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쌀국수 속에 질투 - 베트남 쌀국수 이야기
출근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개인 메일을 확인하는 일이다.
온갖 스팸 메일과 SNS가 보내오는 알림 메일이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첫 일과는 메일 확인으로 시작된다.
그날도 20여 개가 넘는 스팸 메일들 사이에 눈에 띄는 메일 한 개가 눈에 들어왔다.
헤어진 전 여자친구의 결혼식을 알리는 페이스북 알림 메일이었다.
나에게 직접 보낸 소식은 아니었다.
페이스북에서 친구로 연결된 사람들의 업데이트 소식을 알리는 메일이었다.
결국 결혼식 날이 정해진 모양이었다.
전 여자 친구에 대해 애틋한 안타까움이나 미련 같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한때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축하한다는 간단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속으로 잘살기를 진심으로 축복했다.
베트남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
대부분의 회사들도 보통 7시 30분이면 업무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녀와 아침을 함께할 수 있는 날은 일요일이나 공휴일 같이 특별한 날이 아니면 쉽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나는 그녀와 오랜만에 아침 식사 데이트를 즐기기로 했다.
베트남에선 아침을 베트남 쌀국수인 *퍼(pho)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녀는 배가 고프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짜증을 잘 내는 편이었지만 식탐은 많지 않았다.
먹는 양도 적었다.
한국 식당에 가면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에 밑반찬을 몇 조각 집어 먹고는 메인 음식이 나오면 배가 불러 잘 먹지 못할 만큼 양이 적었다.
그래서 뷔페 같은 식당은 절대 가지 않는다.
나는 베트남 쌀국수를 좋아했다. 하지만 먹을 때마다 김치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엇(Ớt)이라고 부르는 베트남 고추를 넣어 얼큰한 김치를 대신했다.
베트남의 고추 '엇'은 한국의 청양고추의 2-3배 이상 매운맛을 낸다.
손으로 만진 후 눈가나 얼굴을 비빌 경우 최루탄을 맞은 것처럼 얼얼하고 따끔거릴 만큼 맵다.
보통 작게 썰어서 나온 엇 4조각 정도를 넣어 먹는 습관이 있었다.
그날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6조각이나 되는 베트남 고추를 손으로 집어 쌀국수에 넣었다.
그날따라 그녀는 말수가 적었다. 보통 같으면 재잘거리며 커피숍 이야기를 해댔을 텐데 별 말이 없다.
쌀국수를 한 젓갈 집더니 갑자기 한마디 던진다.
"오빠, 한국에 좋아하는 여자 있어요?"
"아니. 한국을 떠나온 지 3년도 넘게 지났는데 무슨...?"
나의 말끝이 흐려지자 그녀는 뭔가 확신에 찬 듯 다시 물었다.
"오빠, 혹시 L이라는 한국 여자 알아요?"
그녀의 입에서 뜻밖에 헤어진 전 여자친구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그녀는 나의 페이스북을 따라 그녀에게 남긴 메시지를 봤다는 것이었다.
베트남 여성들의 촉은 긴 머리 군대의 정보력처럼 예민하고 집요했다.
"아... 그건 전에 알던 친구인데 이번에 결혼한다고 해서 축하한다고 보낸 거야."
"오빠 아직 그 여자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거 아니에요? 오빠 바람둥이인가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결혼하는 여자한테 무슨 미련이 있다고."
그녀는 지난 가라오케 사건과 이번 메시지 사건을 하나로 연결해 나를 바람둥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나는 오해라고 필사적으로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눈빛은 오해가 더 깊어가는 듯 공허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빠, 난 괜찮아요. 오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가도 돼요. 나는 상관없어요."
난 그녀가 질투한다고 느꼈다.
그 앙증맞은 질투가 기분 좋았다.
그녀가 아는 한국 여성은 큰 키에 하얀 피부를 가진 자신감 넘치는 연예인들로 각인되어 있을 터였다.
한국 여성들을 직접 본 경험이 많지 않으니 K 드라마에 한국 여성들의 이미지가 그녀가 생각하는 모든 한국의 여성들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일반화의 오류였다.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지만 풀이 죽어 있는 그녀를 보니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쌀국수에 박힌 젓가락만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에는 나에게 품고 있는 우주적 신호를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내내 그녀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던 꺼림칙했던 의구심들이 어려운 수학문제가 풀리듯
답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질투심과 열등감이 그녀의 손가락에서부터 팔을 타고 흘러가 숨결에 짙푸르게 고여 드는 것이 보였다.
식어가는 쌀국수는 쓸쓸하지만 가득 차있었고, 따뜻했지만 텅 빈, 혁명의 노래처럼 폭풍 같은 슬픔이 담긴 것 같았다.
"걱정 안 해도 돼. 너도 알겠지만 나는..."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제 부터인가 나는 그녀를 너 또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오빠, 나 먼저 갈게요."
그녀는 먹다만 쌀국수를 남겨두고 그냥 그렇게 오토바이를 타고 가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그녀에 대한 걱정 보다 이제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베트남에서 오토바이 없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끝없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향해 걷는 것과 비슷하다.
일요일 아침이라 택시도 없었고 그 흔한 세옴 조차 보이지 않았다.
난감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엇'을 만졌던 손이었다.
순간 얼굴은 따끔거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코에서는 콧물이 나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바람맞은 남자처럼 한 시간이 넘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분명 오토바이로 올 때는 가까운 거리였다.
걸어 걸어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었고 햇볕은 영혼까지 태울 듯이 뜨거웠다.
시시포스처럼 걷고 또 걸으며 생각했다. 그녀의 처벌은 너무 가혹했다고.
그런데도 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퍼(pho)
베트남의 아침은 쌀국수 ‘퍼(pho)’로 시작된다.
한국에는 김치, 일본에는 초밥. 각 국가마다 대표 음식이 있듯 베트남에는 '퍼'가 있다.
Pho의 역사는 그 진한 국물만큼 풍부하고 복잡하다.
사실, '퍼'는 20세기 초부터 먹기 시작한 그리 오래된 전통음식은 아니다.
프랑스인 앙리 오제가 1910년 펴낸 ‘베트남 기술자와 장인’이란 화집에 처음 소개되었다.
'퍼'는 하노이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남딘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남딘에는 프랑스인들이 운영하는 섬유공장이 많았다.
남딘 주민들은 소의 부산물 등 프랑스인들이 먹고 남긴 뼈나 먹지 않는 부위 또는 남은 고기조각들로 국물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거기에 국수를 말아 노동으로 지친 허기를 달랬던 것이다.
한국에서 부대찌개가 만들어진 과정과 유사한 슬픈 역사가 담겨있는 것이다.
'퍼'가 전 세계로 뻗아나가게 된 이유에도 아픔이 담겨있다.
인도차이나 전쟁이 1954년 제네바 협정 체결로 멈추면서 베트남은 남북으로 갈라졌다.
이때 북베트남인 200여만 명이 남베트남으로 이주하면서 북부 음식인 쌀국수가 남쪽에 정착하게 된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100만 명이 넘는 베트남인들이 고국을 떠나 미국,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로 이주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먹던 쌀국수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식민 통치와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도 단순한 국수 이상의 세계적인 음식이 된 '퍼'를 보면 베트남인들의 한과 이를 극복했던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중국인은 국수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프랑스인은 쇠고기 소비를 대중화했습니다.
이 두 가지의 문화 융합으로 쌀국수는 현지 재료와 외국의 영향을 결합한 독특한 베트남 대표 음식이 되었다.
어찌 보면 중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으니 맛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퍼는 힘차게 아침을 시작하는 베트남 국민들의 회복력이자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달성시킨 자부심이 담겨있는 에너지원임에 분명하다.
CNN Travel 기사에 베트남에서 가장 비싼 쌀국수 출시에 대한 기사가 떴다.
최근에 호찌민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랜드마크 81에 있는 '오리엔탈 펄' 레스토랑에서 400만 동짜리(한화로 22만 원 정도) 쌀국수를 내놓았다.
레스토랑 운영자인 Le Trung은 '퍼는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베트남의 국민 요리이며 이 고급스러운 새 버전으로 쌀국수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호찌민시에서 처음으로 미쉐린 스타를 받은 ‘아난 사이공’이라는 식당이 7년 전에 내놓은 100달러짜리 쌀국수가 지금까지 가장 비싼 쌀국수였는데 이 기록을 단숨에 경신한 것이다.
베트남의 국민 음식, 쌀국수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일본산 와규, 푸아그라, 트러플 버섯 등 온갖 비싼 재료가 다 들어가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금(Gold)’까지 넣었다.
이 쌀국수를 만든 셰프는 일반적인 쌀국수와 차별을 두기 위해 미학적인 부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한다.
큼직하게 썰어 넣은 고급 와규와 1킬로에 450만 동(약 25만 원)하는 호주산 트러플 버섯을 10g씩 얹고, 진한 소꼬리, 닭고기, 계피, 스타 아니스와 같은 향신료에 절인 갈비와 함께 이틀 동안 끓여 육수를 만들었다.
누가 22만 원이나 하는 이런 비싼 쌀국수를 먹을까 싶지만 식당은 하루 3그릇 한정으로 판매하던 이 쌀국수를 10그릇으로 늘렸다고 하니 이 비싼 쌀국수를 누가 먹을까 하는 공연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노점상에서는 3만-4만 동(2-3천 원), 웬만한 식당에서는 6만-7만 동(3-4천 원)이면 소고기와 진한 육수가 가득한 쌀국수를 맛볼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9만 3000동(5200원) 정도로 가격을 올리는 가게들이 많아지고 있다.
친구들은 한국에서 보통 쌀국수 1인분이 만원이 넘는다며 엄살 부리지 말라고 하는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작년 7월 세계 최대의 쌀 생산국인 인도가 식량난을 이유로 쌀 수출 금지 조치를 내리자 베트남 쌀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가격이 치솟았았다. 베트남은 세계 쌀 수출국 2위이다.
인도의 수출 규제 이후 베트남과 태국의 쌀 가격은 20% 올랐다.
쌀값이 오르니 쌀국수 가격도 덩달아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가장 비싸다는 쌀국수는 못 먹어도, 길거리 상점에서 파는 저렴한 쌀국수는 오래오래 맛볼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