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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연금술사 May 31. 2024

#8. 키스도 아무렇지 않은 세상에서.

영화관에서 손만 잡다. 

흐릿한 불빛, 소박한 안주, 쓴 소주, 비장한 정서, 도처에 낭만이 가득!

딱 하나만 더 있으면 완벽한데...

뭔데?

첫 키스요. 

              - 드라마 '도깨비' 중에서



사랑은 이상이지만 결혼은 현실이다. 

그렇다. 사랑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다.

사랑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내가 하고 있는 이 사랑은 도대체 얼마짜리일까?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반드시 옳은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게 내가 선택하기 어려운 이유다.

선택을 하지 못한 채로 있을수록 모든 것은 가능한 채로 남아있다.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명확한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한 선택지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기회라고 불리는 시간은 잔인하게도 모든 가능성을 소유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와 사찰에서 사건의 전후를 확인한 후 내 입장에 대한 고민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숨 막히는 생각들을 벗어나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를 보았다. 

복잡한 생각을 잊는 데는 그만한 도피처도 없었다. 

오래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보고, 슬픈 영화를 찾아서 보고, 무서운 공포 영화를 골라서 보고, 때로는 패러디 영화 같은 코믹한 영화들을 보면서 울고, 웃다 지쳐 잠이 들었다. 

또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이번에도 그녀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카페 수익금을 정산했단다. 수익금을 받으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 문자가 왠지 부고장처럼 서럽게 다가왔다. 

이렇게 그녀와 나는 동업자의 관계로 정의되어 벗어날 수 없는 메비우스띠에 갇힌 것 같았다.


일요일 아침 오랜만에 커피숍을 다시 찾았다. 

카페는 여전히 비슷비슷한 풍경이었다. 한쪽 구석에 지난번에 봤던 한국 청년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로컬 카페숍에서 외국인은 쉽게 눈에 띈다. 

지난번에는 베트남 아가씨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혼자였다.  

그의 눈빛은 공허하고 약간은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실연당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사연까지 신경쓸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시선을 그 청년에게서 그녀에게로 옮겼다. 

커피숍을 운영하는 것이 힘들었는지 그녀는 쇄골이 도드라질 만큼 말라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나를 앉히고 한 달간의 수익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한 후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예상보다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장사가 그래도 생각보다 잘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수고에 보답이라도 하고 싶어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마침 그날은 여동생의 남자친구까지 일손을 돕겠다며 카페숍에 나와 있던 차라 

그녀도 오래간만에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오랜만에 동네를 벗어나 시내에 L마트가 있는 한 쇼핑몰로 향했다.  

그리고 P 피자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했다. 

그녀는 내가 왜 요즘 연락을 하지 않았는지, 왜 카페숍을 예전처럼 자주 찾아오지 않는지, 

왜 내 눈밑에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올 기세로 쳐져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모처럼의 나들이가 즐거웠는지 재잘거리고, 웃고, 카페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0대 소녀처럼 신이 나있었다.

나의 고민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다. 


L마트 위로 L 시네마 영화관이 있었다. 

그녀는 영화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식사 후 바로 돌아가기엔 이른 시간이라 영화라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영화관에 들어서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영화관에는 우리를 포함해도 10명도 채 안 되는 사람들만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영화를 그리 즐겨보지 않는다. 

아니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지불해야 하는 기회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일 것이다. 

그 돈이라면 오히려 배부르게 식사를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영화에 조금도 집중할 수 없었다.

우리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커다란 스크린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 옆의 앉은 그녀의 숨소리가 여배우의 대사처럼 새근새근 들려왔다. 

그때 나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극장 키스신처럼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키스를 할까 생각도 했다. 

조금은 고전적이고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내 머릿속에는 아직 그녀에 대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대신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다소곳이 모아진 그녀의 손 위로 내 손을 포개 올렸다. 

그녀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며 서둘러 손을 뺏다. 

머쓱해진 나는 다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해야만 했다. 

나의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 쫄팔렸다.


그런데 잠시 후 그녀의 가르다란 손이 수줍게 나의 손등을 감쌌다. 

따뜻했다.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했고, 얼굴이 더욱 붉어져서 한사코 스크린만 응시했다.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하얗게 변해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 나이에 이런 숙맥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적지 않게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그녀 앞에서 나는 사춘기 소년처럼 젊고 순수해지는 것 같았다. 

포개진 그녀의 손길 위로 숨결과 맥박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움켜 잡았다. 

천년이라도 그냥 그렇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빅토르 위고는 연애란 세상을 줄이고 줄여 단 한 사람에게 집어넣은 뒤 그 사람을 다시 우주와 신에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신비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런 걸 연애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는 분명 그 순간 연애를 하고 있었다.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잡는 것이다.'

스탕달이 '연애론'에서 한 말이다. 

요즘같이 키스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세상에서 고작 손잡은 것만으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가 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 그녀의 손을 잡은 순간이 나에겐 첫 키스처럼 황홀하고 순결했다. 

추억이란 단순히 쌓이는 것이 있고, 낙인처럼 기억에 각인되어 영원히 간직되는 것이 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가 바로 그때였다.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 없어 어느새 마흔이 되어 버린 나.

그리고 이제 막 세상으로 새순을 쏟아내는 4월의 초목같은 그녀.

우리의 서로의 손을 맞잡는 행위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무수히 많은 조건들과 차이들에 대한 비겁한 변명들을 뜨겁게 녹여내여 단단한 믿음으로 변화시키신성한 종교 행위였다.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영화관 밖으로 나왔다.

영화관 밖 세상은 눈이 부셨다. 

영화관에서의 영화가 끝나고, 우리들의 영화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 영화가 해피엔딩의 로맨스 영화가 될지, 끔찍하고 잔혹한 공포영화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영화관


한국에서도 한때 그랬지만 도이머이 개혁 이전 베트남에서 영화는 국가 정책을 국민들에게 홍보하는 수단이었다. 

개혁 이전 우수한 작품이라고 불리던 영화들은 독립운동과 전쟁을 주로 다뤄 애국심을 높이는 내용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경향은 베트남이 1945년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30년간이나 전쟁을 치러야 했던 베트남입장에서는 나름 당연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1975년 통일 후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1986년 ‘도이머이’(혁신이라는 뜻)를 선포하며 개혁정책을 편다. 이를 통해 경제, 사회, 종교, 문화 등 여러 부분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영화계에도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고 영화의 소재도 다양해졌다. 


현재 베트남에서 가장 큰 두 개의 영화관 체인을 꼽으라면 단연 CJ CGV와 롯데시네마이다. 

베트남 전역에 80개의 영화관을 보유한 CJ CGV는 2011년  당시 베트남 최대 멀티플렉스인 메가스타(MegaStar)의 지분을 인수하며 베트남 시장에 진출했다.

롯데시네마는 베트남에 2008년 첫발을 내딛는다. 롯데시네마의 티켓 가격은 약 10만~13만 동(7천 원 정도)으로 CGV 영화관과 비슷하다.

베트남 로컬 영화관으로는 2005년에 설립된 갤럭시 시네마(Galaxy Cinema)가 있다. 

CJ 및 롯데에 이어 베트남 영화관 시장에서 세 번째로 큰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극장의 대부분은 베트남 남부 지방에 소재하며, 티켓 가격은 7만~ 9만 5000동 수준(약 4천 원 정도)으로 경쟁사인 CGV나 롯데시네마보다 저렴하다.

눈에 띄는 로컬 영화관으로는 네 번째로 큰 베타 시네마(Beta Cinema)이다. 

베타 시네마는 2014년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첫 영화관을 개관한 이후, 현재는 18개의 영화관을 운영 중이다. 특히 소도시와 교외 지역의 학생과 저소득층 관객을 타깃으로 저렴한 티켓을 제공하고 있다. 티켓비가 4만 5000~8만 동 수준(약 2천 원 수준)에 불과하다. 

이뿐만 아니라 베타 시네마는 해외에서 호평을 받을 정도로 영화관 인테리어가 유명하다. 

베트남의 주요 관객은 80%가 29세 미만이다. 베트남의 MZ 세대가 시장의 취향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로맨스, 코미디, 현지 요소가 가미된 공포는 물론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 영화를 좋아한다. 

베트남의 MZ 세대’에게 영화관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곳이 아니라 함께 이야기하며 어울리는 놀이의 장소이자 SNS에 게시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을 베타 시네마는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것 같다.

     

베트남에서 영화가 문화생활로 자리 잡지 못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대도시를 제외한 로컬 지역에서는 여전히 경제생활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영화는 사치스러운 문화생활임에 틀림없다. 

또한 도시나 시내에만 존재하는 영화관의 접근성도 영화를 쉽게 접할 수 없게 하는 원인이다. 


두 번째는 콘텐츠 문제다. 

베트남 영화가 흥행에 참패하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미흡한 인물 설명과 개연성이 떨어지는 전개 방식, 지루한 스토리 라인,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배우들의 연기력, 부족한 완성도 등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베트남 영화들이 손익분기점조차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부분은 부족한 영화 제작 예산이 주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산이 큰 영화가 항상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좋은 영화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투자가 필요하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베트남 영화 투자, 제작, 해외 영화 배급사인 V픽쳐스가 베트남 영화 투자 자금을 동원하고 있으며, CGV는 젊은 영화감독들의 제작을 지원하면서 코로나 이후 제작편수는 많지 않지만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는 영화들이 증가하고 있다.


베트남 영화감독인 짠 탄(Tran Thanh)은 CJ HK엔터테인먼트와 협력해 제작한 두 편의 영화를 모두 베트남 역대 흥행 순위 1·2위에 올려두었다. 2024년 2월 개봉한 그의 작품 '마이'는 227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2023년 베트남 영화계 최고 흥행 작품인 '냐 바 누(The House of No Man)'를 제치고 베트남 영화 사상 최고 매출을 올렸다. 


                               <역대 최고 흥행 순위를 기록한 베트남 영화 3편의 포스터>

                                     (왼쪽부터) 마이(1위), 냐 바 누(2위), 보 지어(3위)



‘베트남 영화 발전전략’에 따르면 2030년까지 베트남 영화는 국제적인 상을 수상하고 지역과 세계에서 명성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나는 그 목표와 비전을 응원한다. 

베트남 영화계와 기업 그리고 정부가 합심해서 베트남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베트남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베트남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경쟁력을 얻고 국제 사회에서 자리매김하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영화하면  '디어 헌터', '람보',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등 할리우드 전쟁 영화를 떠오른다.

할리우드 전쟁 영화에서 시선을 돌려본다면  '인도차이나', '콰이어트 아메리칸'이나, 

쩐아인훙 감독의 '그린 파파야 향기', '시클로' '굿 모닝 베트남' 등을 떠오르기도 한다.

한국영화도 한때 '하얀 전쟁', '알포인트', '님은 먼 곳에' 등 베트남 전쟁에 집중한 때가 있었다. 


CJ 엔터테인먼트가 베트남과 합작해 만든 '수상한 그녀'의 베트남판 '내가 니 할매다', '써니'의 베트남판 '고고 시스터즈', 이 밖에 '마이가 결정할게 2', '불량소녀'(저는 아직 열여덟이 안 됐어요), '걸 프롬 예스터데이' 등 한국 기업이 투자한 영화들이 베트남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 영화산업 발전에 기여하면서, 

“도약하는 베트남 영화, 주도하는 한국 기업”이라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평을 좀 뒤로 하고 이제는 미국 중심, 한국 중심에서 벗어나 베트남 영화 자체로 눈을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베트남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순수한 베트남 영화, 베트남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이야기하는 그런 영화에도 이제 관심을 가져봐야겠다. 

베트남 사람들의 독특한 시선과 그들만의 고유한 이야기들 속에서 감동적이고, 웃기고, 슬프고, 무섭고, 외면하고픈, 혹은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영화를 더 많이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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