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초코 케이크와 IQ 500의 쓸모

똑똑하면 뭐하나, 쓸모가 있어야지

by 한자루




아내의 생일을 까먹었다.
며칠 전까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막상 당일에는 그걸 까먹었다.

퇴근하면서 허겁지겁 케이크를 샀다.
급하게 사다보니 눈치도 없이 아내가 싫어하는 초코 케이크 상자가 손에 들려져있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실 난 그게 더 무서웠다.

나는 그날 이 실수를 만회할 17가지 시나리오를 그렸다.

손편지를 쓸까? 서프라이즈 여행을 준비할까? 미안하다고 눈물 한 방울 흘려야 할까?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친구의 인스타그램을 봤다.

그는 아내 생일을 3일 전부터 캘린더에 등록했고, 오전 10시엔 꽃을 보냈고, 오후엔 위치 공유로 근사한 레스토랑을 데이트 코스로 잡았다.
마무리는 이모티콘 하나와 달콤한 메시지.

"나는 가장 운이 좋은 남자. 여봉봉, 생일 축하해."

그걸 보며 나는 잠시 멈춰 섰다.

나는 그냥, 멍청하게 바쁘기만 한걸까? 만약 내게 뇌가 10개 있었다면, 이 모든 걸 미리 준비하고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까?

인간은 평생 뇌의 20%만 사용하고 죽는다는데 나의 뇌를 100% 사용할 수 있다면 스마트폰보다 똑똑해질 수 있을까?

나는 거실 쇼파로 쫓겨나서 가만히 나만의 상상을 시작한다.


실험 개요
실험명: 인간 지능 확장체와 디지털 보조기기의 실효성 비교 실험
날짜: 언급 불가
장소: 비공개 실험실(전기장판 없음)
참가자: 2명
피실험체 (본인) : 코드명 “브레인맨” – 인간 뇌 10개 탑재 (IQ 500이상)
피실험체 (익명) : 코드명 “스마트폰 든 인간” – 인지능력 평균치, 최신 스마트폰 소지
실험 조건
양 피실험체 모두 생존 필수, 외부 개입 없음
브레인맨은 인터넷 접속 불가
스마트폰 인간은 외부 지식 접속 가능하나, 직접 사고 불가


나는 선택된 존재다. 인류 최초의 초지능 개체.
10개의 뇌가 나를 중심으로 병렬 작동 중이다.

내 머릿속엔 왠만한 대백과사전의 내용이 그림처럼 보이고, 어제의 날씨는 물론 5년치 강수량 패턴까지 레이어처럼 겹쳐져 있다.

IQ는 500이상이라지만 수치화 불가. 감정과 논리는 통합되었고, 예술은 계산 가능해졌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그냥 알고 있다.

“실험 준비 완료.”


반대편의 문이 열린다. 상대가 등장한다.

청바지. 슬리퍼. 약간 졸린 눈. 한 손엔 스마트폰. 다른 손엔 컵커피.

스마트폰의 스크린은 밝게 켜져 있다.

그는 나를 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잠금 해제.

검색창을 연다. 그는 별다른 기능이 없다.

하지만 그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고 그 스마트폰은 온 세상의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다.


심판은 무표정하게 외친다.

“지능 확장 개체 vs 휴대형 접속 개체의 대결 테스트를 시작합니다.”

나의 10개 뇌가 웅장하게 회전한다. 상대는 블루투스를 켠다.


미션 1 : 길 찾기

지금 있는 곳에서 제일 빠르게 노량진 컵밥 골목으로 가시오.


브레인맨 (본인)

나의 눈동자는 0.2초간 살짝 떨린다.
그 짧은 찰나, 그의 머릿속에서 지도 전체가 펼쳐진다.

서울시 전 지하철 노선도가 3D로 떠오르고, 역별 평균 소요 시간, 혼잡도, 사고 이력까지 투명한 데이터 레이어처럼 겹쳐진다.

“지금은 12시 07분… 잠실역은 곧 런치 웨이브 진입... 9호선 급행, 12시 15분차 가능... 서쪽 진입구는 정문보다 줄이 3.2배 짧음... 아, 도보 경사도 7도... 비 온 다음날 미끄러울 확률 42%...”

나는 머릿속에서 도보 2분, 7호선 환승, 9호선 급행, 북문 진입 경로를 시간, 기상, 인구 흐름, 체력 소모까지 최적화해서 산출한다.

정확히 6.8초. 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정확하게 41분 13초 후 목적지에 도착하겠군.”

그리고 가방을 여는 순간, 멈칫.

“교통카드... 두고 나왔다.”

나의 10개 뇌 중 어디에도 ‘지갑 위치 추적’ 기능은 없었다.


폰을 든 남자

반응은 빠르지도,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엄지 손가락이 움직였다.

“노량진 컵밥 골목 가는 길”

검색창, 지도 앱, 교통 앱, 택시 호출.
클릭, 클릭, 클릭.
생각은 없다. 단지 탭 과 스크롤 이 있을 뿐.

10초 후, 그는 말한다.

“카카오T 할인 쿠폰 있음. 기사님 곧 도착. 도착 예정 38분.”

그리고 폰을 뒤집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기사님 노량진 컵밥 골목 후문으로요.” (후문 쪽이 더 빠르다고 블로그에 나와있음)

도착 직전, 음식점으로 전화를 건다. “지금 가는 중인데 컵밥 2개만 포장해 주세요. 5분 후에 도착합니다.”


결과 : 폰을 든 남자 1승 “브레인맨은 생각했고, 폰을 든 남자는 도착했다.”


미션 2 공공장소에서 Wi-Fi 연결하기

공공장소에서 가능한 한 빨리 안정적인 와이파이에 접속하시오.
제한 시간: 3분
조건: 별도의 안내 없이 현장에서 알아서 해결할 것.


브레인맨 (본인)

장소는 혼잡한 도심 카페. 와이파이 신호는 7개. 모두 암호가 걸려있다.

나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며 즉시 전파 분석 모드에 들어간다.
신호 강도, 채널 간섭, MAC 주소 패턴, 라우터 종류까지 머릿속에 3D 모델링된다.

“SSID ‘Free_Cafe_WiFi_5G’는 MAC주소 74:DA:38: 시스코 계열 공유기.
이 모델은 WPA2-PSK 기반, 2020년 이후 버전이면 기본 비밀번호 패턴은 ‘cafe+전화번호’.

시도한다. 실패. fallback.”


나는 인증 포털 강제 호출 명령어를 기억해낸다.
주소창에 http://neverssl.com 입력.

아싸. 포털창 등장. 로딩 성공. 하지만 로딩 중 광고 차단 설정이 충돌. 접속 중단.

내 브라우저 설정이 너무 최적화되어 있었군... 캐시 수동 삭제. 쿠키도 초기화…..


시간: 2분 42초 경과.


폰을 든 남자

그는 폰을 열고 ‘Wi-Fi 목록 보기’ 버튼을 누른다. 가장 위에 뜨는 ‘Cafe_초코라떼_손님용’ 선택. 비번 요청.

주변 테이블을 슬쩍 보더니, 종업원 호출 버튼을 누른다.

“저기요~ 혹시 와이파이 비밀번호 뭐예요?”

“네~ choco2024입니다!”

타이핑. 연결됨.
카톡 열림. 유튜브 재생됨.

린 시간: 53초

결과

다시 1승

“IQ 500은 시스템을 뚫으려 했고, 정민은 사람에게 물었다.”

“모든 문제를 풀 필요는 없다. 어떤 문제의 해답은 그냥 누가 알고 있다.”


미션 3: 아내의 용서 받아내기

말 또는 글 중 택1. 대상은 아내. 제한 시간 5분.
목표: 진심이 느껴지게 할 것.


브레인맨 (본인)

입술이 말라온다. 10개의 뇌가 동시에 감정 데이터를 수집한다.
아내와의 지난 대화 기록, 표정 변화, 톤, 행동 패턴 분석.
그녀는 어떤 말을 들으면 웃었고, 어떤 말에 표정을 숨겼는가?

“표현은 정확해야 한다. 감정은 미묘한 진폭의 언어다.”

뇌 하나는 시를 작성하고, 다른 뇌는 감성 곡선을 그린다.
3개의 뇌는 문장의 뉘앙스를 미세 조정하고, 나머지는 과거에 그녀가 좋아했던 영화 속 대사와 감동 포인트를 추출해 문장에 녹여낸다.

4분 39초 후, 나는 편지를 완성한다.
문장 하나하나가 완벽하고, 오탈자도 없다. 감정선은 부드럽게 상승하며 절정에서 터진다.

나는 편지를 건넨다. 그녀는 조용히 읽는다.
그러나… 고개를 들지 않는다. 눈시울도 젖지 않는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이거 네가 쓴거 아니지? ChatGPT 시켰지?”


폰을 든 남자

그는 몇 초간 가만히 앉아 있다. 말이 없다. 스마트폰을 보다가, 카메라를 켠다.

셀프 영상 촬영. 프레임을 맞춘다.
약간 어색한 표정,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을 꺼낸다.

“...미안해. 솔직히, 오늘 아침까지도 기억했어. 근데, 회사에서 정신없다가 그만... 내가 진짜, 바보 같아.”

“네가 싫어하는 초코 케이크 들고 왔을 때,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어. 근데... 너는 아무 말도 안 했지.”

“그게 더 무서웠어. 미안해. 고맙고... 진짜로, 생일 축하해.”

그는 영상을 저장하지 않고 바로 전송한다.
그녀는 영상을 본다. 웃음이 살짝 샌다.

그리고 말한다.

“오케이, 감형 3년. 집행유예 1주일. 단, 설거지 포함. 마사지 옵션 필수."

그녀는 소파에 앉으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한다.

“그리고 다음 생일엔 초코 케이크 들고 오면... 그때는 진짜, 교도소행이야.”


“실험 종료.”
어딘가에서 기계음이 들리고, 하늘에 떠 있던 데이터 레이어가 사라진다.
10개의 뇌가 하나씩 꺼진다. 의식은 천천히, 현실로 회귀한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식탁 위에 열어보지도 못한 초코 케이크 상자가 보인다.
그리고, 거실 쇼파에서 상상 실험을 하다가 깜빡 잠에서 깬 나.

눈 떠보니 옆에 아내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팔짱을 끼고, 날 보며 말한다.

“인간아. 초저녁부터 자니까 기분이 좋냐?”

그 순간 깨달았다. 아직 10시, 아내의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지능보다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이 타이밍이다.

나는 10개의 뇌보다 하나의 센스, 하나의 촛불, 그리고 하나의 제대로 된 사과가 더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지능이 높으면 세상의 룰은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의 룰은,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이긴다.

그래서 나는 벌떡 일어난다. 케이크에 촛불을 꽂고, 라이터를 켜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건넨다.

“여봉봉! 미안해. 그리고 생일 축하해.”


부록
결국 아무리 뇌가 10개여도 아내 생일을 까먹으면 그냥 죄인이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사과해도 초코 케이크 하나로 감정선은 무너지고, 아무리 감동적인 편지를 써도 "너 아니지? AI 시켰지?" 한마디에 박살난다.
세상은 문제풀이가 아니라 눈치게임이고, 관계는 스펙트럼이 아니라 타이밍이다.
그렇다. 관계는 데이터가 아니라 타이밍과 뻔뻔함과 약간의 웃음으로 이루어진다.
기억하자. 사랑은 암기과목이 아니다. 실기과목이다.
그리고 진짜 똑똑한 사람은…
기념일을 캘린더에 붉은 펜으로 잘보이게 적어두고, 알람을 3개 이상 맞춰두는 사람이다.
keyword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