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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구나무 Jul 07. 2022

망주봉에 서린 슬픔

선유도 북쪽 높이 150여 미터로 솟은 두 개의 암벽 봉우리, 망주봉(望主峰)이다. 남다른 모양새 때문에 고군산 바다 어디에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이정표다. 봉우리는 살이 벗겨져 앙상한 뼈를 드러낸 무릎처럼 바위산이다. 모진 바람 때문인지 정상부는 표피를 덮을 흙도 나무도 없다. 키 작은 소나무나 노간주나무 정도가 중턱 바위틈새에 겨우 달라붙어 자란다.            

    

선유도 망주봉


망주봉에 오르는 길은 로프를 잡고 올라야 한다. 말뚝을 박아 이어놓은 밧줄에 의지해도 가파른 경사는 만만치 않다. 쉴 자리도 여의치 않다. 대신 시야를 가로막는 방해물 하나 없이 펼쳐지는 풍경은 위로가 된다. 팽나무와 해당화 군락이 있었다는 발치 아래 모래톱은 빈 바람만 머물다 간다. 어느 해 태풍에 뿌리가 뽑혀 시름시름 앓다 고사했다는 팽나무는 낡은 사진 속에서만 남아 있고, 아무개 서장이 당뇨에 좋다며 뿌리째 캐갔다는 해당화 군락은 이제 말뿐이다. 신시도와 무녀도를 잇는 돛단배 모양의 현수교가 새로운 풍경을 만들었다. 다리와 연결도로가 뚫리면서 선유도 앞 선착장으로 드나들던 여객선은 끊겼다. 아직 낚싯배와 몇몇 유람선이 스쳐 간다지만 북적대던 예전 분위기는 아니다.


정상에 오르면 큰 거인 발자국을 찾아보라던 말을 떠올렸지만 아마 커다란 웅덩이를 두고 지어낸 말인 듯하다. 여름철 폭우가 쏟아지면 망주봉에는 여러 줄기 폭포가 생긴다고 했다. 선유팔경 중 하나로 꼽히는 망주폭포(望主瀑布)다. 혹자는 유배 왔던 선비가 흘리던 눈물이라고도 한다. 그러고 보니 망주봉이라는 이름도 ‘주군인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두 개 봉우리는 매일 아침 절을 올리던 선비와 그의 아내가 변한 바위라고 한다. 한이 맺혀 돌이 되었다는 전설은 망주봉만이 아니다.       


장자도 대장봉 중턱에는 장자 할매바위가 있다. 한 부부가 살았는데 남편이 과거 보러 한양으로 떠나자, 부인은 날마다 아이를 업고 이곳에 올라 남편을 기다린다. 실력 탓인지 운이 없었던 탓인지 여러 해 동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젊은 아내가 할매로 늙을 만큼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드디어 남편이 돌아온다. 그런데 남편이 첩을 몽땅 데리고 오는 것처럼 보여, 분노와 배신감으로 돌아선 채 돌이 되었다고 한다. 그 순간 남편과 함께 오던 이들도 모두 돌이 되고 말았다. 장자 할매바위는 바다 건너 횡경도 할배바위와 쌍을 이루고 서 있어 그럴싸한 전설로 남았다. 남편이 데리고 온 이들이 소첩이 아니라 짐을 진 역졸들이라는 말도 있는데 여하튼 기도발 좋은 영험한 바위라는 소문이 있다. 지금은 흉물스러운 폐가로 버려졌지만, 두어 칸 남짓한 옛 사당에는 간절한 뭔가를 가진 누군가 알게 모르게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다.  

              

장자도 대장봉 중턱 할매바위


섬은 버려지는 곳이었다. 제주와 진도 그리고 거제를 비롯한 남해의 섬이 조선 초기의 주된 유배지였다. 후기로 넘어가면서 신안 앞바다와 멀리는 흑산도 그리고 고군산 일대 섬들도 귀양지로 쓰였다. 추사 김정희와 제주도, 어부사시사를 지은 윤선도와 보길도, 자산어보의 저자인 정약전과 흑산도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고군산군도 일대 섬도 유배지에서 빠지지 않았다. 말도에는 심판서라는 사람이 유배 왔다 풀려나갔다는 말이 전하고,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각종 사료에서 확인된 인물만 해도 100여 명에 달한다. 조선 후기 문필가로 알려진 이건창의 기록도 남아 있다.      


강화도 출신인 이건창은 고종 때 사람이다. 열강들이 전함을 끌고 와 개항을 요구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해 민심이 흉흉하던 시절이었다. 15세 나이로 최연소 과거 급제할 만큼 수제였고, 천성이 강직하고 청렴했다. 고종의 명으로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 암행어사를 했는데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을 탄핵하려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유배 갔다. 승정원 승지 시절 상소 사건에 휘말려 또 유배 가고, 친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세 번째 유배 온 곳이 고군산군도다. 선유도 망주봉을 바라보던 이건창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기울어가는 국운과 들끓는 민심으로 나라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시절, 귀양살이 처지의 선비가 느꼈을 무력감을 생각해본다. 다행히 두 달 만에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다시피 지냈다고 한다. 송파와 강화도 그리고 하남시에 그의 불망비가 남아 있다. 그를 알아주었던 선비들과 백성들의 신망이 돌에 새겨져 남아 있다.       


글을 배운 탓에 세상을 알게 되고, 옳고 그름을 따질 줄 아는 탓에 선비 된 도리를 다하려 했던 사람. 대쪽 같고 바른말 좀 할 줄 아는 지식인의 팔자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달라지지 않은 듯싶다. 주군에게 버림받고 세상으로부터 잊혀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역사가 기억해줄 거라는 보장도 없다. 얼마나 큰 한이 맺혔으면 저리 커다란 바위산이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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