더랬다.
지금처럼.
"집들이 선물까진 바라지도 않으니까 간단히 먹을 거나 좀 사 오랬더니, 이걸 다 어쩌라고 가져와!"
"우리가 해 먹으면 되잖아."
"이 많은 걸 언제 다 먹어!"
"먹을 만큼 먹고, 남으면 냉장고에 넣으면 되지."
"야, 너.. 우리 집 냉장고 꼴이나 보고 말해. 이거 다 들어가지도 않아. 그리고 이것만 먹고 사냐?"
"왜? 너 호떡 좋아하잖아."
"간식으로 먹을 때나 좋지!"
"좋은 일 하는 셈 치고 그냥 밥대신 먹어. 돈은 내가 냈으니까 너한테는 공짜고, 좋잖아."
B가 특유의 얼빵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 근심 하나 없는 저 태평한 미소. 말문이 막힌다.
그래, 내 돈은 안 들었지.
아직은.
이틀 뒤.
"A야, 나 돈 좀 꿔주라. 저번에 호떡 사고 나서 쌀 살 돈이 없어서..."
늘 이런 식이다.
"야, 이 미친놈아! 그러게 능력도 안 되면서 왜 자꾸 누굴 돕겠다 나서?"
"넌 뭔 말을 그렇게 하냐? 그럼, 불쌍하신 할머니를 그냥 모른 척 해? 넌 그럴 수 있냐?"
"어. 난 그런다. 그리고 그 할머니 하나도 안 불쌍해. 호떡 엄청 잘 팔린다더라. 소문엔 외제차도 끌고 다니신다던데."
"에이~ 그런 분이 왜 그러고 살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말도 안 돼. 헛소문이야. 그래야 속이 편하니까 다들 그런 소릴 하는 거라고. 힘든 사람을 모른 척하는 자신이 양심에 찔리니까."
아까 돈 빌려달라고 쭈글 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B는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으스대기 시작했다.
"다들 왜 그럴까~ 서로 조금만 돕고 양보하며 살면 세상이 참 살만 할 텐데."
"네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런 분이 먹을 쌀이 없어서 나같이 양심도 없는 놈한테 돈을 빌리시고요."
"... 근데 따지고 보면 내가 너 호떡 사준 거잖아. 갚아야 하지 않아?"
"이 새끼가 선 넘네. 누가 사달랬어? 그거 결국 냉장고 자리 없어서 다 못 먹고 버렸거든?"
"아이고, 아깝게..."
"그러게 니가 들고 가지 그랬냐! 지금 먹음 딱이네!"
B의 '선행'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어릴 적 베란다에 찾아온 비둘기 한 마리에게 밥을 줬다가 그 비둘기가 사촌에 팔촌까지 다 데리고 오는 바람에, 빨래가 온통 깃털과 똥으로 엉망이 되었던 사소한 해프닝부터,
사이가 틀어진 친구 둘을 화해시켜 주겠다고 전후 사정도 잘 모른 채 오지랖을 떨다가 오히려 골을 더 깊게 만든 삽질은 기본,
총무로 뽑아 놨더니 선생님이나 반 아이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학급비를 통째로 자선 단체에 기부해 버린 일까지.
의도는 좋으니까, 아직 어리니까, 애는 착하니까라며 이해하고 봐주던 사람들도 학급비 일만큼은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결국 B의 부모님이 전액 변상하고, B는 호되게 혼이 났다.
다행히 그 일이 있고부터 B는 남의 돈에는 손대지 않았다.
문제는, 그의 기준에서 가족과 친구는 남이 아니란 것이다.
띠링- 띠링-
B로부터의 전화다. 어디 보자, 오늘이... 아.
받지 말까?
... 에이. 그래도 친군데.
"여보세요?"
"A야, 너 돈 좀 있냐?"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는 법이 없을까.
B가 다급한 목소리로 돈을 빌려달라 애원했다.
월세가 6개월이나 밀렸단다. 주인아주머니가 독촉하러 찾아왔단다. 입막음으로 한 달치라도 내고 싶은데,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단다.
"너 얼마 전에 알바비 받았잖아."
"......"
"... 말해. 이번엔 어디다 날렸어?"
"나 요즘 애니멀 레스큐하러 다니는 거 너도 알지?"
애니멀 레스큐.. 꼴에 웃기고 자빠졌네. 저 스스로나 레스큐 좀 하지.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는 걸 겨우 삼켰다.
"... 그런데?"
"이번에 엄청 심하게 다친 애가 있었는데, 병원비가 장난 아니게 나온 거야."
"그렇겠지. 동물은 보험도 안 돼서 원래도 비싼데."
"그래서 이번 알바비 거기에 다 썼어. 그래도 모자라길래 점장님한테 알바비 좀 앞당겨서 받을 수 있냐고 물었다가 알바도 잘리고..."
"뭐? 너 진짜 미쳤구나?!"
"그래도 같이 일한 정이 있는데, 어쩜 그러냐? 훌쩍.."
"야 이..! 이거 아직 정신 못 차렸네. 나라도 자르겠다!"
"알았어. 다신 안 그럴게.. 이번 한 번만 좀 도와주라. 길바닥에 나앉을 순 없잖아..."
'다시는 안 그럴게. 이번 한 번만'. 이 말만 대체 몇 번째인지.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니가 나앉든 말든 뭔 상관이야.
"... 하아, 알았어. 진짜 이번 한 번 만이다, 어?"
나도 참.. 내가 제일 문제다.
B도 비빌 언덕이 있으니까 계속 저러고 사는 게 아닐까. B를 위해서라도 내가 독한 마음을 먹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도 애는 착해서, 나쁜 의도가 없어서 그런지 끊어 내지를 못하겠다.
띠링- 띠링-
B의 전화다.
"여보세요?"
"... A야.."
축 쳐진 목소리.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뭐야? 뭔 일 있어?"
"나 사고 났어..."
"어?"
"일하던 중에 접촉사고 냈어. 하, 나 진짜 어쩌냐..."
알바 잘리고 택배기사 한다던 게 며칠 전인데, 그새 사고가 나냐. 운도 지지리 없는 놈.
"어떤 상황인데? 안 다쳤어?"
"나는 괜찮아. 차 앞이 좀, 구겨졌지만. 근데 뭣보다 상대 차가..."
"왜? 뭔데?"
"외제차야. 종류가.."
오우 갓 뎀. 이름만 들어도 소름 돋는다. 하필 박아도 그렇게 비싼 걸 골라서 박냐.
"근데 A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 그 호떡 할머니다?"
"... 어?"
"진짜 그 소문이 맞더라! 첨엔 나도 못 알아볼 뻔했어. 겨우 알아보고 '저번에 호떡 재료 다 사드렸던 거 기억하시냐'고, 좀 봐달라고 했거든?"
이건, 어쩌면? 말로만 듣던 그, 암행 중인 부자 어르신이 착한 젊은이를 돕는다는 전설의..?
드디어 B의 선행이 결실을 맺는 걸까?
"그런데 뭔 헛소리냐더라? 언제 자기가 사 달랬냐고, 내가 부득부득 우겨서 통까지 들고 가지 않았냐고."
아.. 그럼 그렇지.
"100프로 내 과실이니까 제대로 변상하라는데... 어쩜 있는 사람들이 더 하냐. 노인네가 욕심만 득시글해 가지고는."
"... 이제 어쩔 거야?"
"어쩌긴.. 이따가 부모님께 연락해 봐야지."
네 부모님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거 같진 않은데.
... 가만, 저 말은 나한테 먼저 전화했단 거잖아. 설마..?
" 근데 A야, 너 돈 좀 있냐?"
자, 그럼 문제.
"다음 중 가장 나쁜 사람은 누구일까요?"
1번. A
2번. B
3번. B의 부모님
4번. 호떡 할머니
5번. 월셋집 주인
6번. 동물병원 원장
7번. 점장
8번. 위에 답 없음
#선악의기준 #애는착한데 #민폐 #호구탈출넘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