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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구나무 Jun 10. 2022

유령처럼 떠도는 보물선

난파선 한 척을 봤다. 신시도 똥섬을 끼고 앞산과 소낭기미 사이로 깊숙이 들어온 살끼미 장불이다. 해변 모래밭에 기우뚱 주저앉은 배의 외양은 겨우 흉물스러운 원형만 남겨졌다. 선체의 칠은 남아 있지 않아 잔뜩 녹이 슬었고 유리창은 하나같이 깨졌다. 일찌감치 사람 손을 탄 듯싶다. 쓸만한 장비들도 뜯기고 여기저기 물이 고인 자리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내부는 하이에나 같은 포식자의 습격으로 남겨진 초식동물의 잔해처럼 보였다. ‘경남 609’라는 흐릿한 글씨로 미루어 연고지조차 먼 길을 흘러온 듯하다.  

             


섬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 1945년 8월 즈음,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패망 직전의 긴박한 상황에서 군산을 빠져나온 선박 한 척이 미군기의 폭격으로 고군산 열도 부근에서 침몰했다.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노인들은 배가 관리도 남쪽 해역에서 비안도 방향으로 표류하다가 칠산 바다 어디쯤에서 가라앉았다고 했다. 무엇을 실었던지 불이 붙은 배에서는 여러 차례 폭발이 일었고 사람들이 목격한 생존자는 갓 스물도 안 된 일본인 선원 하나가 유일했다. 배에서 밥 짓는 일하던 그는 갑판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 파편에 의지해 장자도까지 떠밀려왔다.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흘렸던 이야기로는 침몰한 배에는 중국에서 모아들여 장항제련소에서 제작된 순금 덩이 금괴가 엄청나게 실려 있었다고 했다. 금괴를 감추려고 비싼 명주실을 가득 실었다고도 털어놓았다.     


그저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것이 해방 후에 미군 함정이 벌인 탐색 작업에 동원된 노인이 아직 살아있고, 선유도 3구 한 카페는 그 당시 침몰선에서 흘러나온 명주실을 거둬다 팔아 장만한 밑천으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근 해역에서 7톤 정도 중국 동전이 발견돼서 관심을 끌었던 적도 있었다.     

 

1969년 4월 7일 자 동아일보에는 내초도 앞바다 개펄 속에 파묻힌 30톤급 목조선박이 발견되어 아무개가 인양 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는 기사와 더불어 해방 이후 끈덕지게 전해오는 380억 금괴설이 함께 실려 있다. 그리고 군산이 고향인 모씨는 보물선 인양사업을 위해 회사를 설립하고 투자자를 모집했다가 사기로 적발되어 구속된 사건도 있었다. 어떤 노인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 관계자들이 직접 탐문 조사를 나왔던 적이 있다고 했고, 또 다른 주민은 전두환 정권 시절 일본 정부가 난파선 인양을 은밀하게 제안했는데 단호하게 거절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아직껏 금괴를 실었다던 보물선의 실체는 확인되지 않은 채 고군산 앞바다에는 부풀려진 소문만 여전히 떠돌고 있다.      


사내를 만난 것은 장자도 선착장이었다. 낡은 트렁크를 끌고 유행이 지난 선글라스를 끼었지만, 한눈에도 평범한 여행객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담뱃불이나 빌리자며 테이블을 나눠 앉았던 것인데 사내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던지며 질문을 끌어냈다. 이어가는 말솜씨가 달변이었다. 육십 언저리로 보이는 사내는 ‘한때 잘 나갔던 머구리’나 ‘역사에 관심이 지나쳐 큰집에서 나랏밥 좀먹었다’ 정도로 해두자며 자기소개를 일갈하고선 연거푸 줄담배를 물었다. 삼십 년 넘게 훑어 온 고군산 일대 물밑 사정을 늘어놓았다. 이미 신문에도 보도되었던 고군산 앞바다 도굴 사건들이 그의 입에서 굴비처럼 엮어 나왔지만, 경찰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사건의 전모가 따로 있다는 냄새를 풍겨가며 적당히 말꼬리를 흐렸다. 말을 더듬어 보건대 2004년 여름 또는 2005년 가을에 검거됐던 비안도나 야미도 도굴 사건에 연루된 잠수부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청자 도자기를 팁으로 받았던 술집 아가씨의 신고로 도굴범들은 검거됐었다. 신고자는 그들이 청자 그릇에 술을 따라가며 돌려 마셨다고 진술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남대문경찰서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문의 전화를 하는 바람에 해양유물 발굴팀이 급하게 파견됐다. 야미도 안쪽 바다 200미터 지점에서 난파선의 존재가 확인됐고 청자 대접 25점이 추가로 인양됐다. 서둘러 사적지 지정 절차를 밟고 새로 도입했던 첨단장비를 활용해서 인양작업이 진행됐다. 인양작업은 시굴선까지 동원하여 부근 해역의 바닥을 훑어가는 조사를 병행했다. 총 4547점의 유물이 나왔다. 대부분 12세기 고려청자가 주종이었으나 서민들의 일상에 쓰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도자기들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하지만 현장은 이미 도굴범들의 손이 거쳐 간 뒤였고 그들의 진술이 아니면 얼마나 많은 유물이 건져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도굴범의 진술은 믿을 수 없고 확인할 도리도 따로 없었다. 오랫동안 업무를 담당했던 경찰관의 말로는 도굴된 유물들은 검거에 대비해 여러 군데 장소에 나누어 숨겨지고 감춘 장소는 소수만의 비밀에 부쳐지는 것이 관행이라고 했다. 해적들의 오랜 버릇을 닮아있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유물이 거래되는지 세상은 알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지는 보물은 ‘먹다 남겨진 밥’인 경우가 많았다. 암거래 시장에 매물로 나오거나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적발이 아니면 비밀리에 거래되는 문화재들의 유출 경로를 일일이 추적할 수도 없었다. 추적되지 못한 유물의 존재를 세상은 알 수 없었다.                     

전남 신안 앞바다에는 고려청자를 인양했던 사건을 알리는 홍보관이 있다.


사내의 궤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배는 이미 오래전 침몰됐고, 침몰된 뱃속에는 유골조차 남겨지지 않았다. 소유했던 사람을 잃어버린 물건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내는 물었다. 자신들이 아니었다면 존재조차 확인되지 못하고 묻힐 뻔한 유물이었다. 배송의 책임도 유통기한을 넘겼고 물건을 받아야 할 사람도 물건을 넘기고 값을 받아야 할 사람도 더는 남아 있지 않은 세상이다. 바다가 품어 키운 물고기를 먼저 잡은 어부들이 차지하듯 바다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더구나 해적과 해경의 구분조차 모호한 바다에서 건져낸 물건을 국가가 모두 가져가고 목숨 걸고 건져낸 물건의 사례는 못할망정 감옥살이까지 시키는 돼먹지 못한 나라의 심보를 사내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담배를 또 한 대 피워 물고서야 시계를 들여다봤다. 문득 생각난 듯 대뜸 『진품명품』만 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말을 뱉고선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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