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시간에 남기는 말
저녁 식사 중이었다. 분위기가 너무 조용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들, 닭이 3마리 모여서 목욕을 하면 뭐게?”
아내는 젓가락을 멈추고 나를 봤고, 아들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삼계탕.”
나는 꿋꿋하게 후속타를 던졌다.
“그럼 돼지 세 마리는?”
무응답. 정적. 서늘한 침묵에도 나는 유쾌하게 소리쳤다.
“삼겹살이쥐~”
그 순간 아들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아빠, 제발... 아재 개그 그만하면 안될까?”
내 말이 공기처럼 통과됐다. 나는 방금 뭔가 존재감의 계단에서 미끄러졌다는 걸 느꼈다.
존재하되, 인식되지 않는 느낌. 혹시 요즘 아버지란 존재도 그런 건 아닐까?
존재하지만, 아무도 직접 보진 않는… 약간 귀신 같은 존재.
한때 가장이라 불렸던 ‘아버지’는 이제 가정 내에서 투명한 객체로 진화했다.
간섭하지 않고, 존재를 최소화하며 자신의 외로움을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버티는.
가부장제가 무너진 시대, 우리 아버지들은 흔적은 남았지만 실체는 흐릿한, 말하자면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그날 식탁에서 숟가락을 든채 엉뚱한 상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매일 1시간 동안, 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된다면...
이건 슈퍼히어로의 은신술이 아니다.
그저 현실 속 중년 아버지가 하루에 1시간씩 ‘귀신’처럼 사라지는 상상 실험이다.
연구 제목 : 하루 1시간, 자동 소멸 현상에 관한 인간 심리 반응
실험 방법 : 매일 1회, 랜덤 1시간 동안 '완전 투명화'. 위치, 상황, 감정 자유
피실험자 : 50대 남성(본인), 가정 있음, 자아 잠식 중
목표: 내가 사라졌을 때, 나라는 사람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날짜: 실험 개시일 D+1
시간: 오전 5시 15분경
장소: 화장실
상황 요약: 면도 중 투명화가 발생함.
화장실 거울 앞에서 면도기를 들고 있었다.
따뜻한 물로 얼굴을 적시고, 면도기가 살살 턱선을 따라 흐르던 찰나였다.
문득, 거울 속 내 얼굴이 사라졌다. 처음엔 크림이 눈에 들어갔나 싶었다.
눈을 비볐다. 다시 봤다. 없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봐도, 거울은 공허했다.
내 얼굴이, 내 눈이, 통째로 사라진 거였다. 손에 들린 면도기만 허공을 찌르고 있었다.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잡고’ 있다는 감각은 있었다.
“야야야야…”
헛웃음 섞인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소리는 나왔지만, 어딘가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렸다.
내가 말한 건데, 내 입이 없는 소리였다.
거실로 나갔다. 아내가 간단한 아침을 준비 중이다.
내가 바로 옆을 지나가자, 주걱을 허공에 휘두르며 말했다.
“어우, 왜 갑자기 으슬으슬하지? 창문 좀 닫을까?”
나는 접시에 담긴 계란말이를 손으로 집어 먹었다.
아내는 빈 접시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요즘 피곤하긴 하지… 아직 잠이 덜깼나보네.”
나는 조심스럽게 쇼파 한쪽에 앉았다.
손으로 얼굴을 만져봤다. 눈, 코, 입… 다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기술도 아니고 마법도 아니고, 단지…나는 지금,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이 되었다.
날짜: D+5
시간: 오후 9시 03분경
장소: 거실, 안방
상황 요약: TV 시청 중 투명화 발생. 가족의 ‘무심한 진심’을 듣게 됨.
요즘, 투명해지는 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사라지는 게 무섭긴커녕, 어느샌가 '관찰자'가 되는 일에 중독되어 있었다.
이번엔 저녁 TV 타임이었다.
아내는 거실에서 리모컨을 잡고 채널을 넘기고 있었고,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순간, 물컵이 허공에 둥실 떴고, 내 몸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감청할 수 있는 황금의 시간이 시작됐다는 알림음 같았다.
아내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목소리는 평온했고, 너무도 일상적이었다.
“요즘 남편 말 수가 줄었는데… 솔직히 좀 편하긴 해.”
그 말이 나를 툭 밀었다. 넘어지진 않았지만, 멀쩡하던 내 존재감이 소파 쿠션처럼 살짝 꺼졌다.
그때 방 안쪽에서 들려온 아들의 목소리.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처럼 흘렸다.
“아빠 없으니까, 뭐랄까… 숨통이 트이네.”
그 순간, 나는 숨을 들이쉬다 말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아니라 공기만 가득 찬 기분이었다.
나는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래, 지금 내 역할은 아마… 가만히 있는 것이겠지.
소리 내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평소에 어떤 방식으로 가족 곁에 있었을까.
지구 위를 말없이 떠도는 위성 같았던 걸까. 아니면 그냥…
아무도 보고 싶지 않은 유튜브의 광고같은 존재였던 건 아닐까.
요즘 아버지란, 입은 닫고 지갑을 열기만 하면 되는 존재인 것일까.
말 없는 존재. 그게 내가 진화한 최종 형태라면, 조금… 씁쓸하다.
날짜: D+9
시간: 오후 5시 57분경
장소: 아파트 단지 놀이터 앞
상황 요약: 산책 중 투명화 발생, 피실험자는 처음으로 집 밖의 환경에서 투명 상태를 경험함
햇살이 붉게 내려앉는 오후. 나는 단지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오랜만에 혼자 나와 봤다.
아무도 말 걸지 않고, 아무도 내 개그에 한숨 쉬지 않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발끝이 사라졌다.
“어어?”
익숙한 공기 저항의 부재. 발소리의 실종. 셔츠 끝자락이 흔들리는데, 그 셔츠가 보이질 않는다.
투명화였다. 아파트 외부에서 투명인간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대로 멈춰섰다. 마치 영화 속 히어로가 갑자기 능력을 각성한 듯.
다만, 좀 더 덜 멋있고, 더 당황스럽게.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았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누군가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 사이, 나는 아무도 모르게 앉아 있었다.
그때, 정자 맞은편 벤치에 누군가 조용히 앉았다. 아무도 없던 자리였는데, 어딘가 어색한 주름 하나가 생겨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봤다.
그는, 아니, ‘그 존재’는 아주 느리게,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마치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던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우린 둘 다 말이 없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냥… 서로 오래 동안 알고 지낸 사이 같았다.
“당신도 외로운 중년의 아버지군요.”
그렇게 우리 주변에는 투명인간으로 변하는 아버지들이 은근히 많았던 것이다.
우리는 1분쯤 그렇게 앉아 있었다.
두 투명한 중년이, 한 벤치 너머에, 같은 공기 속에.
이상하게… 그 시간이 이번 실험 중 가장 따뜻한 시간이었다.
날짜: D+11
시간: 오후 8시 15분경
장소: 집 거실
상황 요약: 저녁 식사 후, 가족 TV 시청 시간에 투명화 발생
식사 후 거실 소파. 아내는 드라마, 아들은 휴대폰, 나는 물컵을 들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내가 무슨 말이라도 꺼냈겠지만, 오늘은 그냥 조용히 있으려 했다. 아재 개그 금지령이 내려진 지 벌써 3일째였고, 가족 평화 유지에 협조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손에 들린 물컵이 허공에 붕 뜬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나, 사라졌다.
이번엔 놀라지도 않았다. “또 이 시간이군.” 오히려 익숙한 편안함. 나는 소파 옆으로 조용히 이동해, TV를 보고 있는 가족을 바라보았다.
아내는 드라마를 보며 웃었고, 아들은 화면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내가 거기에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아들의 옆에 앉았다. 그의 휴대폰 화면에 아빠 몰래 본 주문내역이 떠 있었다.
야식. 치킨. 매운맛. 쿠폰 적용 완료.
“그래, 네가 진짜 원하는 건 그거였구나.”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였다면 마늘간장맛으로 주문했을텐데.
그 순간, 아들이 고개를 들더니 허공을 힐끔 봤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빠가 요즘 너무 조용해서… 좀 이상해.”
아내는 드라마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드라마 속 배우가 오열하는 장면을 보면서 아내는 눈물을 훔쳤다.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바라보는 모습이 어쩐지 낯설 정도로 조용하고 단단해 보였다.
나는 그 옆에서, 들리지 않는 농담을 하나 던졌다.
“나 때는 저런 장면 나오면 채널 돌렸지…”
말은 나왔지만, 공기 중 어딘가에서 툭 끊겼다.
내 말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들리지 않는 말은 없는 말과 같다는 걸.
나는 문득, 이 거실이 작은 극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 위엔 가족, 나는 조용히 관객석 뒤편에 앉아 있는 기분. 박수도, 야유도 없이.
날짜 : D+15
시간 : 오후 11시 02분경
장소 : 집 서재
상황 요약 : 투명화 상태에서 가족의 일상을 지켜보다가, 실험의 끝을 자각함.
서재에서 책을 정리하다가, 문득 거실로 시선을 돌렸다. 아내는 무릎 담요를 덮고 오늘도 드라마를 보고 있었고, 아들은 책상 앞에서 뭔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 순간, 몸이 투명해졌다.
그러자 나는 그냥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이제는 장난도, 감정도 없었다.
그냥 익숙한 일상의 한 조각처럼.
나는 조용히 아들의 방으로 갔다. 문틈 사이로 보인 그의 일기장.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문틈 사이로 아들의 일기장이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 적힌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아빠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신경 쓰인다. 이 정도면 무슨 일 꾸미는 중이거나, 진짜 초능력 생긴 걸지도.”
나는 조용히, 아주 잠깐 웃었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정도였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거실로 돌아오며 리모컨에 살짝 손을 댔다.
눌러지지도 않았지만, 익숙한 동작이었다.
그 순간, 아내가 고개를 들었다.
“이상해. 이 시간 되면 꼭 뭐가 스르륵 움직여."
그리고는 잠깐 멈칫하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근데 이상하게… 요즘은 그게 기다려진다니까....”
그리고는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TV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시간만큼은 누군가가 나를 떠올렸다는 사실이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아도, 나는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졌다. 그리고 사라졌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이 상상 속의 실험은 끝났다. 아니, 이제 굳이 계속할 이유가 없다.
더는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아버지라는 존재는, 이름보다 기척에 가까워졌다.
먼저 말하지 않고, 먼저 웃지도 않고, 먼저 사라지는 사람.
집 안 어딘가에 늘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전등 뒤에 머물다 저녁이 되면 꺼지는 빛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무게가 되어선 안 되고, 존재감을 내세워서도 안 되는 시대에, 아버지는 슬며시 지워지는 방법을 선택한 것만 같았다.
상상의 실험이 끝나고 나는 조용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내 자리를 대신하지 않아도, 그들은 내가 사라진 시간에도 나를 완전히 잊진 않았다는 걸 느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었고, 보이지 않아도 감지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건 자유 같지만, 실은 나 자신과 가장 깊이 마주하는 시간이다.
처음엔 장난이었고, 곧 외로움이었으며, 끝내 성찰이 되었다.
나는 사라짐 속에서 누군가를 이해하게 되었고, 누군가가 날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투명함은 ‘없음’이 아니라, 가장 조용한 방식의 ‘있음’일 수 있다.
이 세상엔 잊혀지는 것들이 있다.
소리 없이 식는 밥처럼,
식탁 한쪽에 조용히 놓였다가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슬그머니 치워지는 반찬처럼.
아버지들은 그것들이 되어가는 중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덜 초라하기로 했다.
조용히 사라지되, 조용히 기억될 수 있도록.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되, 그 자리가 허전하다고 느껴질 만큼의 사람으로 남기 위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