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나는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 오라고 부탁하지도 않았건만 어김없이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
말없이 아침 식사를 하고, 옷을 입고, 챙길 거 챙겨서 집을 나섰다. 예전에 다녔던 두 학교를 빠르게 지나친 후,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벚나무는 이제 완전히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길을 건너고, 길을 걸어 학교로 향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다.
“야, 오늘도 일찍 왔네?”
아니, 뭔가 조금 다르다.
“어.”
반가운 인사 하나와 어색한 인사 하나가 추가되었다.
“드디어 오늘 영어회화 발표네. 어떡하지? 벌써부터 긴장돼. 으...”
아랑이 손바닥을 비비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긴장되긴 나도 마찬가지지만, 저럴 정도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움을 느끼며 나는 예의상 한 마디 했다.
“걱정 마. 잘 될 거야.”
“정말? 그럴까?”
“응. 분명 네가 이길걸.”
그래, 마음을 비우고 있어서 덜 떨리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이기는 건 저쪽일 테니까.
내가 거짓 위로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아랑이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딱히 이기고 지고는 상관없거든? 실수하냐 안 하냐, 쪽팔리냐 안 쪽팔리냐가 문제지.”
하긴, 그게 제일 큰 문제지. 나도 실수나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유난히 짧은 1교시가 끝나고, 다음은 영어회화 수업이다. 우리는 아랑이 프린트해 온 유인물을 반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선생님을 위해 교탁 위에도 한 장 올려두었다.
딩동댕동- 드디어 2교시가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우리가 준비한 유인물을 죽 훑어보시곤 흡족한 미소를 지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음, 좋네. 기대되는걸.”
선생님의 칭찬에 아랑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에 반해 나는 방금 저 말로 아이들의 기대치가 높아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자 그럼, 두 사람 준비 됐어?”
우리는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 선생님께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나와.”
아랑은 왼쪽으로, 나는 오른쪽으로 일어나 무슨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처럼 책상과 책상 사이를 지나갔다. 별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우리가 나가자 선생님이 자리를 비키셨다. 나와 아랑은 애매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꼴이 되었다.
“아랑이가 대학 진학을 옹호하는 입장, 그리고 솔이가 반대하는 입장이지? 준비됐으면 시작해도 좋아.”
첫인사는 아랑이 하기로 우리끼리 정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에게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랑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한결 여유로워진 얼굴로 청중에게 웃어 보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환영받는 느낌과 ‘걱정 없이 들어도 되겠구나’ 하는 편안함을 주는, 밝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다.
“Hi, everyone. Today, we are going to discuss the pros and cons of going to university. I’m Arang Choi, supporting the benefits of studying at university, and(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저희는 대학에 가는 장점과 단점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대학 진학이 주는 이점을 지지할 최아랑이고요),”
“I’m Sol Choi, and I will talk about the disadvantages of going to university(저는 대학에 가는 단점에 대해 얘기할 최솔입니다).”
“Firstly, let me point out the fact that people with a bachelor’s degree have a better chance to get a job than those without a degree. Having been through all the hard time to get into university, especially the well-known ones, can prove your diligence and dedication, which are positive aspects most companies look for. Also, the established curriculums...(우선, 학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더 좋은 취업 가능성을 가진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까요? 대학, 특히 이름난 곳에 들어가기 위해 힘든 시간을 버텨온 것은 근면함과 강한 의지의 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은 대부분의 회사들이 원하는 것이죠. 또한, 잘 정립된 커리큘럼도...)”
“It may have been true, but the time is changing so fast. Due to the rapid development in technology, the world is facing fundamental changes in the labor market. The so-called ‘established’ curriculums most universities and colleges have will not be able to provide students with sufficient education and trainings to meet the new demand, for those will become out of date very soon. Would it be worth the expensive tuition fees and your 3-4 years?(지금까지는 그랬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급속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세상은 노동 시장의 근본적인 변화를 맞닥뜨리고 있어요. 대부분의 대학이 가지고 있는 소위 ‘잘 정립된’ 커리큘럼이란 것은 곧 구식이 될 거고, 새로운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충분한 교육과 트레이닝을 학생들에게 제공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 걸 위해 비싼 등록금을 내고 여러분의 3-4년을 보낼 가치가 있을까요?)”
토론은 물 흐르듯 잘 이어졌다. 지켜보시는 선생님의 표정도 좋았고, 아이들도 처음부터 대놓고 지루하다거나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몇 명만 빼면, 대부분 잘 따라오는 거 같았다.
무엇보다 아랑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아까까지의 긴장은 온데간데없이 꼭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 보였다. 막상 무대에 오르면 강한 체질인가. 상대가 즐기고 있어서 그런지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어느새 마지막 요약 순서가 되었다. 아랑이 먼저 시작했다.
“... Moreover, studying at a higher educational institution like university can be a good opportunity to...(더 나아가, 대학 같은 고등교육기관에서 공부하는 것은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데...)”
별 탈 없이 잘 끝나겠구나 싶었던 그때, 아랑이 도중에 얼어붙었다. 반짝반짝 빛나던 그녀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환하게 웃고 있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잊어버렸나? 이런, 여기까지 잘 왔는데...’
나는 속으로 ‘침착해’를 외치며 초조하게 그녀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 to... meet specialists in the area in person...(그 분야의 전문가를 직접 만날 수도 있고...)”
다행히 그 이후로는 막히는 곳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못내 아쉬운지 아랑의 표정은 시무룩하기만 했다.
이어서 내 차례가 되었다.
“......”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서있는 나를 다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아랑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어쩔 줄 몰라했다.
“왜 그래?”
보다 못한 선생님이 물으셨고,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까먹었어요.”
아랑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은 잠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시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셨다.
“할 수 없네. 아쉽지만 여기서 끝낼까. 자, 훌륭한 토론을 보여준 두 사람에게 박수.”
아이들이 어색하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앞쪽 한 구석에서 열성적인 박수 소리가 끼어들었다. 김다윗이었다. 그는 손바닥이 터져라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에 힘입어 하나 둘, 박수 소리가 점점 우렁차게 변했다.
“자, 그럼 투표를 시작하자.”
선생님은 나와 아랑을 뒤돌아 서게 하셨다.
“솔이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아마 내가 앉은 줄 아이들일 거다.
“좋아, 손 내리고. 그럼 아랑이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거의 모든 아이들이 손을 드는 게 느껴졌다. 당연한 결과다. 나는 담담히 패배를 받아들였다.
“이야, 너무 압도적인데? 22 대 6으로 아랑이 승!”
‘6명?’
생각보다 많이 받았다. 같은 배를 탄 우리 줄 4명은 나한테 투표하리라 예상했지만, 나머지 두 표는 대체 어디서 온 거지?
“그럼 약속한 대로, 솔이가 있는 3번째 줄은 잊지 말고 숙제해 오도록.”
뒤를 돌아보니 원망 가득한 8개의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이야, 그래도 처음부터 기대 이상이었어. 둘 다 너무 잘했다.”
선생님은 나와 아랑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시며 웃으셨다.
“꼭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거 같더라. 솔이 너 정말 대학에 가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니?”
이 선생님이 정말. 이젠 하다 하다 확인사살까지?
“... 아니요. 당연히 가야죠.”
배신감 가득한 아이들의 탄성으로 교실이 술렁거렸다. 다들 내심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쪽이 이기길 바랐을 텐데, 진 것도 괘씸하거늘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니. 나는 점점 더 죽일 놈이 되어가고 있었다.
“역시 그랬구나? 그럴 거 같긴 했는데 너무 진심인 것처럼 말해서 말이지. 둘 다 수고 많았어. 이제 가서 앉아.”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슬쩍 스친 선생님의 미소가 어쩐지 묘한 느낌을 주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랑은 날 추궁하기 시작했다.
“너 왜 그랬어?”
“뭘?”
“잊어버렸다는 거 거짓말이지? 일부러 그런 거잖아.”
“내가 왜?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그럼 내 눈 똑바로 봐봐.”
내가 그런 거에 동요할 거라고 생각했나? 얼마든지 뻔뻔하게 봐줄 수 있지.
“어. 자.”
“너 진짜...”
“정말로 잊어버렸어.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해? 우리 줄의 운명이 달렸는데.”
나는 끝까지 모른 척 둘러댔고, 아랑은 뭔가 석연치 않은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우리 줄 두 번째 자리에 앉은 남학생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빈정대는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야, 너 일부러 그랬지?”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았다.
‘노대수’.
“......”
다른 사람이다. 성도 틀리고.
그런데 왜 속이 울렁거리는 걸까.
<닷새 후>
“아버지를... 살해했다고요?”
이중상 선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중학생 나이였을 텐데 친부를 죽이다니. 혜정은 큰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런 큰 사건이 있었는데, 왜 지금까지 못 들어 본 거죠?”
딱히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끔찍한 사건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기 힘든 마음에 그녀는 그만 따지듯이 말을 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아닙니다. 그러실 만도 하죠. 그즈음 터진 굵직한 연예 뉴스에 가려져서 큰 이슈는 되지 못했어요.”
“...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아마 아직 소년원에 있을 겁니다.”
이중상 선생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떴다.
“처음에는 술에 잔뜩 취한 남편이 자신을 죽이려는 걸 아들이 말리려다 생긴 우발적 사고라는, 유일한 목격자인 모친의 진술에 힘이 실렸어요. 그렇게 정당방위로 흘러가나 했는데, 아무래도 시신 상태가 좀 의심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그저 어머니를 감싸기 위해 실수로 찌른 거라기엔 자상이 너무 많았고, 훼손 상태도 심했죠. 그래도 당시 애 나이가 15살이었고, 어려서부터 학대를 받았다는 인근 주민들의 진술이 받아들여져서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되었어요.”
혜정은 아이가 받았을 학대와 사건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애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나중에 찾아볼 요량으로 물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미성년자라 이름 같은 건 보도되지도 않았겠다 싶어 혜정은 후회했다. 이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이 선생은 또박또박 그 아이의 이름 석자를 읊었다.
“조대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