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utis Nov 13. 2024

그의 발자취의 에필로그

하얀 눈은 숲을 잠재우려는 듯 소복한 이불을 덮어 주고 있었다.

빽빽이 심어진 나무가 길을 내어준 숲 가장자리에 하얀 카라반(Caravan) 한 대가 어른 허벅지 높이까지 쌓인 눈 속에 갇혀 있었다.


끼익.

기름칠이 필요하다고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투덜대는 것처럼 카라반의 창문이 퉁명스러운 소리를 내며 살짝 열리자, 그 안에서 털모자를 쓴 한 남자의 머리가 빼꼼히 나왔다.

이제 갓 30을 넘긴 그의 하얀 얼굴에는 활동적인 사람의 표식처럼 갈색 주근깨가 희미하게 박혀 있었다.

모자 밖으로 삐져나온 살짝 곱슬 진 황갈색 머리카락은 전체적으로 밝고 활기찬 분위기인 그의 얼굴을 더욱 개구지게 보이도록 했다.

그중 딱 하나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새벽 어스름을 닮은 푸른 눈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눈을 좇았다.

회색빛이다 못해 이젠 하얗게 보이기까지 하는 하늘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던 남자는 팔자주름이 잡힌 입가에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 당최 그칠 생각을 안 하네.”


타들어가는 속에서부터 나온 하얀 입김은 눈송이 하나 녹이지 못한 채 차가운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창문을 닫고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파란 침낭 안으로 스르륵 몸을 다시 구겨 넣었다.

전기가 끊겨 난방이 되지 않는 차 안의 온도는 철로 만들어진 벽이 무색하게 밖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럴까 봐 서둘러서 남쪽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말이지. 설마 이렇게나 빨리...”


남자의 궁색한 변명조차 추위에 몸을 사리며 나오다 말고 대신 옅은 입김만 내보내었다.  


“나흘째인가, 오늘로...”


남자가 누워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 2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또 다른 청년이 침낭 안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검은 머리카락에 긴 눈, 추워서인지 살짝 창백해 보이는 갸름한 얼굴이 깔끔한 동양인이었다.


좁은 공간에 퍼런 번데기처럼 누워 있는 두 남자의 모습은 마치 잘 전시해 둔 미라의 관 같았다.


“초이, 나 배고파.”


푸른 눈의 남자가 하얀 정적을 깨고 옆에 있는 검은 머리의 청년을 돌아보며 칭얼거렸다.

상대가 미간만 살짝 찌푸릴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남자는 이번에는 리듬을 타며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아임 헝~그리. 아임 헝~그리. 아임 헝~그리. 아임 헝~그리. 아임..”


“저기 배낭에 비상용 에너지바 꺼내 먹어. 그럼 되잖아.”


“그거 어제로 끝이었어.”


“...... 그럼 우리 먹을 건 이제 없는 거야?”


“없기는! 냉동고에 햄버거 패티 있잖아.”


“그건 팔 거잖아.”


“이런 비상사태인데 영업은 잠시 접어두자고.”


“하아... 그러니까 떠나기 전에 준비를 철저히 해두자고 내가 몇 번을..”


“아, 배고파. 나 죽을 거 같아.”


남자가 낑낑 신음 소리를 내자 청년은 창밖 하늘처럼 창백한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직접 해 먹어.”


“네가 주방장이잖아.”


“아까는 비상사태니까 영업은 잠시 접자며. A thirsty one digs a well(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 그런 말 들어봤어?”


“Dig a well before you're thirsty(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준비하라)가 아니고?”


“아니 그거 말고. 아, 그쪽이 더 적절하려나.”


“아, 웁스...”


남자는 한숨을 푹 쉬고 다시 고개를 바로 돌렸다.

그러고는 낮은 천장이 마치 관뚜껑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슬슬 피부에 서늘하게 와닿기 시작한 궁상맞은 생각을 입에 담았다.


“우리 이대로 죽는 걸까.”


“......”


“눈에 파묻혀 죽다니. 눈의 여왕을 찾아다니는 자의 최후로서는 그럴듯하네.”


쓴웃음이 묻은 남자의 말에 청년은 스르륵 눈을 떴다.

밤을 닮은 새카만 눈동자가 아직 초점을 찾지 못한 채 멍하니 떠올랐다.


“... 사장님.”


“어?”


“눈물이 눈이 되어서 내리려면 얼마나 걸릴까?”


“...... 언젠가는 눈이 되겠지.”


“9년은 너무 짧을까?”


“그럴 수도 있고, 이미 내렸을 지도.”


흐릿한 기억을 바라보고 있던 검은 눈동자가 점점 또렷해지더니, 청년이 침낭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앉았다.


“내려가려고?”


“배고프다며.”


무표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청년의 갸름한 얼굴을 보고 남자는 씩 웃으며 물었다.  


“뭐 먹고 싶어?”


“무슨, 자기가 해줄 것처럼. 그리고 있는 거라고는 햄버거 재료뿐인데.”


“어쩌면 죽기 전의 마지막 만찬일지도 모르잖아. 가능하면 먹고 싶은 걸로 해보자. 뭐 먹고 싶어?”


청년의 반쯤 감긴 눈이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 돈가스.”


“돈가스? 아, 그 슈니첼 같은 거?”


“안돼, 근데. 고기가 없어.”


“있잖아. 패티.”


“그걸 튀기자고?”


“어. 햄버거 빵을 부숴서 빵가루를 만들고. 계란.. 아마 있을걸.”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


“너네 나라에 그런 말 있다며.”


“뭐?”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거기에 ‘잘’이라는 말은 없어.”


“그럼, 그냥 먹고 죽어도 좋은데 잘 먹고 죽으면 더 좋겠네.”


“... 가스 아직 있는 거 확실하지?”





“어때? 보기엔 그럴듯한데?”


패딩 점퍼를 껴입고 조그마한 플라스틱 간이 탁자에 마주 앉은 두 남자는 마치 막 잡은 먹이를 들여다보는 검은 곰 두 마리처럼 무럭무럭 김이 올라오는 접시를 바라보았다.


“소스는?”


“있잖아, 다용도 소스.”


청년의 물음에 남자는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접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충 대답했다.


“케첩?”


“어. 자자, 식기 전에 얼른 먹자고.”


두꺼운 점퍼 탓에 둔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남자는 민첩하게 케첩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청년의 고기 위에 듬뿍 뿌리고는 자기 접시 한쪽에도 조금 뿌렸다.

케첩 무더기가 방금 막 폭발을 마친 화산처럼 쌓여있는 자기 접시를 본 청년은 잘 다려진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칼로 케첩을 고기에서 덜어냈다.


“잘 먹겠습니다~ 아암~ 음~~”


청년은 눈앞의 음식이 과연 먹어도 되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먼저 음식에 달려든 남자의 모습을 잠시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음식 평론가처럼 고기 한 조각을 잘게 잘라 입에 넣어 보더니 바로 고개를 저으며 냉정한 판정을 내렸다.


“최악이야.”


“왜? 이 정도면 먹을 만 한데 뭘.”


“맛에 비해 대가가 너무 비싸.”


“흐흥. 그건 그렇네.”


“그것도 상품을.”


“비상사태니까. 장사보다는 일단 생존이지. 얼마나 다행이야, 우리가 햄버거 장사를 해서. 그치?”


평소 같으면 핀잔을 주었을 청년은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네. 예전에 본 만화에서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


“그래?”


“어. 거기 나온 등장인물들도 눈 때문에 차 안에 갇혀서 상품을 먹으며 몇 날 며칠을 버텼어.”


“그쪽은 뭘 팔았는데?”


“사람.”


“쿠훕! 아, 야...”


당황한 나머지 기침을 하다가 순간 음식이 코로 들어갈 뻔한 탓에 남자는 들고 있던 칼과 포크를 내려놓고 얼얼한 코를 만지작거렸다.

청년은 그런 그를 힐끗 쳐다보며 빨간 케첩이 묻은 칼로 그의 칼을 가리키며 말했다.


“칼은 쥐고 있는 편이 좋아, 사장님.”


“야 너, 진짜 소름 돋게...”


청년은 무표정하게 접시로 눈을 돌리고는 고기를 썰며 물었다.


“이제야 후회돼?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르는 불법체류자를 거둔 게?”


“하... 아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자는 칼과 포크를 다시 잡은 손에 어쩔 수 없이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한동안 포크와 칼과 접시, 철과 뼈가 부딪히는 소리만 계속되던 가운데 남자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4년이나 됐구나, 너랑 이러고 있는 게.”


“......”


“그런데 너,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


“......”


“가족이나 뭐.. 친구라든가?”


이번에는 청년이 칼과 포크를 찰그락 소리가 나도록 접시 위에 내려놓더니 멍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그 여자, 이름이 뭐야?”


“... 누구?”


“날 닮았다는 그 여자.”


모른척할 생각 말라는 듯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청년에게 남자는 헛웃음을 지으며 여유롭게 받아쳤다.


“하.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인 건 알겠는데, 나는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다? 알려줘?”


“... 됐어.”


생각보다 세게 나오는 남자의 태도에 청년은 한발 물러서서 애꿎은 고기만 짓이겨댔다.


“보기보다 허당이야, 너.”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어가지고.”


“알면서. 알려줘?”


“됐다고.”


항상 무심한 태도와 말투로 자신을 몰아세우던 청년이 슬쩍 꼬리를 내리는 모습에, 늘 기어오르던 동생에게 한 방 먹여주었다는 뿌듯함과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는 동생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며 남자는 커다랗게 썬 고기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음, 실은 말이지...”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잊히기 전에 일단 꺼내놓고 본다는 식으로 운을 뗐다가, 미처 다 삼키지 못한 고기 조각을 마저 우물거렸다.

청년은 접시만 바라보며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나 되게 좋아하는 유튜버가 있는데.”


갑자기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툭 튀어버린 남자의 말에 청년은 접시로부터 눈을 들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아랑곳 않고 말을 계속했다.


“한국인이야. 화가인 거 같아. 자기가 그림 그리는 과정을 영상으로 제작해서 올리는데, 뭐랄까.. 그림이, 색채가 되게 특이해. 음악도 어디서 찾는 건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걸로 잘 어울리게 골라서 달고. 자작곡일까? 그럼 멀티인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런데 이 사람이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올리는 영상이 있어. 한 3년 전부터인가...”


이제 완전히 흥미를 잃은 청년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요량으로 음식에 집중하며 대충 추임새를 넣었다.


“어.”


“석양인데, 매일매일이 달라. 대단하지? 자그마치 3년인데.”


“어~”


“보여주고 싶은데 인터넷이 안 돼서. 아, 내 전화기 이제 꺼졌으려나?”


“으응.”


“암튼. 그런데 이 사람, 다른 그림에는 안 그러는데 석양 그림에는 꼭 마지막에 그림 한구석에 글씨를 써넣어.”


“아, 그래? 뭐라고 쓰는데?”


영혼 없는 대답을 대충 내뱉고서 청년은 마지막 고기 조각을 입에 넣었다.


“For Sol.”


순간 청년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비웃음이 이내 청년의 얼굴에 스며들자,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스페인어로 sol이 태양이라는 뜻이거든. 그래서인가 싶긴 한데, 뭔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거 같은데.”


“그럴까.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어일 수도 있잖아?”


“글쎄.”


“솔이라는 건 한국말로 무슨 뜻이야?”


“... 글쎄. 특별히 없어.”


“역시 그쪽은 아닌 건가... 참, 영어 속어로 SOL은 ‘더럽게 재수 없다’는 뜻인 거 알아?”


“하하, 그래? 하하하.”


남자의 말에 청년은 이상하리만치 크게 웃었다.

그 말 자체가 재미있어서라기보단, 누군가를 향한 비웃음과 수긍이 담긴 웃음이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제대로 만들었네.”


청년의 비웃음이 서서히 포기의 미소로 바뀌는 걸 바라보던 남자는 차분한 눈동자 색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긋하게 물었다.


“어느 쪽인 거 같아?”


“어?”


“You’re Sol, aren’t you?(넌 Sol이지, 그렇지?)”


남자의 물음에 청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그럼 약속했다?


그건 사기였다.

상대방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나도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그날, 그녀가 떠난 그 겨울.


- 난 괘종시계가 싫어.


나는 나의 시간을 멈추었다.


내가 없는 저편에서는 여전히 봄, 여름, 가을 그리고... 텅 비어버린 겨울이 흐르고 있을 텐데.

그렇게 바라고 바랐던 나의 소망이었는데.

어째서...


[T=2π√ Lg]


- 하, 하, 하하하하하... 아아... 아아아!


어째서 나는 스스로 멈춘 시계 추를 이제 와서 다시 움직이려 하는 걸까.


- 예쁘지? 원래라면 그저 더럽다고 싫어할 먼지가 말이야.


- 응.


- 우리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달이나 행성도 결국 태양빛을 반사하는 커다란 먼지 덩어리일 뿐인데. 닿지 않는 곳에 있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거잖아.


켜켜이 쌓여있던 마음속 먼지가 찰나의 우주가 되어 떨어지는 속에서,


- 하지만, 그렇다면 역으로.. 가까이 있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있는 거잖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 역시... 넌 나랑 달라.



“사장님.”


“응?”


“혹시 엽서랑 연필, 있어?”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오늘, 나는 비로소 연필을 집어 들었다.





사각사각사각.


“잘 그리잖아! 그게 뭐야? 고래?”


감탄하며 묻는 남자에게 청년은 아무 대답도 않고 그저 묵묵히 그림만 그렸다.

그런 그의 뒤통수에 미소를 보내며, 남자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누구한테 보내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