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구나무 Jun 28. 2022

칠게와 도요새

바다가 멀어지면 섬은 제 몸집을 욕심껏 부풀린다. 그렇다고 온전히 섬도 아니고 바다라고 부르기도 모호한 경계가 갯벌이다. 봄이 무르익어가면서 허허벌판 같아 보이던 갯벌은 부산해진다. 분명 뭔가 살아 움직이지만, 그들은 너무 빠르거나 혹은 너무 느려서 사람의 시선이 좇지 못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제각각 콩알만 한 덩어리 무덤이 크고 작은 구멍 주변으로 남겨져 있다.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크기도 작은 콩게 무리는 불과 몇 시간 후면 허물어질 구멍을 파고 또 판다. 구멍의 크기로 미루어 짐작되는 몸집은 결코 크다 할 수 없다. 집 없는 달팽이처럼 느릿한 민챙이나 이름 모를 고동들은 죽은 물고기나 바지락 주변에 몰려있다. 그들은 거의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곡예 비행운처럼 그려진 구불구불한 궤적은 분명 그들의 이력이다. 크기와 모양도 천차만별인 구멍만으로 낙지가 숨었는지 이러저러한 조개인지를 가려내는 일은 시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차라리 눈을 감으면 조금 낫다. 바람에 실린 갯비린내며 발바닥을 타고 오르는 미지근한 기운 그리고 멀리서 가물거리는 물새 소리 같은 갯벌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갯벌이 품고 있는 생명의 존재는 식탁 위에 올라서야 비로소 가까워진다. 같은 해변에서 자랐어도 저마다 품고 있는 바다의 맛은 가지각색이다. 백합 우려낸 국물의 빛깔과 향은 또 다른 깊이를 가진 바다다. 잘깃하게 씹히는 조갯살은 새우나 갯가재와는 전혀 다른 질감이다. 난도질을 당하고서도 꿈틀대는 낙지의 실체는 입천장까지 들러붙는 빨판의 위력을 겪어보면 달리 보인다. 밥상의 주연은 아니어도 칠게만큼 다채로운 조연도 없다. 뭐 하나 뗄 것 없이 통째로 튀겨먹고, 간장으로 담가 먹고, 고추장에 버무려 무쳐도 먹는다. 제법 비싼 꽃게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가격에 부담도 덜하고 무장한 갑옷이나 집게가 생각보다 연하다. 밑반찬으로 두고 오래 먹어도 좋고 담백한 술안주나 고소한 간식거리로도 제격이다. 냉동 보관해 둔 칠게는 일 년 내내 반찬가게 단골 메뉴로 꾸준히 인기를 누린다.     


칠월이면 칠게가 제철이다. 대한민국 어느 갯벌에서든 흔하디 흔한 존재가 칠게다. 고작 엄지손가락 정도 작은 덩치지만 하는 일 많은 바쁜 일꾼이다. 진흙 바닥에 굴을 파고 숨어 지내다가 하루 두 번 바다가 밀려가면 갯벌에 해초나 죽은 동물 사체를 먹어 치운다. 다시 물이 들어오기 전에 배를 채우려면 마음이 급하겠지만, 불행히도 칠게를 노리는 천적들이 널린 게 또한 갯벌이다. 칠게 맛은 낙지도 알고 새들도 안다. 특히 마도요나 알락꼬리 마도요처럼 덩치 크고 길게 굽어진 부리를 가진 철새들이 제일 좋아하는 먹잇감이다. 이들의 부리는 아예 칠게가 숨은 구멍의 깊이와 모양새에 최적화되도록 진화했다. 길이가 머리 크기 3배나 된다. 아무리 좋은 시력을 갖추고 발 빠르게 몸을 감추는 능력을 타고난 칠게지만 막장까지 치고 들어오는 도요새의 부리를 당해내지 못한다. 속수무책이다. 새들은 잡은 칠게를 흔들어 다리를 절단하고 바닷물에 씻어 먹는 여유까지 부린다.

일 년에 두 번, 봄·가을에 우리나라를 찾는 도요새 무리는 가장 멀리 나는 새로 잘 알려져 있다. 따뜻한 동남아시아와 호주에서 겨울을 지내고, 시베리아와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번식한다. 새만금을 비롯해 우리나라 서해안 갯벌은 이 나그네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호주에서 이곳까지 그리고 다시 시베리아까지 지구의 끝에서 끝을 잇는 장거리 비행에 필요한 에너지를 한반도 갯벌에서 구한다. 지축을 따라가는 이들의 비행경로는 모래시계의 중심처럼 한반도와 서해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알락꼬리 마도요지만, 세계적으로 3만 2천여 마리 정도만 남겨진 국제적인 보호종이다. 안타까운 점은 서해안 갯벌이 점점 사라져 왔다는 사실이다.         

      


칠게와 알락꼬리 마도요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식지 감소에 씨를 말리는 남획까지 자행되고 있다. 허허벌판 감시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설치된 불법 어구는 치명적이다. 천적을 감시하려고 길게 발달한 눈 자루는 발밑에 갯벌 바닥 함정을 살피지 못한다. 무더기로 잡힌 칠게는 가격 폭락까지 불러왔다. 킬로그램당 5만 원 정도 하던 칠게 값이 절반대로 떨어졌다.      


조기 파시로 서해 전체가 흥청거리던 영화도 빛바랜 추억일 따름이고, 동해 명태가 지천이라던 말도 다 옛말이다. 퍼내도 퍼내도 마를 것 같지 않던 바다도 노가리까지 즐겨 먹던 사람의 입을 결국 당해내지 못했다. 조기는 제사상에나 오르는 귀한 몸이 되었고 명태는 우리 바다에서 자취를 감췄다. 칠게와 낙지 그리고 알락꼬리 마도요와 인간이 언제까지 공존할 수 있을까.     

이전 09화 무녀도 모감주나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