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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구나무 Jun 21. 2022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낡고 소박하다.

상가들이 밀집한 거리를 돌아 안내받은 자리를 더듬어 선유도 초중학교 근처까지는 왔는데, 딱히 간판이나 이정표를 찾을 수 없다. 두리번거린다. 학교 정문에서 오른편 마을 안쪽 골목길로 들어서자 비로소 작은 종탑이 눈에 들어온다. 길 끝, 야트막한 언덕이다. 마을 집들 지붕보다 약간 도드라진 건물 위로 겨우 솟은 종탑이 아니었으면 교회 건물이라 알아보기도 힘들게 평범하다. 더욱이 바로 옆에 육중한 높이 철골 통신탑 때문에 종탑은 더 작고 왜소해 보인다. 담장이나 대문도 따로 없다. 가장자리에 심은 키 작은 꽃들을 따라 놓인 거친 시멘트 포장 오르막길은 아침 비질이 정갈하다. 인사를 건네는 목사와 차를 내주는 사모의 첫인상도 그렇다.          

졸다가 내려야 할 목적지를 지나쳐 잘못 내린 간이역처럼 왔던 선유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선유도는 제주도가 아니었습니다. 전혀 이국적이지도 않았으며 사시사철 우아한 신혼부부의 여행지는 더더구나 아니었습니다. 마을 앞 개펄에 고깃배가 몇 척 조용히 얹혀 있는, 비릿하고 파리가 떼로 몰려다니는 그냥 조용한 섬이었습니다. 바람 불어 파도가 바다를 뒤집어 놓으면 올 수도 갈 수도 없는 지구의 끝일 뿐이었습니다.     

                                                               - 바다의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류순화, 신망애 출판. 1997


올림픽 열풍이 온 나라 안을 휩쓸던 그해. 서른넷의 그와 스물아홉의 그녀는 장마 끝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8월 초에 선유도로 들어왔다. 8톤짜리 교회 장로님 배에 이삿짐을 싣고 원색 차림의 피서객들 틈에 끼어 선착장에 내렸다. 짭짤하고 비릿한 바다 냄새와 물 한 방울이 아쉬워 제대로 씻지도 못했던 첫날, 결국 저녁을 식당에서 사 먹고 소금기가 허옇게 말라붙은 옷과 몸 그대로 자리에 누워야 했다. 목사 내외는 그 첫날밤을 잊지 못했다.      


목사는 ‘강냉이죽 한 그릇에 목사 된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전쟁 직후 형제 많은 집에 태어난 그는 교회에서 나눠주던 강냉이죽과 밀가루를 먹고 자란 세대다. 배급 주던 사람에게 무심코 했던 약속 때문에 교회에 나갔다가 신학교를 지원했고, 어쩌다 보니 연고 하나 없는 선유도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부임한 일주일도 안 돼 난감한 문제에 봉착했다고 한다. 물과 전기 때문이 아니었다. 교회가 들어앉은 땅을 두고 시비가 붙었다. 처음 땅 주인은 교회를 통해 배급됐던 원조 밀가루가 고마워서 땅을 양도했었다. 말이 매매였지 도장 찍힌 문서 하나 제대로 없고 서로 고맙고 고마운 마음에 기부라고 생각했었던 듯싶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로 가면서 여당 후보 입에서 툭 불거져 나온 새만금 지역 개발 공약이 자식들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부모는 돌아가신 뒤였고, 이미 오래전 섬을 떠나 도시 사람이 된 자식들 눈에 땅의 가치는 달리 보였다. 마침내 소송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마음 한편 불편함을 쉽게 지울 수는 없었다.      


선유도 교회는 1958년 소금 창고를 예배 처소로 개조하면서 시작했다. 오흥덕 목사가 오기 전까지 16명의 목회자가 다녀갔다. 평균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떠난다는 섬 사역. 그도 역시 힘들었다고 한다. 처음 3년 동안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있는가’라는 스스로 질문에 답을 내지 못했다. 사람들 마음 깊이 뿌리내린 패배 의식. 배우지 못했고, 가지지 못한 ‘섬 놈’이란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였다고 한다. 마치 탄광 속을 드나드는 막장 인생처럼 내일이 없고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교회가 무엇을 주어야 하나.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어야 했다.


그리고 훌쩍 삼십 해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선유도에서 얻은 딸아이가 그때 아내의 나이만큼 자란 시간의 길이. 어떻게 견뎌왔냐는 질문에 그는 그저 웃으면서 자기보다 아내가 더 힘들었을 거라며 대답을 피한다. 한참 때는 장년 95명, 유년 주일학교 120명, 중고등부 33명에 이를 만큼 선유도 교회의 부흥기도 있었다. 선유도만이 아니다. 선유도 교회는 고군산군도 개척교회를 지원하는 배후 거점지 역할까지 맡았다. 지금은 ‘선교지 섬 이야기’라는 목회 정보지 발간사업을 통해 섬 교회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일도 그의 몫이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사람들 눈빛이 변해 있었다고 한다.     



고군산군도 섬사람들의 삶을 바꿔 놓은 또 한 사람이 있다. 1959년 52세 나이로 섬 선교에 나섰던 추명순 전도사다. 그녀는 고군산군도 끝 섬 말도까지 들어가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 속에 밀알이 되었다. 고군산 선교지 구석구석 그녀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구호 물품을 받아 구제사업을 하고 신앙생활로 뿌리 깊은 미신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녀는 24년간 11개 유인도에 8개 교회를 개척했고 1986년 76세 나이로 말도 교회에서 은퇴했다. 1994년 11월에 소천했고, 그녀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꾸려져 얼마 전 <추명순 전도사>라는 책도 출간했고 말도에 기념관도 마련될 예정이다.     


나라와 학교가 다 채울 수 없었던 빈자리를 교회가 대신해왔던 시절이 있었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길은 더 간절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한 시절을 보내고 이제는 겨우 살만한 섬들이 되었다. 새로운 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다. 험한 뱃길 대신 육로가 놓이고 언제든 통화할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낮은 선유도 교회의 종탑과 바로 옆 훨씬 더 높이 솟은 통신탑은 의미심장한 대조다. 한때 떠들썩하던 아이들이 떠난 섬에 밥벌이를 찾아 도시에서 선유도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늘었다. 교회를 찾는 신도는 해마다 줄어가고 있다. 알게 모르게 섬의 땅 주인들도 바뀌고, 새로운 이들과 원주민 사이에 다툼도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를 고민하는 선유도 교회 목사와 사모의 시름도 깊어 보인다.      


두 시간 남짓 인터뷰도 부족해 두툼한 선교지 묶음을 건네준다. 말없이 빙그레 소 웃음만 짓는 사람이라던 소문과 달리 삼십 년 교회사를 조목조목 끄집어내는 목소리는 잔잔하고 깊은 울림이 있었다. 교회 앞까지 배웅 나온 그는 사진 한 장 찍자는 말을 극구 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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