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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구나무 Jun 15. 2022

말도에서 만난 귀촌 부부

오전 배를 타고 말도로 들어갔다. 반나절 섬을 돌아보고 오후 배로 다시 나올 심산이었다. 어항 근처 선착장에 내리자 마을 주민 한 분이 경운기를 몰고 나왔다. 너나없이 경운기에 짐을 얹고 몸도 싣는다. 내게도 행선지를 물었지만, 딱히 정해놓은 걸음이 아니어서 멀어져 가는 경운기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뗐다. 여객선이 돌아나가는 바다 너머로 해가 중천에 오르는 수평선은 아슴푸레하게 멀다. 고군산군도 중에서도 맨 끝 섬, 말도에서 바다를 훌쩍 건너 육지 쪽을 되돌아보는 기분은 묘하다.      


마을로 이어진 길은 고작 삼백 미터였지만 객선에서 짐을 들고 움직이기엔 만만찮은 걸음이다. 더구나 주민들 나이를 생각해보니 경운기를 몰고 나온 속 깊은 배려로 마을 인심을 가늠해본다. 절개된 해안을 따라 놓인 길은 다양한 습곡 모양 암석의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눈요기도 잠깐이다. 마을에서 가까운 선착장에 이르자 20여 채 집들이 경사를 따라 들어앉았다. 담이 없다. 울타리도 없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이 너나없이 정겹다. 마을 초입 왼편 길옆에 버려진 이승복 동상과 책 읽는 소녀상이 건물도 하나 없는 공터의 전력을 짐작케 한다. 맞은편 2층짜리 마을회관 건물도 오래 비워둔 묵은 티가 난다. 마을을 가로질러 능선 쪽으로 달라붙은 길은 작은 텃밭 사이로 가지를 쳐서 경계도 없이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로 흩어진다.        

       


깔끔하게 단장한 교회를 지나 능선 가까이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서 새로 지은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대문이 따로 없어도 키 낮은 울타리 너머 마당이 정갈하다. 마치 야외공연장 맨 뒷자리 객석처럼 마을 전경과 선착장 너머 고군산 바다와 하늘이 한꺼번에 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다. 집이며 마당이며 막 물이 오른 키 작은 봄꽃들에 한눈을 파는 중인데, 초로의 사내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집주인인 듯싶다. 마치 뭔가를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놀란 나를 다짜고짜 들어오라고 청한다. 잠시 통성명하고 서로의 이력을 뒤적여 알만한 이름을 찾아가고 있는 사이 텃밭에서 돌아온 안주인도 깜짝 반긴다. 아까 배에서 내릴 때 이미 나를 봤으니 벌써 구면이라고 한다.      


박정남 조미영 부부는 말도로 귀촌한 사람들이다. 궂은날이 아니면 주말마다 섬에 들어와 지내다 가기를 4년째라고 한다. 공무원인 정남 씨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퇴직하면 아예 말도로 옮겨올 작정으로 집도 지었고 텃밭도 일군다. 만경 능제에서 치르는 선박 운행시험도 봤고 항해사 자격증도 따놨다. 섬에 살려면 무엇보다 배가 있어야겠다 싶어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그렇게 맺은 인연은 한 달 뒤에도 이어졌다. 아예 하루 묵을 작정으로 들어오란다. 좋은 안주가 있으니 술도 한 잔씩 하자고 했다.        

       

정남 씨는 요즘 통발 놓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 아직 배가 없는 그가 섬에 들어오면 맨 먼저 통발부터 들고나간다. 안주로 내온 것도 그 통발로 잡은 것들이다. 처음에는 주말 먹을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들어왔는데, 통발치고 텃밭을 가꾸면서 쌀 하고 밑반찬 정도만 챙기니까 짐이 확 줄었다. 소식을 전해 듣고 고두만 이장까지 합석했다. 전날 잡은 광어가 좋다며 회를 쳐서 들고 왔다. 푸짐하다. 술잔이 돌고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붉은 웃음꽃이 터진다. 별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살아온 이야기를 꺼내고 세상살이 씹어가다가 잔이 비면 또 술을 채운다.      


미영 씨는 소위 문학소녀였다.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막연히 시골을 동경해왔을 만큼 순수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 7남매 중 큰아들인 남편을 만나 장성한 두 아이까지 키워낸 억척스러움을 동시에 지녔다. 오빠 소개로 만난 남자는 운명 같았다고 한다.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했던 남편은 늘 입버릇처럼 나이 먹으면 산골로 들어가자 했는데, 옥도면장을 지내면서 인연을 맺은 말도에 취해 자기도 마음 고쳐먹었다고 한다. 초로의 나이들인데도 두 사람은 눈 맞추며 바보같이 웃기를 반복한다.      



고두만 이장은 소문난 머슴이었다. 성실하고 근면해서 벌써 20년 가까이 말도 이장을 맡아 왔다. 그날 자리가 초면이었지만, 관리도 이장님을 만났을 때나, 장자도나 방축도에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 때문에 술자리는 화기애애해진다. 사라진 영신당 이야기가 안주로 올랐다. 여느 당집과는 달리 말도 영신당은 규모가 컸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당집으로는 보기 드물게 팔작지붕을 얹었고 족히 한 아름이 됨직한 8개 기둥과 각주마다 공포를 장식해서 상당한 예산과 정성을 들인 건물이었다. 이장의 기억으로는 영신당 신축에 마음을 보탠 이들의 이름이 적힌 비석도 한구석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말도에 들어온 목회자에 의해 주민들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바다로 일 나간 사이 중장비를 동원해 철거해버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두만 씨는 그 일 이후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도둑맞은 장도칼 이야기도 꺼냈다. 당제를 지낼 때 돼지를 잡을 만큼 예리하게 날이 섰었는데 해군홍보단이 다녀간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을 잡은 것도 아니어서 이미 잃어버린 보물들을 생각하면 마음만 아플 뿐이다.  

    

대문도 담도 없는 마을에는 비밀도 없다고 한다. 비밀이 있을 만큼 서로 감출 것도 없고, 비밀이 지켜질 만큼 넓지도 않은 섬이다. 낯선 이가 들어오면 그가 사진기를 들었는지 어디를 다니는지 누굴 만났고 무슨 말을 나눴는지 거의 실시간 중계된다고 한다. 아마 나도 그랬을 것이었다. 이런 이웃과 속 터놓고 지낼 수 있을까. 박정남 조미영 부부는 잘 적응할 듯싶다.


어촌이나 농촌으로 귀촌한 많은 이들이 이웃의 지나친 관심이나 텃세, 어촌계의 높은 장벽 때문에 다시 떠난다고 한다. 낭만적으로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막상 살려고 작정하고 겪어보는 섬은 만만찮다. 10년 후 나는 어떨까. 집으로 돌아가는 고두만 이장의 뒷모습이 길모퉁이 뒤로 사라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별빛 아래 샛노란 구실잣밤나무 꽃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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