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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연금술사 May 17. 2024

#6. 운명의 갈림길

길 위에서 길을 잃다. - 베트남의 길

청년이여, 왜 그 길을 걸어가고 있나.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면 길은 보이지 않는다.  - 니체

      



월급날이 돌아왔다.

반년 가까이 월급을 차압당하는 수탈의 기간을 마치고 오랜만에 지갑이 두둑했다.

나는 회사 입사 동기들과 월급 회복 기념일을 맞이하여 회식을 하게 되었다.

회사 인근 식당에서 약간의 술을 곁들여 저녁식사를 했다.


술기운이 오른 동료들은 의기투합하여 2차로 가라오케에 가서 술기운을 이어가자고 했다.


인근 공단에는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많았기에 월급날이면 성행을 이루는 큰 가라오케가 서너 군데 있었다.

그중에 우리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J 가라오케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 단골이던 K주임은 익숙한 솜씨로 한국인 매니저를 찾았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N 매니저는 서글서글 웃으며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했다. 

술기운이 오른 K주임은 친근하게 매니저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예쁜 도우미 아가씨들을 불러 달라며 매니저에게 살짝 뒷돈을 쥐어 주는 것이었다.

역시 단골만이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솜씨였다.


이미 기분이 한껏 들뜬 동료들은 박스채로 나온 맥주를 마시며 신이 나서 고래고래 노래를 불러댔다.

잠시 후 N 매니저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그 뒤로 병아리처럼 십여 명 남짓의 잘 차려입은 도우미 아가씨들이 매니저를 따라 들어왔다. 

한 줄로 주욱 늘어선 아가씨들은 지명을 기다리는 미인대회 참가자들처럼 아름다운 미소로 손님 한 명 한 명을 바라보고 었었다.


L 대리는 가장 연장자였던 나를 보며 "과장님, 먼저 선택하시죠."라고 

능글거리는 미소로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뭐... 난 별로 생각이 없으니 너희들이 먼저 선택해."라고 말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교직 생활의 도덕적 윤리규범과 그리 깊지는 않은 종교적 신앙심으로 가라오케에서 유흥을 즐기는 상황에 심리적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터라 약간은 시큰둥한 투로 말했다.

그렇다고 타국살이에 지친 동료들의 흥을 깰 필요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때 전문가인 K 주임은 아가씨들을 주욱 둘러보더니 매니저에게 다른 아가씨들로 다시 불러달라고 짜증 내듯 말했다. 몇 번 그렇게 해야 진짜 에이스(?) 도우미 아가씨들이 들어온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앞서 왔던 아가씨들이 입을 삐죽이며 나간 후 얼마쯤의 시간이 지났을까 새로운 도우미 아가씨들이 다시 우르르 들어왔다.

그냥 술이나 마시고 노래나 부르면 될 것이지 도우미는 무슨 도우미냐며 못 내키는 표정으로 맥주 한잔을 들이켠 나였지만 나도 모르게 새로 들어온 아가씨들을 한 명 한 명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아가씨에 시선이 멈추자 갑자기 숨이 탁 막혔다.

하마터면 입안에 맥주를 뿜어낼 뻔했다. 

새로 들어온 도우미 아가씨들 사이에 눈에 익은 그녀가 서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잘못 본 건가 해서 다시 확인했지만 그녀였다.


커피숍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여기에 서있단 말인가!!


"과장님, 그럼 제가 먼저 선택해도 되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발견한 모양인지 이번엔  L 대리가 기세 좋게 먼저 나섰다.

"L대리 이건 예의가 아니지. 장유유서도 모르나? 역시 내가 먼저 선택하는 게 회사 기강에도 도움이 될 테고… 허허허"

나는 최대한 너스레를 떨면서 우선권을 가져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아이고 우리 과장님은 이럴 때만 장유유서래. 내가 과장님이니까 양보하는 겁니다. 담에 술이나 쏘세요.

이미 혀가 살짝 꼬부라진 L 대리의 대답에 대구 할 새도 없이 그녀가 다른 동료의 파트너가 될까 싶어 서둘러 내 옆자리에 앉혔다.

일단의 위기를 모면하자 분노보다는 깊은 상실감에 정신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감히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녀의 눈빛은 알 수 없는 분노와 증오로 타오르고 있었다.

가슴 한편으로 단검이 깊이 에이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근데 지금 니 옆에 이 남잔 누군데.

교회오빠하고 클럽은 왜 왔는데. 너네 집 불교잖아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내 눈을 의심해보고 보고 또 보아도 딱 봐도 너야.

오 마이 너야'



내 머릿속엔 동료들의 모든 노래가 영탁의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노래로 변환되어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숨이 막혀서 그곳에 1초도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L 대리에게 피곤해서 먼저 가야겠다며, 동시의 가느다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L 대리는 능글거리는 웃음을 보이며 "과장님 급하셨나 보네."라며 놀리듯 말했고 다른 동료들은 즐거운 시간 보내라며 응원 아닌 응원을 보내왔다.


나는 그들의 천박한 상상을 외면한 채 그녀를 이끌어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달빛은 그녀의 얼굴을 온통 창백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녀의 애인도, 남편도 아니었다.

그저 혼자서 썸 타고 있는 착각 속에 빠진 이웃집 아저씨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도 외국인 아저씨였다.

도무지 내가 분노할 명분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N매니저가 따라 나와 뭐라고 말하려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넙죽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만 하고 돌아갔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분노의 눈 빛으로 한참 나를 쳐다보다가 말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졌다.

순간 내가 잘못한 건지, 그녀가 잘못한 건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아니 처음부터 누구의 잘못이란 게 있었나 싶기도 했다.

어둠이 깔린 *베트남의 길 위로 텅 빈 바람이 불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베트남의 길 위엔 사람의 향기가 있다.

*베트남의 길


베트남 사람들은 길에서 밥을 먹고, 길에서 낮잠을 자고, 길에서 커피와 술을 마신다. 

어느 길이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베트남의 길은 그 자체로 역사이고, 삶이다. 

도심의 현대적인 건물들은 옛 전쟁의 상처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고, 고대의 사원과 궁전은 

이곳의 역사적인 풍경을 장식하며, 사람들에게 고대의 이야기를 전한다.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예술가들이 물들인 벽화와 다양한 공예품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모든 도로명은 베트남의 영웅들의 이름과 문화유적들로 명명된다.

길 자체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길을 따라 커다란 가로수가 늘어서 있고, 빗물에 젖은 길거리에서는 햇살이 반짝인다. 

베트남의 길은 항상 붐비고 활기차며, 수많은 길거리 상점에서 발화된 이국적인 냄새가 퍼져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길은 편하지 않다. 

도로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한참 개발이 진행되기 때문이라고 차치하더라도.

인도 위로 상점들의 가판대와 세옴(오토바이 택시)은 물론 가로수에 해먹을 설치해 놓고 자는 사람까지. 

더운 날씨에 10분 이상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상당히 강도 높은 노동이 된다.


이렇게 베트남 사람들이 공공의 공간을 사적으로 점유하는 행동은 베트남 사람 특유의 경계가 불분명한 삶의 태도 때문이다. 

남의 가게 앞에 좌판을 벌이는 것이 이상스럽지 않게 여겨질 만큼 경계를 상황에 따라 이용하는 유연함이 

이러한 상황을 만든다. 

편의성의 유연함이 경계를 없애고 공동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과일 상점 앞에 다른 과일을 파는 노점상이 좌판을 깔아도 다투거나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 


도심의 길은 매우 시끄럽다. 

기본적으로 오토바이와 차량이 내는 소음에 경적소리가 더해진다. 

사방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는 상대를 위협하는 공격적인 알림이 아니다. 

근처에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알림의 의미가 더 강하다. 

도시의 길은 일방통행이 많고 좁아서 차선을 바꾸거나, 혹은 추월하거나 죄회전을 해야 할 때 무척 위험하다.

경적을 울는 것은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진행의 순서를 정하고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사방에서 울리는 경적소리는 '비켜'가 아니라 '내가 비켜 갈 테니 그대로 가'라는 신호인 셈이다. 

그러니 경적소리가 요란하더라도 짜증을 내거나 보복 운전을 할 필요가 없다.


보행자도 마찬가지다 횡단보도나 신호등을 찾기 힘든 베트남의 거리에서 도로를 건널 때 절대 뛰면 안 된다. 마주 오는 오토바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다음은 오토바이 운전자가 알아서 피해 갈 것이다. 

보행자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뛴다면 오토바이는 대처할 시간을 잃으면서 사고가 날 확률이 높다. 

그러니 베트남에서 길을 걸을 때 들리는 경적 소리를 위협의 도전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복잡한 도로를 건넌다고 서두를 필요도 없다. 


물 길, 하늘 길, 철길, 수많은 도로... 

우리는 살면서 수만 갈래의 길을 걸어왔다. 그중 지칠 때 생각나는 편한 길이 있다.

아마도 그 길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웃고, 울며 걸어가는 공존의 길이 아닐까 싶다.

베트남의 길은 편하지 않지만 모든 불편한 이유를 넘어선 따뜻한 공존이 있다.

그래서 자꾸 걷고 싶은 길이다.


후에(Hue)에서 다낭(Da Nang)까지 가는 철길은 베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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