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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구나무 May 25. 2022

무녀도 완양염전 가족사

무녀봉에 올랐다. 마침 꽃 시절을 맞은 봉우리는 드문드문 산벚이 제철이다. 무당이 상을 차려놓고 춤을 추는 모양새란다. 130미터 나지막한 봉우리지만, 무녀도초등학교가 있는 서드리 마을을 가운데 두고 좌로 선유도부터 우로 고군산 대교 너머 신시도까지 시선은 거침이 없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라 믿기 어려울 만치 썰물의 바다는 아득히 멀다. 바람조차 없다. 먼 수평선의 경계가 뿌연 안개에 가려 흐릿하고 이름도 알지 못하는 작은 섬들이 긴장 풀린 바다 위를 표류하듯 떠 있다. 마을 앞으로 드러난 갯벌의 고요에 묻혀 봄날 오후 서드리의 풍경은 나른하다.      


섬 이름도 봉우리 따라 무녀도(巫女島)라 지었다. 지금은 하나의 섬이지만 방조제 공사가 있기 전까지, 무녀봉과 서드리 그리고 모개미 마을이 각각 별개의 섬이었다. 1962년 완공된 길이 525미터 방조제와 15만 평 염전이 생기면서 무녀도는 비로소 하나의 섬으로 묶였다. 하지만 무녀봉 자락 아래 펼쳐진 벌판은 소금밭이 아니다. 무슨 사연인지 방치된 폐염전에는 붉은 칠면초가 가득하고 갈대가 빽빽하게 자라 있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다 선유도에서 가게를 한다는 최인성 씨를 찾아가게 됐다. 무녀도를 가로지르는 연결도로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던 해, 6월 중순이었다.  

       


군산에서 은행 다음가는 재력가로 알려졌던 최현칠 옹은 1953년 전쟁 직후 염전 사업을 구상했다. 최인성 씨는 그의 맏아들이다. 사업 수완이 좋았던 그는 군산에서 백화점에 버금가는 큰 물류 상회를 운영했고, 미군 부대에도 여러 물품을 납품하면서 큰돈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나라에서는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의 생계를 위해 염전 조성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잘 알려진 신안군 증도의 태평염전이나 경기도 화성의 공생염전이 비슷한 시기에 조성됐다. 소금은 국가에서 전량 수매해서 판매까지 독점하는 전매사업이었고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었다. 더구나 조기 황금어장을 가까이 두고 있는 무녀도에서 소금을 직접 생산한다면, 고깃배들이 멀리 군산까지 가서 염장하지 않고, 직접 구매할 거라는 타산도 가능했다.      


처음 구상은 무녀봉 가까운 안쪽으로 15정(약 4만 5천 평, 1정은 3천 평) 정도를 생각했다가 무녀 2구에서 통학하는 아이들이 멀리 10리 길을 에돌아 다니는 걸 보고 서드리와 모개미를 직선으로 연결하기로 계획을 바꿨다고 한다. 대신 바깥쪽 파도와 바람을 견뎌내야 하는 어려움이 따랐지만 감수키로 했다. 공사는 방조제 양쪽에서 시작해 중간지점에서 물막이 공사로 빠르게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순탄치 않았다. 모든 장비를 바지선에 싣고 예인선으로 실어 날라야 했고 변변한 중장비가 흔한 시절이 아니어서 도중에 군부대 도움도 청해야 했다. 레일을 깔고 큰 돌덩이를 궤도차에 실어 나르는 거의 모든 작업이 사람 손을 거쳐야 했다. 중간에 두 번이나 방조제가 터지는 사고가 생기면서 완공은 늦어지고 공사비 부담도 커졌다. 예상보다 3배가 넘는 7천8백만 원을 쏟아부었다. 당시 시세로 서울에 7층 빌딩 3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이자 비싼 사채까지 끌어다가 1962년 1월 겨우 마무리했다. 때마침 염전 사업이 민영화로 전환되었지만,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금 압박으로 공들여 다진 염전 9할이 사채업자에게 넘어갔다. 남겨진 1할이 현재 ‘완양염전’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1만 2천4백 평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16 군사 쿠데타로 들어선 정권은 정치적 경쟁자인 김대중의 후원금 상당이 목포와 신안 일대 염전에서 나온다는 점을 알고 소금값 폭락을 유도해 망한 염전을 국가가 인수하는 정책을 폈다고 한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섰던 사업가였어도 마지막 2년을 버텨내지 못했다. 최현칠 옹은 결국 손을 떼고 섬을 떠났다. 가세가 기울자 큰아들이었던 최인성 씨도 객지로 떠돌았다. 버려진 염전에서 마을 사람들이 소금을 내기도 하고 일부는 논으로 바꿔 벼농사를 짓기도 했었다는데 몇 년 후 최현칠 옹은 무녀도로 돌아와 염전 일을 다시 시작했다. 소금 일을 가업으로 이어 주기 바랬던 아버지의 요청으로 1978년 서른여덟 청년도 무녀도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한 5년 있다가 도망칠 요량이었다는데, 파란만장했던 가족의 애환이 담긴 땅을 차마 떠날 수 없어 지금까지 눌러앉게 되었다. 아마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라고 한다.     

 

최인성 씨는 4년 전 뇌경색을 앓기 전까지 소금을 냈다. 숫자와 연도에 관한 기억이 여전히 또렷했고, 체력을 회복했다고는 하지만 혼자서 겨우 가게나 볼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더구나 험한 일 할 사람 구하기도 쉽지 않다. 간신히 또래의 일꾼을 구했는데 그도 이미 칠십을 넘긴 고령이어서 얼마나 더 소금을 낼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했다. 다만 소금밭은 아직 멀쩡해서 올해 날씨만 좋으면 소금꽃 피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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