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생활력의 베트남 여성
"짐은 천하의 모든 것을 바꾸고 싶소, 특히 여자를 바꾸고 싶소,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보다 무섭기 때문이오."
("Trẫm muốn sửa đổi lại cả thế giới, nhất là đàn bà, vì họ đều đáng ghê sợ hơn đàn ông")
- 응우옌 푹 아인 (베트남 응우옌 왕조 건국군주)
"선생님, 올해 몇 살이세요?"
나의 첫 번째 질문은 지극히 평범했다. 왜 나이를 제일 먼저 묻게 되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한국적인 습관에서 나온 질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누구를 만나든 나이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미 그녀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고 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는 그녀의 생물학적 나이 파악이 시급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한 첫 점심 식사에서는 질문과 대답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올해 24살입니다. 선생님은요?"
작고 아담한 체구에 앳된 얼굴을 가진 그녀였기에 나이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와 무려 15살이라는 차이는 통념의 상식을 넘기에는 만만치 않는 숫자였다.
파스칼은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말했고, 셰익스피어는 사랑을 '분별없는 광기'라고 했다.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자라고 죽는 것은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이 없다.
사랑은 사회적 통념의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게 나를 위로하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나이를 확인한 순간, 메마른 입술 사이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전 올해 서른 여덟입니다."
나는 기어코 만으로 따진 나이에 생일이 지나지 않은 것까지 합쳐 나이를 최대한 적게 말했다.
나는 늑깍이 대학 생활을 마치고 교직 생활을 하면서 혼기를 놓친 노총각이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소위 나는 한국에서 루저(Loser)였다.
돈도 없었고, 잘생기지도 못했고 심지어 키마저 크지 않았다.
물론 나도 결혼을 꿈꾸던 여자가 있었다.
베트남에서 긴 연애 생활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지만 말이다.
"내가 좀 늙었죠? 허허허." 난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려 뜨려 볼까 싶어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불행하게도 웃음소리조차 노인의 빠진 이 사이로 힘없이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같이 들렸다.
그녀의 젊음에 대한 질투가 나의 목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니요. 나이에 비해 너무 젊어 보이는데요. 한국 사람들은 베트남 사람보다 훨씬 젊어 보여요."
그녀는 하얀 모래가루 같은 이를 드러내며 살짝 웃어 보였다.
환한 미소는 나를 가파른 경사로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광란의 질주로 몰고 가고 있었다.
그녀의 고향은 베트남의 최남단에 속하는 까마우(Cà Mau)였고,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 호찌민 인사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다고 했다. 호찌민 인사 대학교는 호찌민에서 최고의 명문대학이었다.
그녀에 대한 앎의 범위가 확장됨에 따라 호감은 빅뱅처럼 터져서 우주를 삼킬 듯이 확장되어 갔다.
그녀가 갑자기 아저씨벌의 나이 많은 나를 오빠라고 부르며 사업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그녀와 사제지간이 아닌 동업자가 되었고, 최소한 원금을 회수하려면 5년 이상 그녀를 지속적으로 만나야 하는 관계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을 통해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나는 이제 매일 같이 퇴근과 동시에 커피숍으로 달려갔다.
표면적인 이유는 커피숍이 잘되는지 확인하고 응원하기 위한 방문이었지만, 사실 그것은 그녀를 만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커피숍의 이름은 베트남어로는 찐찐찐(chín chín chín /999 )이었다.
우주로 날아가 버린 '은하철도 999'도 아니고 촌스런 카페 이름에 그녀의 센스가 의심스러웠다.
좀 더 근사한 이름을 원했지만 커피숍 이름은 모두가 쉽게 기억할만한 쉬운 이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트남에선 숫자로 된 상점 이름이 유난히 많았다.
간판을 보면 대개 그곳이 위치한 번지수인 경우도 많았다.
특별한 매체를 통한 홍보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더욱이 오토바이로 빠르게 지나가면서도 가독성이 좋고 기억하기 쉬운 상점 이름이 유리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숍은 오픈하자마자 제법 손님으로 북적거렸다. 소위 말하는 오픈 빨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참 열심히 일했다. 아침마다 100여 미터 떨어진 작은 공장의 경비실을 찾아가서 경비 아저씨들에게 무료로 커피를 돌렸다. 직원들에게 소개해 달라는 일종의 뇌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도 그녀와 함께 일하며 부족한 일손을 돕고 있었다.
두 억척같은 *베트남 여성들은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했다.
베트남 축구 경기라도 있는 날이면 새벽 1시까지도 영업을 했다.
그녀들의 노력으로 커피숍은 그럭저럭 잘 운영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게 평화롭기 그지 않는 그 시간들을 뒤로하고
나는 억척스러운 생활력을 자랑하던 그녀를 만나지 말아야 할 곳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베트남 여성
1975년 4월 30일, 20년간의 베트남 남북 동족상잔 전쟁은 북 베트남의 승리로 통일 베트남을 이룩했다.
벌써 반세기가 지났지만 이 전쟁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조용한 영웅들이 있다.
바로 긴 머리 군대다.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쳤던 열일곱에서 스무 살의 앳된 소녀들이다.
베트남 여성들을 수식하는 단어는 '영웅'(Anh hùng), '불굴'(bât khuät), '충절'(trung hâu), '담당'(đàm đang) '이다.
남녀를 구분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남성에게 주로 어울릴듯한 이 묵직한 단어들이 베트남 여성들의 상징이다.
베트남 여성들은 건국에서 국방까지 중요한 순간마다 희생과 헌신을 통해 베트남을 지켜냈다.
한나라에 항거한 하이바쯩(Hai Bà Trung - 베트남에서 가장 유명한 쫑자매로 불리는 여성영웅들),
오나라에 봉기를 일으킨 바 찌에우(Bà Triéu), 떠이선 농민 운동의 부이 티 수언(Bui Thi Xuân)등 국가가 어려울 때마다 위대한 여성 영웅들이 출현했다.
프랑스 식민통치 시대에는 여성 혁명군의 전형이 되었던 응웬 티 밍 카이(Nguyên Thi Minh Khai )가 대표적인 여성 영웅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보 티 사우(Vo Thi Sau) 의 이야기에 더 큰 감동과 존경심을 느낀다.
1933년 베트남 남부 붕따우성에서 태어난 그녀는 13살에 오빠들을 따라 프랑스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1947년 14살의 나이에 그녀는 고향인 덧더 시장에서 수류탄을 던져 프랑스군 한 명을 사살하고 12~20명을 부상시켰다.
결국 그녀는 1950년 프랑스 식민당국에 의해 체포된다.
프랑스 법정은 이 어린 소녀에게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고 사형을 선고했다.
사람들의 소요를 의식한 프랑스는 그녀를 지옥의 꼰다오섬으로 이송한 후 그곳에서 총살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다.
형 집행 날.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보 티 사우가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 나왔고 열일곱, 아직 아이 티를 벗지 못한 소녀에게 집행인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이에 보 티 사우는 두려움 하나 없는 의연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눈가리개를 풀어라. 내 조국의 산천을 보며 당당하게 죽겠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했을 17살 소녀는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이렇게 꽃다운 인생을 마감한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베트남 여성 유격대는 정보수집을 비롯하여 무기 운반, 다리 놓기, 길 만들기 뿐만 아니라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싸우기도 했다. 베트남 남부 민병대의 40%가 여군이었다고 한다.
여성 게릴라군과 포병들은 전쟁의 최전선에서 무수히 많은 적의 항공기와 차량 및 총포를 파괴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는 이 긴 머리 군대의 활약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제는 베트남 어디에서도 전쟁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용맹스러웠던 영웅들도 사라졌고, 남은 자들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가고 있다. 전쟁의 영웅도, 아픔과 상처도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여성들이 베트남의 현재와 미래를 열어 가고 있다.
요즘 베트남에서는 ‘신(新) 여성(푸느떤떠이 Phụ nữ tân thời)'라는 용어가 주요한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급변하는 베트남에서 ‘신여성’은 과거의 긴 머리 군대와 함께 현대 베트남 여성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주요 키워드다.
베트남의 '신여성'들은 베트남 도이머이 정책(개방 정책) 이후 경제적 풍요를 기반으로 자란 1990년대생으로 대부분 고등교육을 이수한 대도시 출신 여성들을 지칭한다.
신여성들은 베트남 여성 인구 비율의 10%에 불과하지만 그 영향력은 다른 세대에 비해 압도적이다.
이들은 주로 빈(Vinh)그룹, 베트남항공사, 베트남 주요 은행, 외국계 대기업 등에서 다년간 근무하며, 대졸초임 평균의 2배 이상인 월 1000달러(약 110만 원) 이상의 소득을 올린다.
또한 SNS(소셜네트워크)를 비롯한 각종 매체를 통해 베트남 여성들의 최신 유행과 소비 시장을 이끌어 가고 있다.
K팝, K드라마, K뷰티 등 한류 열풍도 이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신 여성들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전통적인 관념과 가치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가족 중심의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개인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성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25세 이전에 결혼해야 한다는 결혼관도 도전받고 있으며 이제 30세가 넘어서도 결혼을 서두르지 않는다. 다른 선진국 여성들처럼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어가고 있다.
베트남 신여성은 베트남을 넘어 아시아 문화를 선도해 나가는 '여성리더그룹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예상이 현실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수도 있다.
과거와 현재의 베트남 여성들은 그 모습과 문화는 달라졌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주도적이고 독립적이며 불의에 저항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