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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연금술사 May 24. 2024

#7. 오! 신이시여.

- 베트남에서 신을 찾다.

종교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진실로 여겨지고, 현자에게는 거짓으로 여겨지며, 통치자들에게는 유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 세네카



나도, 그녀도 일주일이 넘도록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커피숍을 찾아가는 일도 더 이상 없었고, 공허한 일요일에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시간에 따라 물처럼 차오르는 것은 슬픔이었다. 

지난 가라오케 사건이 꿈인 것도 같았고, 술에 취해 헛 것을 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어낼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어낼 수 없는 슬픔이다. 

그 날밤의 슬픔은 아마도 후자였을 것이다.


나와 그녀가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혼란스러웠다. 

단순한 동업자? 선생님과 제자? 혼자서 짝사랑에 빠진 이웃집 외국인 노총각?

그렇다. 외국인 노총각이 젊디 젊은 베트남 아가씨에게 혼자서 연모의 정을 키우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10여 일이 훌쩍 지난 어느 일요일 아침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카페숍으로 올 수 있느냐는 짧은 문자였다.

나도 맥없이 10시까지 가겠노라는 짧은 문자로 답했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머쓱해져서 커피숍으로 성큼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여동생이 나를 알아본 듯 들어오라고 했다. 

커피숍에는 여남은 명의 사내들이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스마트폰을 보고 있거나 해먹에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중에는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베트남 아가씨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베트남어 발음이 내 그것과 비슷하게 어설펐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밝은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젊은이였다.


그녀는 싱크대 앞에서 컵을 씻고 있었다. 

나를 보자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 한잔 마시겠냐고 물었다.

아직 싱크대에는 설거지를 해야 할 컵들이 제법 남아 있었기에 나는 커피 한잔을 부탁했다.

그녀의 여동생은 블랙커피 한잔을 가져다주었다.

얼음이 미쳐 녹지도 않은 짙은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한약처럼 쓰디쓴 커피 향이 올라왔다. 


아침 손님들이 남겨 놓은 커피잔들을 다 정리한 그녀는 주차장에서 오토바이를 꺼낸 후 나에게 타라고 했다.

난 어디로 가는 건지 묻지도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오토바이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나는 언제나 그녀의 뒤에 앉거나 따라다녔다. 


오토바이는 인근 시장을 지나고 점점 인적이 드문 도로로 내달리고 있었다. 

울창한 고무나무 숲이 흔들리며 시야 뒤로 지나갔다. 

한참을 달리던 오토바이는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었다. 

멀리 고즈넉한 사원이 보였고 오토바이는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내 뒤로 오토바이 바퀴가 심술궂게 해코지 한 땅의 파편들이 먼지가 되어 뿌옇게 흩어지고 있었다.


이 동네에 이렇게 큰 사찰이 있었나 싶었다. 

사찰 앞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멈춰 세운 그녀는 말없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한국의 사찰과는 건축 양식이 달랐지만 조용한 분위기는 한국의 그것과 한 가지였다. 

그녀는 어느 비구니를 만나서 인사하더니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 나에게 돌아왔다. 

우리는 나무가 잘 가꿔진 사찰의 돌담길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그녀가 기도하는 수도승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빠. 나는 오빠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오빠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나는 내 마음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우뚝 멈쳐섰다. 

사찰 담벼락 옆으로 한참인 대나무 무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런데 오빠가 가라오케에 간 것이 너무 싫고 또 슬펐어요. 저를 좋아하면서 어떻게 다른 여자들을 만날 수 있어요? 가라오케 아가씨들은 한국 남자들을 좋아해요. 돈이 많거든요. 그 아가씨들은 한국 사람들의 돈만 원해요. 저도 베트남 여자이지만 베트남 여자들 조심해야 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그것처럼 조용하고 따뜻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베트남 여자를 조심하라는 말이, 그녀도 베트남 여자라는 사실이 무엇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거짓말을 들킨 소년처럼 초라한 변명을 쏟아냈다.


"한국에서는 회식을 할 때 종종 가라오케랑 비슷한 노래방에 가요. 

노래를 부르기 위해 가는 것이지 다른 뜻으로 가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왜 거기에 있었던 거예요? 

내가 거기서 선생님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한국 회식 문화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설명하려 들었지만 역시 베트남의 가라오케는 노래방보다는 룸살롱 같은 유흥업소에 좀 더 가깝다는 것을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녀가 왜 도우미 아가씨들 사이에 있었는지가 더 중요하고 궁금했다. 

남자는 괜찮고 여자는 안된다는 뚱딴지같은 권위의식이 나를 단단하게 옥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커피숍으로 이전하기 전에 근처 한 기숙사촌에서 생활했다고 했다. 

한 달에 한화로 5만 원 정도 하는 기숙사비를 절약하기 위해 아는 언니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그 언니는 가라오케에서 일했고, 인근 회사의 월급날이면 손님이 많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룸을 옮겨 다니며 접객을 했다는 것이다. 그날 공교롭게도 언니가 아팠다고 했다. 

아프다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매니저는 끊질기게 출근을 독촉했다고 했다.  

결국 가라오케에 가서 앉아만 있다 와달라는 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했다. 


베트남 여성들은 타인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또 생존을 위해서라면 업종을 잘 가리지 않는다. 

아내가 가라오케에서 일을 마치는 시간이면 남편이 오토바이로 마중 나오는 일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그녀와 나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나마 그녀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했던 나는 결국 국적차이, 문화차이, 세대차이, 언어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하나 더 추가한다면 기독교인이었던 나와 달리, 그녀는 불교였으니 *종교마저 달랐던 것이다. 


이런 차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런 다름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짐이 되어 끊임없이 서로에게 숨막히는 굴레가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 차이를 극복하겠다는 것은 신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이 저지르는 무의미한 저항이나 몸부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신이시여, 나는 그녀를 포기해야 합니까? 아니면 이 시련을 이겨내야 합니까?

눈부신 햇살이 유리 파편처럼 조각조각 내 등에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일 뿐이라고 비웃듯이 대나무숲의 그림자가 내 얼굴 위로 어릿어릿 흔들리고 있었다. 



*종교


베트남은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는 모순적인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나라이다. 

일부 사람들은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베트남은 종교와 신념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국가다. 

더불어 국가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문화 가치 및 도덕적 신념, 종교 다양성을 도모한다.


베트남은 종교를 가질 자유와 권리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종교를 가지지 않을 자유도 보장하고 있다. 

이는 베트남 사회주의 헌법에 명기되어 있는 것이며, 실제 삶에 있어서도 적용되고 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종교를 가지지 않을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포교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이 부분이 베트남 사회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비칠 뿐이다.


베트남 인구 중 약 2,400만 명이 종교를 갖고 있다. 그중 불교와 천주교는 베트남에서 가장 신도수가 많은 종교이다. 

베트남 공산당은 항상 종교에 대해 경계심을 가져왔는데, 역사적으로 공산당의 적이었던 프랑스, 미국 그리고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남베트남 정부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이 1975년 끝난 후 공산당은 종교 단체의 재산을 몰수하고 종교인들을 공산당이 인정하는 종교 단체에 가입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는 도이머이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종교 개방의 필요성을 느꼈다. 

1992년 개정된 헌법 제70조에 따라 베트남 정부는 신앙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다시 보장했고 2004년 6월에는 다시 제정된 수정헌법을 공표하며 종교의 다양성과 자유를 확대했다.


베트남에서는 매년 8000여 회 이상의 종교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5만 3000명의 종교 사제들과 2만 8000여 개의 사원이 있다. 베트남 인구의 27%에 해당하는 2430만 명 이상이 종교 활동을 하고 있으며, 종교인 중에서는 95%가 정기적으로 종교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창시된 대표적인 신흥종교로는 까오다이교(Đạo Cao Đài)와 호아하오교(Đạo Hòa Hảo)가 있다. 이 두 종교는 모두 베트남 남부지역에서 성행하고 있다. 까오다이교는 1926년 베트남 남부의 떠이닌에서 응오반쩨우에 의해 창시된 혼합적 유일신교로 세계 5대 주요 종교(유교, 불교, 기독교, 도교, 이슬람교)의 신앙을 절충해 만들어졌다. 1939년 후인푸소가 창시한 호아하오교 역시 베트남 남부에서 시작됐다. 두 종교 모두 신자 수는 2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이런 공식적인 종교보다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생활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베트남의 민간신앙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건물 한편에 작은 사당을 모셔두는 제단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반터 bàn thở라고 한다. 이 제단에는 조상의 사진이 있고 향을 피우는 그릇과 과일, 술, 심지어는 담배와 초코파이나 카스타드까지 놓여 있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반터는 베트남 곳곳에 녹아 있다. 

강, 길, 산, 바다, 상점,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반터가 있다. 

심지어 롯데마트에 조차 제단을 놓은 반터가 존재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과 오래전부터 내려온 영적 문화에 근거해 자신의 조상들은 돌아올 수 없는 다른 세상으로 떠났지만 늘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 옆에서 함께하며 보호해 준다고 믿고 있다. 

죽어서도 가족에 대한 애틋한 부모님의 마음이 그들에 삶 속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조상 숭배의 개념은 가족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기후와 관련해 적당한 비와 바람을 내려 풍요로운 삶을 허락하고 민족의 독립과 조국을 위해 희생한 왕들과 영웅들을 기리고 감사하는 의미까지 포함한다.


수많은 외침과 극복의 역사 때문일까.

그들의 반터 문화 속에는 가족에 대한 끈끈한 애정과 믿음, 그리고 내세의 복락보다는 현세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현실적이고 솔직한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베트남의 조상숭배 문화, 어느 곳에 가든 볼 수 있는 제단 반터 bàn thở




최근 (2024년) 개봉되어 한국에서 누적 관객수 천만을 넘긴 영화 '파묘'가 베트남에서도 놀라운 인기를 끌고 있다. 

베트남 극장에 걸린 '파묘'는 개봉일 하루에만 66만 달러(약 9억 원)의 매출을 거둬 한국 영화 최대 오프닝 스코어를 썼다. 첫 주말 매출도 역대 가장 많은 302만 달러(40억 원)였다.


'파묘'가 베트남에서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풍수지리나 무속 신앙 등 한국적인 소재가 사용됐지만, 이 같은 샤머니즘이나 무속 신앙들이 베트남에서도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조상 숭배 사상이 '파묘'의 소재들에 깊이 공감하고 몰입하게 할 수 있게 했고 베트남의 무속 신앙과 관습이 초자연적인 미신을 친숙하게 여기게 한 것 같다. 

아무튼 베트남 사람들에게 민간 신앙과 생활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들에겐 깊은 종교성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베트남 박스오피스 1위. 영화 '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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