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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구나무 Jul 08. 2022

천년 역사를 품은 섬

6일 정해(丁亥)에 아침 밀물을 타고 항해하여 진시에 군산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그 산은 열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들어서 있는 것이 성(城)과 같다. 6척의 배가 와서 맞아 주었는데, 무장병을 싣고 징을 울리고 호각을 불며 호위하였다. …… 배가 섬으로 들어가자 연안에서 깃발을 잡고 늘어서 있는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다. …… 접반사(接伴使)가 채색으로 치장한 배를 보내어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에게 군산정(群山亭)으로 올라와 만나주기를 청하였다. 그 정자는 바다에 닿아 있고, 뒤는 두 봉우리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서 있어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문밖에는 관청 건물 10여 칸이 있고, 서쪽에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또 서쪽에는 숭산행궁(崧山行宮)이 있고, 좌우 전후에는 민가 10여 호가 있다. ……     

            - 『선화봉사고려도경』 36,「해도」3, 군산도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군산군도(2000) p12 재인용

 

1123년 고려 인종 원년에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다녀갔던 서긍(徐兢)의 기록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범상치 않은 기록을 두고 다각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문헌에 드러난 건물의 위치와 쓰임새 그리고 당시 의전의 규모와 더불어 배치되었던 군사의 수를 근거로 고군산의 위상과 더불어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외교관계와 무역 항로는 물론이고 방향을 잘못 잡은 사소한 오류까지 추론해낸다. 인근에서 발굴된 기와 파편이나 흔적을 통해 숭산행궁의 위치를 어림잡고 망주봉 앞쪽으로 사신을 접대하는 객관이었던 군산정의 모습을 재현해내고 있다. 9백 년 전 고군산의 중심이었던 선유도의 풍광이 되살아나고, 뱃길을 통해 세계와 소통했던 고려의 바다가 다시 펼쳐진다.             

 


12세기 고려의 바다는 열려 있었다. 수도인 개성으로 들어가는 예성강 하류, 벽란도는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비단과 서적, 약재와 악기를 실은 송나라 무역선은 산동의 등주를 출발해서 벽란도까지 서해를 횡단했다. 멀리 남쪽 바다를 돌아오는 해로도 있었다. 절강의 명주로부터 흑산도와 서해 연안의 섬들을 거쳐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였다. 벽란도에는 특별히 송나라 사신만을 위한 객사도 따로 있었다. 상인들은 돌아갈 때 금과 은, 나전칠기, 화문석과 인삼 같은 고려의 특산품을 실었다. 특히 특산품이었던 인삼은 고려의 존재를 다른 세상에 널리 알리는 톡톡한 역할을 했다.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배들도 수은과 향신료, 산호 같은 물건을 싣고 중국해를 거쳐 서해로 이어지는 물길을 탔다.      

         

송나라와 고려 사이의 교역은 11세기부터 약 2백여 년에 걸쳐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송에서 고려에 보낸 사신도 30여 차례나 된다. 서긍 일행 역시도 5월 24일 명주를 떠나 소흑산도를 거쳐 6월 5일 위도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기록된 선유도 일정은 바로 다음 날이다. 당시 접반사로 서긍 일행을 맞았던 사람은 훗날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다. 사절단 규모는 정사인 노윤적과 부사인 서긍을 포함하여 2백 명이 넘었고 배도 8척이나 되었다. 서긍 일행은 고려에서 약 3개월을 머물렀고, 이때 보고 들었던 일들을 담은 책이 바로 ‘선화봉사고려도경’이다. 이 책은 당시 서해안 무역항로에서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가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사절단 일행이 송나라로 돌아갈 때 밤에는 서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봉수대에서 봉홧불을 피워 뱃길을 밝혔다고 한다. 지금도 고군산군도 해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난파선들은 9백여 년 전 당시 선유도 앞바다의 기억을 품고 있다.    

  


하지만 고려 시대 후반 왜구의 출현으로 고군산군도의 풍경이 달라진다. 1323년 6월 군산도(현재의 고군산군도)에 침입하여 개성으로 가는 조운선을 습격했다. 왜구의 침입과 약탈은 점차 빈번해지고 규모도 커지다가 마침내 1380년 8월 500척에 약 1만여 명의 병력이 진포(현재의 군산)로 쳐들어왔다. 이 침략에 맞서 화포를 실은 전함을 이끌고 왜선들을 모조리 불 지른 전투가 유명한 최무선의 진포대첩이다. 퇴로를 잃은 잔당들이 내륙으로 숨어들어 노략질로 버티지만 남원 운봉에서 또 다른 고려의 무장이었던 이성계에게 소탕되고 만다.      

고려가 망하면서 새로 들어선 조선의 바다는 문을 닫는다. 진포대첩과 같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새로 들어선 나라는 바다를 지킬 여력이 없었다. 태종은 멀리는 울릉도와 독도, 흑산도와 영산도부터 섬들의 백성을 육지로 불러들여 섬을 비우는 이른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폈다. 세종에 이르러서는 선유도에 있던 수군 기지도 진포로 옮기면서 부르던 이름도 따라갔다. 섬이 많이 모여 산처럼 보여 군산진(群山鎭)이라 불리던 이름을 내어주고 부르던 지명 앞에 '고'(古) 자가 붙었다. 오늘날 새만금 앞바다 16개 유인도와 40여 개의 무인도를 이르는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라는 명칭은 이렇게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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