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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구나무 Jun 16. 2022

말도 등대

항로표지(航路標識, Aids to Navigation)

등광, 형상, 색채, 음향, 전파 등의 수단에 의하여 항, 만, 해협 기타 대한민국의 내수, 영해 및 배타적 경제수역을 항행하는 선박의 지표로 하기 위한 등대, 등표, 입표, 부표, 무신 호소, 무선 방위 신호소 기타의 시설을 뜻한다.              



등대의 공식 명칭이다. 뱃길을 안내한다는 기능만으로 정의된 항로표지법상 개념에서 사람 냄새는 맡아지지 않는다. 외롭다거나 쓸쓸하다는 일체 감정이 배제된 단어, 무미건조한 그 언어가 주는 거리감은 불빛이 닿는 먼바다 어디만큼이나 멀다. 나는 등대를 찾아왔다.     


고군산군도의 등대들은 섬의 숫자보다 많다. 파도를 막아선 방파제 끝에도 있고, 만조시 바다에 잠기는 암초에도 솟아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에도 등대는 있다. 어청도를 빼면 말도 등대는 고군산 일대에서 유일한 유인 등대였다. 군산에서 오자면 뱃길로도 꼬박 두 시간이다. 마을 가까운 선착장에서도 한참이나 멀다. 서해 먼바다로 막힘없이 열린 최북 서단 절벽 끝에 등대는 서 있다. 우연히 보급품을 실으러 나온 등대지기를 본 적이 있었다. 짐칸이 딸린 작은 전동차를 끌고 왔다. 그는 말이 없었다. 객선이 접안을 시도하는 내내 무심한 눈길로 배를 응시했다. 물건을 내릴 때 선원과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고 곧장 짐을 옮겨 싣고 선착장을 벗어났다. 등대로 향하는 길은 마을로 이어진 길 반대편이다. 외롭다기보다 고단해 보였다.      


가까운 걸음으로 다가선 등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른다. 높이 26미터, 팔각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은 지난 2007년 새로 지은 등대다. 등탑의 문을 열고 회전 계단을 타고 오르면 등불을 밝히는 등롱이 있을 것이다. 백 년도 넘는 세월의 바다를 지켜왔던 예전 등대는 철거됐다. 일제는 조선의 국권 침탈에 앞서 이곳에 등대를 세우고 뱃길부터 열었다. 곳곳에 도사린 암초를 품은 섬들이 조밀하고 밀물과 썰물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서해 연안의 지리에 어두운 적선의 길잡이를 했다. 등대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군인을 실은 전함이 들어왔고 군산항에서 쌀을 실은 배가 빠져나갔다. 해방 후에는 조기 떼를 쫓아온 어선들의 북상을 도왔으며 남하하는 홍어와 대구 무리를 지켜봤다.      


어둠이 하늘과 바다를 삼키는 시간에 등대의 존재감은 빛을 발한다. 10초에 1초씩 깜박이는 백색 섬광은 26해리(약 48킬로미터)까지 뻗어간다.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뿜어내는 빛으로 등대는 구분된다. 회전하는 빛줄기는 태풍이 몰아온 비바람도 뚫는다. 안개가 밀려오면 불빛 대신 안개 피리로 자신을 알린다. 등대의 존재는 곧 위험이다. 그래서 등대가 짊어진 고독은 숙명이다.               



2004년 한 일간지에 실렸던 등대지기 모집 관련 기사는 바람 찬 밤바다보다 더 암울한 현실이 읽힌다. 인천 해양수산청이 낸 2명의 등대원 모집 공고에 57명이 지원했다. 28.5대 1 경쟁률이다. 그 이듬해는 1명 모집에 45명이나 몰려 사상 최고 경쟁이 벌어졌다. 등대원은 업무가 힘들고 근무조건도 열악해 대표적인 기피 직종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고 한 달에 겨우 일주일 가량만 뭍으로 나올 수 있다. 밤에 일하는 등대의 시간에 맞춰 등대원 또한 낮밤이 바뀐 하루를 살아야 한다. 수당이 포함된 연봉이 1천5백만 원에 불과한데도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 지원자도 늘었다고 한다. 우수한 인력을 뽑을 수 있다고 반길 일만은 아니다.      


항로표지 안내원, 등대를 지키는 이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임무와 역할이 명시된 말은 결코 낭만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얼어붙은 달그림자를 떠올리거나 파도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 저 이름이 선착장에서 스쳐 갔던 이의 표정을 닮았다. 몇 번을 망설였으나 나는 끝내 그를 취재하고 싶다는 연락을 하지 못했다.


2019년 8월 말도의 등대지기는 철수했다. 말도 등대는 이제 무인 등대다. 등대지기도 떠나고 등대만 남았다. 사람 없는 저 등대가 지키는 바다, 불빛은 여전히 깜박이겠지만 누군가의 따사로운 눈길과 뱃사람들의 안녕을 바라는 기도가 빠진 바다에서 등대의 불빛은 바람에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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