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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구나무 Jul 13. 2022

섬들이 사라지고 있다

- 에필로그

육지는 늘 바다를 탐해왔다. 인간이 발 딛고 사는 곳이 육지였기 때문이다. 만약 인류가 어류처럼 바다에서 진화했다면 지구의 풍경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초기 인류의 조상이 먹고 버린 조개무덤이 강과 바다를 끼고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손쉽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땅을 일궈 농사를 짓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은 바다에서 건져낸 것을 먹어왔고, 먹고 남은 것을 바다에 버려왔다.      


남겨진 기록의 궤적을 더듬어가면, 지난 한 세기 내내 전라북도의 땅이 바다로 뻗어나간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로는 대한제국 말기, 당시 선혜청 당상관이었던 이완용이 만경강 인근 옥구읍 남안을 간척했다는데, 동진강 줄기를 조금만 따라 거슬러 오르면 간척의 뿌리는 삼국시대까지 뻗어간다. 벽골제는 제방을 쌓아 물길을 막고 습지를 메워 농사지을 땅을 개간해왔던 농도(農道)의 자랑찬 역사다.      


나라의 주권을 잃고 땅을 내어주었던 일제강점기에도 간척의 역사는 이어졌다. 1920년대 일본인 아부가 설립한 동진 농업 주식회사는 동진강 하류 북단에 광활 방조제를 쌓고 간척지에 대규모 이민촌을 세웠다. 또 다른 일본인은 군산 옥구 옥서면과 미성동 지역에 펼쳐진 갯벌을 메워 농지를 조성했다. 입이도와 무의인도, 가내도 3개 섬은 그때 사라졌다.                



계화도가 육지가 된 것은 해방 이후, 1960년대다. 일제가 구상했다가 패전으로 무산된 이 사업은 ‘한국 최초의 대규모 간척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추진되었다. 계화도를 가운데 두고 두 개 방조제로 바다를 막아 안쪽에 농경지를 만들었다. 농사지을 물은 멀리 섬진강댐을 막아 산을 넘겨 끌어왔다. 수몰된 산골 마을 주민들을 바닷가 간척지로 이주시켰다. 공사를 시작하고 20년이 넘어서야 겨우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실향민들도 이주를 시작할 수 있었다. 품질 좋은 계화미를 생산해내는 2,741ha 광활한 이 땅은 조성 당시 ‘광복 이후 최대 간척지’로 아직껏 ‘우리나라 식량 증산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안 앞바다에 떠 있던 섬, 계화도는 이때 육지로 편입됐다.       


식량 자급과 더불어 또 다른 ‘조국 근대화의 상징’은 산업화였다. 토지의 용도는 달랐지만, 갯벌을 매립해서 땅을 얻으려는 시도는 다르지 않았다. 군산지방 산업단지(172만 평), 군산국가 산업단지(207만 평) 그리고 군장국가 산업단지 군산 지구(482만 평)라는 각각의 별칭에도 불구하고 5차례 진행된 단지 조성사업을 통해 새로 얻은 땅이 1671 만여 평이었다. 간척과 매립은 국토 확장이라는 시대적 소명 앞에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행해졌다. 오식도, 내초도, 장산도, 조도, 비응도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기왕의 간척사업들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계획대로라면 서울 면적의 3분의 2, 여의도 면적의 140배 규모라는 신천지가 생긴다고 한다. ‘단군 이래 최대 간척사업’이라는 새만금 사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세계 최장이라는 방조제가 바다를 가로지르면서 마치 구슬을 실에 꿰듯 야미도와 신시도 그리고 두 개의 가력도를 육지로 이었다. 곧이어 신시도에서 장자도까지 뻗어간 연륙교는 선유도와 무녀도, 대장도까지 배가 아닌 차로 다닐 수 있도록 바꿔놨다. 바다를 잃어버린 섬이 언제까지 섬으로 기억될지 모르겠다.          



배수갑문과 33 센터 그리고 새만금 준공 탑이 놓인 신시도는 방조제 한중간이다. 높이 또한 33미터짜리 기념탑은 2010년 4월 27일 방조제 준공을 기념하여 세웠다. 안내문에는 인간 중심 녹색환경의 조화를 바탕으로 세계 속의 한국으로 뻗어나가는 약속의 터전에 디딤돌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적혀 있다. 탑 뒤편에 세 개 석판이 있다. 가득한 곡식 위로 풍력발전기와 비행기, 높이 솟은 마천루와 골프 치는 사람이 그리고 또 다른 석판에는 파도 위로 뛰어오른 물고기와 갈매기가 조각되어 있다. ‘새만금 대한민국 녹색 희망’이라고 새겨진 어느 대통령 필적이 놓인 가운데 석판에는 마지막 물막이 공사 장면도 담겨있다. 좌우에서 뒤를 마주한 덤프트럭이 바윗덩이를 쏟아내고 있고 환영인파로 보이는 사람들이 태극기와 현수막을 들고 있다. 돌에 새겨진 그들은 아직도 만세를 부르고 있다. 한쪽에는 이 사업에 공을 세운 이들의 이름도 남겨져 있다.      


등 뒤로 정점을 넘긴 해가 기울어가지만 길어지는 탑의 그림자 저편에서조차 사라진 섬들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육지의 포로가 된 이상, 아무리 작아도 바다 위에서 당당했던 섬들의 자존감은 희미해져 갈 것이다. 섬을 섬이라 부르던 이름은 더러 노인들의 흐릿한 기억을 떠돌다가 결국 잊힐 것이다. 섬을 떠나간 아이들이 부모의 고향을 잊어가듯 바다도 파도로 키웠던 섬의 기억을 지워갈 것이다. 지도에서조차 찾을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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