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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구나무 May 27. 2022

섬 여인의 일생

내년이면 아흔이다. 날씨가 궂은날이면 관절 마디마디 안 쑤신 데가 없다. 두어 달에 한 번씩 육지에 나가 병원을 돌며 약을 받아오는 것이 빼먹을 수 없는 일과다. 그렇게 받아온 약봉지들을 끼니마다 거르지 않고 챙겨야 한다. 하지만 1923년으로 기재된 주민등록증을 본 공무원들이 놀랄 만큼 어머니는 듣고 말하는 것이 또렷하다.      


어머니의 고향은 장자도다. 이곳에서 태어났고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세워졌던 국민학교를 다녔다. 일본인 선생 밑에서 한글 대신 일본어를 배우기도 했지만 거의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오래 적 일이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섬에 들어왔던 남자와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아직껏 섬을 떠난 적이 없다. 섬에서 낳아 기른 아이들 대부분 섬을 떠났지만, 아직 섬에 남은 자식들도 있다. 가까이 사는 큰아들 내외와 저녁 식사를 자주 하지만, 아침 점심은 혼자 드시기도 하고 일꾼들과 같이 먹기도 한다.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작은아들도 가끔 얼굴 보며 지낸다. 먼저 보낸 자식도 있다. 성년이 되기 전에 몇 해를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큰딸 무덤이 대장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간혹 저녁노을이 붉은 시간에 아무런 말도 없이 그곳에 앉아 계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곤 했다. 눈물을 훔치고 계실 때도 있었다.    

            


집 앞 빈터에 마련한 텃밭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어머니의 삶터다. 고추가 두 줄, 상추와 부추, 파, 들깨 그리고 호박이 두어 줄기 자라고 있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큰 며느리를 위해 청양고추가 십여 그루, 매운 고추를 잘 못 먹는 둘째 아들을 위해 오이 고추를 골고루 심었다. 식구들이 먹을 부식거리도 필요하지만, 큰아들 김 양식을 거드는 일꾼들 밑반찬에도 요긴하다. 겨우 스무 평 남짓한 작은 터에 고작 서너 이랑 정도 될 듯싶다. 오래전 섬을 떠난 이웃들이 남기고 간 빈자리다. 그나마 지금은 쓰지 않는 우물이 가까이 있어 한여름 가물 때도 큰 걱정 없이 채소를 거둘 수 있다. 새벽부터 일어나 사람 손이 닿지 않는 샘물을 찾아다니며 물을 받아와야 했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이마의 깊게 파인 상처는 열대여섯 살 무렵 비 온 다음 골진 갯바위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생겼다. 고인 빗물을 길어다 빨래를 하려고 했다고 한다. 주로 먹는 물은 대장도 너머 할매바위 아래쪽 네댓 개 샘에서 길어왔지만, 빨래까지 엄두 낼 정도가 아니었다. 작은 섬이었지만 어린 시절 장자도에는 사람이 많았고, 물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동네 가운데 우물은 늘 목말라했다. 이웃들은 아예 뗏목에 빨랫감을 싣고 선유도 선유봉 아래쪽 너른 터의 샘물 자리를 오가기도 했다. 그래야 겨우 밥도 짓고 빨래도 할 수 있었다.      


논을 만들 땅도 없었지만, 설혹 논이 있다 해도 벼농사 지을 물이 없었다. 고군산군도를 통틀어 신시도를 빼고는 따로 논이 없는 이유다. 쌀은 가까운 김제나 부안에서 구해왔다. 가을 추수철이 지나면 남자들이 젓갈 통을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넜다. 김장 때 쓸 젓갈과 햅쌀을 물물 교환했고, 사과나 배 같은 과일도 실컷 맛볼 수 있는 유일한 때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물 사정도 많이 나아졌다. 장자도까지 이어진 도로가 뚫리면서 이제 멀리 진안고원에 있는 용담댐 물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비탈을 막아 저수지에 빗물을 받고, 바닷물을 담수화해서 수도관으로 집집마다 공급했다. 그래도 가정마다 커다란 물탱크 한두 개쯤 마련해두어야 물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민물과는 달리 특특하고 사나운 수돗물은 비누가 잘 풀리지 않아 때가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비싸게 담수화한 물을 겨우 허드레 물로 쓰고 먹는 물은 따로 육지에서 생수를 사다 먹기도 했었다. 돌이켜볼수록 기가 막혔던 시절이었고 이렇게 편리한 시절이 올 거라는 꿈도 꾸지 못했다.      

오후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어머니가 동네 마실을 나설 모양이다. 장자도 복합센터 앞 평상은 몇 남지 않은 어머니의 말벗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렇게 수다를 놓다 보면 학교를 마친 손주 녀석들이 돌아오고 그럭저럭 가족이 모여 이른 저녁을 먹곤 한다. 텃밭을 보면서 입었던 몸빼 바지를 갈아입고 마당 한쪽에서 유모차를 꺼냈다. 이런저런 물건을 실어 담을 수 있는 유모차가 지팡이보다 편했다. 낮은 내리막 골목길을 돌아나가는 어머니의 등이 대장봉 봉우리만큼이나 굽었다. 어머니의 굽은 허리가 대장봉 봉우리에 올곧이 포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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