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와 군생활이 거지 같은 이유.
그건 들어온 순서대로 계급이 매겨지며, 소속에 강제성이 있다는 거다.
그나마 나이순이라는 정당성이라도 있고 정 싫으면 그만둘 수 있는 학교와 달리, 군대는 그야말로 먼저 들어온 게 벼슬이며 복무 기간을 채울 때까지 나갈 수도 없다.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훈련기관인 특성상 그 속에서의 삶은 가히 정상의 범주를 벗어났다 할 수 있는데, 개인을 죽이고 단체를 위한 장기짝으로 거듭나는 고된 훈련을 무려 2년 넘게 받는다.
전국에서 모인 별의별 인간군상들은 이러한 시스템에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적응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특히 내 선임이 어떤 인간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데, 운이 좋아 좋은 선임들을 만나면 고된 훈련생활을 잘 버틸 수 있지만, 운이 나빠 인간의 가죽을 쓴 짐승을 만나면 지옥이 펼쳐지게 된다.
“야아, 깜찍한 신삥이가 들어왔구먼? 이름이 외자네? 그래 뭐, 듣자 하니 군의관 안 하고 여기 왔다고?”
“빨리 끝내고 나가고 싶은가 보죠. 이야~ 누구는 부모 잘 만나서 대학도 다니고, 좋다!”
‘또라이 보존 법칙’이란 게 있다지. 감옥을 제외하면 아마 군대만큼 또라이의 퍼센티지가 높은 곳도 드물 거다.
삐딱하게 앉아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말년 병장과 그 옆에 하이에나처럼 붙어서 깐족거리고 있는 상병 놈. 둘은 또라이 중에서도 상또라이다.
특히 조 상병은 과거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던가, 소년원과 감옥에서 살다시피 했다던가, 험악한 소문이 자자한 불길한 인사다. 얼핏 보면 병장 백 믿고 설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병장도 함부로 못할 정도로 위험한 놈이다.
저런 똥도 아니고 지뢰 같은 놈이랑 잘못되면 제대 전에 인생 종 친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가능한 트러블을 만들지 않으려고 병장도 애쓰는 중이다. 덕분에 기고만장해진 조 상병은 재미로 후임들을 괴롭히기 일쑤였고, 그에게 당해 머리에 구멍 낼 뻔한 애들이 한 둘이 아니다.
얼마 뒤면 저게 병장이 된다니, 벌써부터 어질어질하다.
하필 걸려도 이런 델 오다니.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조 상병의 새 장난감인 신병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째 그의 안색이 유난히 창백하다. 저건 단순한 긴장이나 불안과는 뭔가 다르다.
“최 이병? 난 조대수, 상병이야. 나 다치면 약 발라줄 거지? 하핫.”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의 최 이병. 그리고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히죽거리는 조 상병.
‘맙소사. 설마 둘이 아는 사이야?’
아무리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지만, 이럴 확률이 얼마나 되려나.
‘조 상병 제대까지 앞으로 8개월. 쟨 이제 죽었네.’
<5년 전>
‘대수...’
뒤집어진 속을 달래기 위해 나는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걸 본 노대수의 태도가 한껏 더 기고만장해졌다.
“우리 줄 숙제 니가 다 해 와. 니가 일부러 진 거니까, 불만 없지?”
목소리만 들으니 그나마 속이 조금 가라앉는다.
“야, 너 듣고 있어?”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 뭔 말인지 잘 알겠어.”
“그래? 그럼,”
“하지만 역시, 안 되겠는데.”
저 요구의 타당성을 검토해 보기도 전에, 나는 본능적인 거부감의 손을 들어주었다. 뒤늦게 따라온 생각은 내가 성급히 내린 결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끝에 까먹은 거, 꼭 그것 때문에 내가 졌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상대도 잘했고, 무엇보다 발표 태도나 설득력은 얘가 더 뛰어났다고 생각해.”
“뭐래? 너 지금 나랑 장난 까냐?”
당연하게도 노대수는 이 정도로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이제 아랑까지 째려보기 시작했다. 옆에서 가슴 졸이며 눈치를 살피던 아랑이 흠칫하고 놀랐다.
“... 나 참.”
순간 무슨 수를 써서든 짓눌러 버리고 싶다는, 대책 없는 충동이 일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딴 숙제도 하기 힘들어하면서 무슨. 너도 참 앞날이 암울하다.”
“뭐? 너 방금 뭐라고 씨부렸냐?”
“그렇잖아. 발표한 내용 다 프린트해서 줬으니까 조금만 다르게 쓰면 되는 건데, 그것도 못해서 나더러 하라는 거 아냐, 지금?”
노대수가 주먹으로 내 책상을 내리쳤다. 쾅! 옆에서 아랑이 몸을 움찔하는 게 보였다.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노대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아 씨바... 못하는 게 아니라, 내가 왜 해야 하냐고!”
씩씩대던 그가 갑자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아랑을 턱으로 가리키며 빈정댔다.
“너 쟤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지? 그쪽 사정에 왜 죄 없는 우릴 끼어들여.”
“뭐라고? 너야말로 말도 안 되는 억지 그만 부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대뜸 아랑이 나섰다. 그녀는 잔뜩 눈에 힘을 주고서 노대수를 노려보았다. 노대수는 그저 가짢다는 듯 계속 비아냥거렸다.
“억지? 너무 뻔하던데 무슨 억지? 뭐냐 니네? 혹시 사귀냐?”
그 말에 우리 둘이 동시에 발끈해서 소리쳤다.
“뭐어?!”
“헛소리야! 내가 왜 이런 애랑.”
왜 이렇게 말이 세게 나온 거지. 내색은 못하고 속으로만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아랑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나를 돌아보았다.
“넌 또 뭔 소리야?”
“... 뭐가?”
“‘이런 애’가 뭔 뜻이냐고?”
“별 뜻 없는데.”
나름 용기를 내어 두둔한 아군이 배신을 때리다니. 아랑이 치를 떨었다.
“별 뜻도 없는데 왜 말을 그렇게 해? 진짜 재수 없어 너!”
“아, 이것들이 진짜!”
쾅! 노대수가 짜증을 부리며 다시 책상을 쳤다. 그리고 마지막 경고라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늬들이 뭔 관계든 알 바 아니고! 니가 싼 똥은 니가 치우라고!”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결말이 어떻게 날까 몰래 지켜보고 있는 주변의 시선, 숨죽여 속닥거리는 소리, 부릅뜬 노대수의 눈.
나는 원치 않는데 온몸이 스펀지처럼 주변의 모든 자극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 들었어? 쟤 말야...
- 살아서 졸업하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그깟 숙제 네 번 더 하면 될 일. 지금까지의 나라면 그랬을 텐데.
그런데, 지금은 뭔가가 다르다. 심장이 마구 뛰었고,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사람이 실성하면 웃음이 나온다더니, 나는 실실 웃으며 슬슬 시동을 걸었다.
끝이 낭떠러지라도 상관없었다.
이 자식을 한 번 치고 갈 수만 있다면.
“그래, 넌 나만 아니었으면 이번에 숙제할 일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뭘 실실 쪼개? 틀린 말 했어?”
“우리 반 인원은 총 30명, 즉 15쌍이니까 우리 모두가 영어회화 발표를 하는 데 15주가 걸려. 15주면 올해 안에 다 하고도 남을 기간이고.”
“뭔 헛소릴...”
“6줄에서 한 명씩 뽑은 임의의 대표 중 한 쌍이 생길 경우의 수도 공교롭게 15가지네. 즉, 6줄에서 얼마든지 겹치지 않게 짝을 골라낼 수 있다는 거지. 같은 두 줄이 다시 만나는 일 없이 말이야. 이처럼 시간적 제약이나 공정성의 측면에서도 우리에게 15번의 발표를 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 우리 중 그 누구도 발표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어. 너도 마찬가지고.”
“... 그래서?”
“네 말은 내가 진 게 문제란 건데, 그럼 우리 줄이 한 번도 안 지고 넘어갈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볼까?”
‘계산’이라는 말에 노대수의 입이 다물어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원래라면 개개인의 능력 같은 변수도 감안해야 하지만 다 알지 못하니까, 일단 단순하게 이길 확률이 모두 같다고 가정하고, 그럼 이길 확률은 50 대 50, 즉 2분의 1이야. 우리 줄에 앉은 5명이 모두 이길 확률은 2의 5승분의 1, 즉 32분의 1이 돼. 이건 대략 3퍼센트의 가능성이지. 동전을 5번 던져서 모두 앞면만 나올 확률과 같아. 감이 좀 와?”
노대수는 말없이 눈살을 찌푸린 채 눈만 껌뻑였다.
“그래, 미안하게도 이번엔 내가 져버렸어. 그럼 우리 줄이 나머지 4번을 다 이길 확률은 16분의 1, 즉 6퍼센트인데... 난 실제 확률은 이거보다 훨씬 낮을 거라고 봐. 왜냐하면 너라는 아웃라이너가 있으니까.”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노대수는 방금 자기에 대해 뭔가 안 좋은 말이 나왔단 걸 눈치챈 거 같았다. 그의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일그러졌다.
그러나 의외로 그는 바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아마 좀 더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릴 모양이었다. 그 판단력에 박수를 보내며, 나는 그의 망설임에 기꺼이 확신을 박아 주었다.
“이 정도 숙제도 하기 싫어하는 거 보니 영어 실력은 그다지 기대하기 힘들 거 같고, 남 탓 지리는 거 보니 애들한테 인기도 별로 없을 거 같거든. 내 상각에 네가 이길 확률은 50퍼센트에서 훨씬 떨어진, 많이 쳐줘야 1퍼센트? 그것도 운을 감안한 거지 네 실력은 아니야. 그럼 2의 3승 분의 1, 즉 8분의 1 곱하기 백분의 1이니까 계산도 쉽게 8분의 1퍼센트, 즉 0.125퍼센트네. 6퍼센트가 너로 인해 0.1퍼센트 정도로 떨어지다니, 대단한데?”
점점 험악해지는 노대수의 얼굴에 대고 나는 활짝 웃으며 마무리를 지었다.
“너 때문에 우리 줄이 숙제해야 되면, 그땐 너도 책임지고 대신 숙제해 줄 거지?”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노대수의 팔이 올라갔다. 그의 불끈거리는 주먹이 나를 향해 장전되는 걸 보고 나는 눈을 감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속은 후련했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날아올 줄 알았던 노대수의 주먹은 생각보다 오래 뜸을 들였다.
“넌 또 뭐야? 이거 안 놔?!”
노대수의 당황한 고함 소리를 듣고 나는 눈을 떴다. 그는 팔을 붙잡힌 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팔을 붙잡고 있는 건,
“야, 그쯤 해라?”
뛰어난 운동신경과 탄탄한 근육을 가진 작은 거인, 김다윗이었다. 김다윗은 못해도 자기보다 10센티는 더 큰 노대수의 팔을 아무렇지도 않게 끌어내리며 말했다.
“내 친구 건들면 죽는다.”
‘... 뭐?’
도와준 건 고맙다만... 친구? 누가?
언제부터?
<닷새 후>
“오늘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털어놓으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거 같습니다.”
두 선생은 서로에 대한 감사와 나이 차이를 넘어선 존경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혜정은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미 인사도 했는데, 이 얘길 굳이 꺼내야 할까?’
오지랖도 정도가 있다며 스스로를 다그쳐 보았지만, 그녀는 왠지 찜찜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바로 자리를 뜨지 못하는 혜정을 보고 이중상 선생이 물었다.
“왜 그러시죠? 뭐 더 궁금하신 거라도?”
“아, 예... 그 다른 피해 학생이요,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요. 멀리 가서 잘 모르실까요?”
“아, 멀리 가지는 않았어요. 아버지께서 목사님이신데 교회가 여기서 가까운 동네에 있거든요.”
“목사님이요?”
“네. 저기 OO로에 있는... 이름이 뭐였더라? 작은 교회인데...”
“혹시 OO교회요?”
“네, 맞아요!”
혜정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단 말인가.
“선생님, 혹시 그 학생 이름도 기억하고 계시나요?"
“네. 특이한 이름이라서 기억하고 있죠. 김다윗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